제49화. 시급하다 (2)
“아이작! 정말 대단하구나!”
릴라이의 해맑은 얼굴에 아이작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왜냐고?
“이 숙부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네가 걸음마를 하게 되다니!”
아니, 새끼야.
네가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냐.
“심지어 말까지 하게 되다니!”
그거 아니라니까?
“이 숙부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
시발 놈아!
사제품 받는다는 말을 왜 안 하냐고!
아니, 물론 자신의 모습을 숙부가 좋아하니까 아이작도 좋긴 했다.
겨우 이거 가지고 이러면, 다 자랐을 땐 아주 기절을 하겠다 싶지만, 아무튼 좋다!
‘그런데 왜 사제품 이야기만 안 하냐고, 새끼야!’
분명 장학사 놈들의 추천서 들어갔을 텐데?
긍정적인 신호의 증거로 가주 놈이 학력 테스트 용지까지 뿌리고 갔는데?
시발, 학력이 달려서 아카데미 가야 한다는 말 안 들으려고 더럽게 신경 써서 답변해 줬는데?
인성 테스트도 아주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잖아!
심지어 위스퍼를 시켜서 가주 방을 엿듣게 한 결과, 모든 게 긍정적이라고 했는데?
뭐지? 왜 사제품 이야기를 안 하는 거지?
그러나 릴라이는 답변 대신 활짝 웃었다.
“이 정도면 희망이 있다. 이 정도면 몇 년이면 몸이 정상이 될지 모른다.”
설마 몸 상태가 이렇다고 사제품 거절당했나?
아니다. 사실은 올해 수여 명단에 올라가 있고 릴라이가 숨기는 것뿐이지만, 아이작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그의 눈이 도끼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몸을 성장시킬까?’
그래서 혼자서 수도에 갈까?
‘아니, 역시 정식으로 이동 수단을 지원받는 게 나은데.’
그도 그럴 게 신성제국 헬라는 굉장히 넓었고, 동쪽 에슈아에서 중심지인 수도까지도 꽤 멀었다.
일반적인 이동 수단이나 걸음으로는 몇 달은 족히 걸릴 거리. 그걸 불과 일주일 단위로 대폭 단축해 주는 게 신수들이었던 것이다.
‘사제품 수여식에 맞추려면 신수를 꼭 받아야 해.’
그것도 에슈아 가문의 상급 이동 신수를!
그리고 에슈아 공작령의 블루라인을 넘나들려면 숙부인 릴라이나 에슈아의 주인인 가주의 허락이 필요했고 말이다.
그런 아이작의 생각을 읽은 듯, 릴라이가 웃었다.
“그래, 걸을 수 있다면 여러 곳을 둘러보면 좋겠지.”
그래! 그럼 그렇지! 이 이쁜 놈!
사제품을 받은 기념으로 대륙 여행을 기획하고 있었구나!
릴라이 이 새끼, 넌 성기사지만 예쁜 짓 하니까 봐줄게. 그깟 대륙 여행? 좋다. 사제품을 받으러 수도에 갔다 온 다음에 가줄게.
그러니 지금 당장 이 에슈아 땅을 벗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 에슈아 공작령 곳곳을 돌아다니자. 오늘부터 이 숙부와 본격적인 수련을 해보는 거다! 이곳 에슈아엔 성녀님을 길러낸 훌륭한 수련장이 많단다!”
…눼?
아이작은 이 새끼들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야. 나 사제품 받으러 가야 한다니까?
그럼 수도를 가야지!
왜 난데없는 수련 타령이야?
그러나 아버지와 이미 말을 맞춘 릴라이는 웃기만 했다.
설마 성직자 가문에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 급하지 않다. 아이작한테는… 그래. 안타깝게도 사제품은 기각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잘만 교육시키면 아이작의 인서… 신앙심도 변하지 않을까?
릴라이가 대답을 기다리는 조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버지께서도 성인이 될 때까진 에슈아를 나가지 말라고 하셨으니, 수련 이야기를 들으면 몹시 좋아하실 거다.”
아이작은 대답 대신 방긋 웃었다.
다음 날.
아이작이 사라졌다.
-시벌 놈들아, 찾지 마라.
가출 편지는 덤이었다.
* * *
신성제국 헬라.
교황청이 있는 수도엔 제국에서도 권위 있는 아카데미가 있다.
그리고 올해 이 명문을 졸업하는 졸업반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번에 10살짜리 애가 사제품을 받는다며?”
“미쳤다, 이번 졸업식은 더 화제가 되겠네. 기회일지도!”
“뭐, 우린 들러리고, 가장 주목받는 건 <성법과>겠지. 원래도 톱과잖아.”
졸업 예정 학생들은 하나같이 어떤 반을 보며 지나갔다.
<성법과>.
사제를 배출하는 엘리트 학과. 나라의 주역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성법과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망주들조차 미친 듯이 동요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이작 에슈아 때문이다.
