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변신 (2)
신이 내려준다는 사제의 서품식, 황제가 임명한다는 기사의 서임식.
그리고 기사들의 서임식은 ‘태양’을 상징하는 황제가 주관하며 ‘위대한 시작’이란 의미로 건국제 첫날 정오에-
사제들의 서품식은 ‘달’을 상징하는 교황이 주관하며 ‘영