“야. 10살짜리가 사제품을 받는 건 전대미문 아니냐.”
“도대체 어떤 아이길래 10살이 우리랑 똑같이 사제품을 받아?”
그런데 그때였다.
“푸핫!”
선명한 적발의 소년이 코웃음을 터트렸다.
“니들은 왜 그깟 애송이를 겁내고 있냐?”
“나이저!”
“그것도 젖먹이 모습인 애새끼한테.”
그는 10년 전, 아이작과 보물고에서 만났던 적의 공작가 순혈 나이저 세페트였다.
그 역시 이번 사제품을 받는 졸업생이었다.
그리고 5대 가문 중 하나가 하는 말은 일반적인 가십거리 풍문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진짜일 확률이 99%.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젖먹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력 달리냐? 말 그대로야. 그 새끼, 해골왕의 마력을 처먹더니 저주받아서 10년째 성장을 못 했대! 괜히 10년간 자취를 감춘 게 아니지.”
“뭐? 진짜야?”
“그렇다면 좀 무섭다. 원래 같은 저주라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모습일수록 최악 등급의 저주 아냐?”
“맞아. 해골왕이 그렇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저주를 에슈아가…….”
“그렇게 못 믿겠으면 가족한테 확인하든가. 어때? 다들 궁금해하는 거 같은데.”
“!”
나이저 세페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엔 슈리 에슈아가 있었다. 슈리는 ‘저 새끼 또 시작이네.’라는 듯, 혐오스럽게 나이저 세페트를 보고 있었다.
나이저 세페트는 더욱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기껏 에슈아에 교황가 핏줄이 섞여서 좀 좋아지나 했더니, 저주받은 놈이 또 나왔네. 푸웁.”
그러나 슈리는 본 척도 안 했다.
‘말을 섞어봤자 이쪽만 손해지.’
하지만 나이저 세페트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청의 에슈아가 신들의 미움을 샀다는 건 공연한 사실이야. 거기가 얼마나 저주받았냐면, 성녀 가문인데 사내놈만 태어났다니까? 그게 무려 7명이야! 심지어 위부터 줄줄이 저주받았어. 쟤 세대에서 성녀 후보들이 태어난 게 기적이지.”
“뭐? 그 정도야?”
“그래, 얼마나 저주받았냐면…….”
슈리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저 새끼가 청에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알지만, 보자 보자 하니까 숙부들이랑 아버지까지 건드려?!
이건 그냥 못 넘어간다.
“너, 방금 그 발언은 경우에 따라서는 에슈아 공작가를 모욕하는…….”
“아! 아닌가? 아님 말고. 미안, 얘들아. 내가 잘못 알았나 봐!”
나이저 세페트는 가문 간의 문제로 불거지지 않게끔 은근슬쩍 피해가며 조소를 지었다.
“아무튼, 아이작 에슈아? 이번에도 보나 마나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부른 거야. 사제품은 무슨, 이벤트용 명예 사제품이나 받는 거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그만해.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이작 에슈아가 사제품 받을 자격 요건을 충족했대.”
여학생 중 하나가 나이저 세페트를 혐오하듯 보자, 모두가 놀랐다.
이번엔 나이저 세페트도 흠칫 놀랐다.
학생들은 당황한 듯 물었다.
“설마 시험을 통과한 거야? 10살짜리가?!”
“아… 자격시험을 통과한 건 아니고, 사제님들 추천이라는데…….”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나이저 세페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녀 가문이 좋긴 좋네! 곧 사라질 공작가가 어디 성장도 못 하고 자격도 안 된 애새끼를 기어이 처넣어? 동료들을 개같이 아는 거지.”
저 시발 놈이 진짜!
결국 가문의 험담에 슈리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는 그때.
“네놈은 교황청 사제님들이 우습나 보군?”
“!”
낯선 목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더욱 식겁했다.
“키나 베리트……!”
문 쪽이었다. 14살로 자란 교황의 손자는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교황청 사제님들께서 단순히 가문의 이름만 보고 사제품 추천을 줄 것 같냐고. 오히려 졸업시험인 자격시험보다 더 까다로운 게 추천 제도야. 아니 애초에-”
“!”
“그 추천을 받아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네 아버지. 리온 세페트 공작님이실 텐데.”
“…뭐, 뭣?!”
키나 베리트는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네 아버지는 동료들을 개같이 아시는 분이었군.”
“이……!!”
주변이 술렁거리자 나이저 세페트가 이를 갈았다. 망할, 교황가 놈이 왜 에슈아의 편을 들어?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문제는 따로 있었다.
“넌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잖아! 왜 여기에 있고 지랄이야!”
“건국제에 불려왔거든.”
“아하! 교황가의 손자도 어쩔 수 없구나! 선배들의 모습을 견학이나 해야 하다니!”
“아니. 이번 졸업생들의 멘토 겸 성법 스승으로 불려왔는데.”
“……?!”
뭐가 어째?
“스승?!”
동시에 슈리는 미간을 좁혔다.
키나 베리트.
교황의 손자인 그는 아직 사제품만 안 받았을 뿐이지, 이미 사제들은 그를 중급 사제 이상의 동료로 보고 있었다.
사제품도 지금은 관심이 없어서…….
‘아니, 아니다.’
교황이 말했다고 한다.
키나의 재능에 다른 또래 아이들이 좌절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
그래서 정식 사제직은 성인이 된 후에 받고, 지금은 깨달음을 나누고 경험을 쌓으라고 했다고.
마치 성자와 교황은 당연히 저 아이가 될 것이라는 당당함이 아닌가.
그러나 에슈아를 감싸준 듯한 키나 베리트는 슈리를 보며 웃었다.
“네가 걱정이다, 슈리. 성장도 못 하는 아이작 에슈아는 사제가 될 가능성이 아예 없고. 부디 네가 에슈아를 이끌 때까지 청이 버티고 있어야 할 텐데.”
“이……!”
아주 청이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라!
하지만 그는 안쓰럽다는 듯 슈리에게 속삭였다.
“아, 애초에 반푼이한테는 추기경 자리도 힘들려나? 뭐, 힘들면 찾아와라. 반쪽은 자랑스러운 금의 핏줄이니 너나 네 아버지 둘쯤, 교황가가 품어주는 것도 어렵지 않지. 내 시종 자리는 충분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
뭐가 어째?
사촌 조카의 시종?
이 새끼는 지금 지 당숙한테 자기 몸종을 맡으라는 말을 지껄이는 건가?
그러나 미소 짓는 키나 베리트는 슈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그의 뒤로 교황가의 시종이 자연스레 붙었다.
동시에 키나 베리트는 교황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 아이작의 칭찬을 하던 장학사의 말이었다.
-각하, 제가 봤습니다. 분명 아이작 공자께서 해골왕의 마력을 제어하셨어요! 성령의 힘도 더 강하게 하셨고요!
어지간하면 칭찬을 안 하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우겠지. 어차피 그런 젖먹이 몸으론 사제품 명단에 오르나 마나일 테니까.
추기경인 아버지도 이미 그딴 건 라이벌도 아니라고 하셨고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쩌면 그분이 신성제국을 구하실 분이 될지도 몰라요.
키나는 자꾸만 신경 쓰였다.
* * *
“아! 이 개 같은 새끼들!”
기숙사로 돌아온 슈리는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둘 다 5대 공작가라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건지.’
슈리는 아버지와 에슈아의 체면 때문에 참았지만, 그래도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실력으론 그 둘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밖이 벌써 건국제로 이 수도가 시끌시끌했다. 무려 교황 후보들이 사제품을 받는다는 말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 듯했다.
뭐, 본인들의 예비 주인이 보고 싶을 테니 당연하지만.
문제는 그 역사적인 행사에!
모두가 주목하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가족들이 아무도 안 왔다는 거지!
슈리는 서러웠다.
‘이게 다 그 망할 꼬맹이 때문이야!’
모두가 가출한 아이작을 찾는 데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슈리도 끝까지 아이작을 찾아다니다가, 아슬아슬하게 아카데미로 돌아왔고 말이다.
‘뭐, 그놈이 에슈아에 순순히 짱박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만.’
사실 슈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들이 일부러 아이작이 사제품을 못 받게 하려 한다는 것을.
‘그래, 그 새끼 그거, 결국 인성에서 터질 줄 알았지.’
주제에 사제는 무슨 사제야.
마왕이나 해야지.
결국 슈리는 하인들이 기숙사로 미리 날라준 짐 가방을 가져왔다.
‘얌전히 집에서 인성 교육이나 받아라.’
사제품을 받고 싶어?
지가 가출하면 어쩔 건데?
애초에 아이작은 에슈아 공작령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출입증이 없으면 애초에 에슈아 검문소를 절대 통과할 수 없었으니까.
‘어차피 수도에 오기 전에 걸릴 거…….’
“…는 아씨, 가방이 뭐가 이리 무거워? 아버지가 또 뭘 넣으셨길래…….”
그렇게 투덜거리며 짐 가방의 문을 여는 그 순간.
“찌발 놈아. 빨리 안 여냐.”
“?”
슈리는 제 눈을 의심하며 가방 안을 보았다.
“뭐 하는데 이러케 늦께 처오고 찌랄이야?”
“??”
“아, 댔고! 낌슈리. 빨리 꺼내봐. 아, 화장실 가고 싶어 뛰지겠네.”
“?????!!”
“뭘 그렇게 처봐, 때끼야.”
슈리는 제 짐 대신 들어 있는 아이작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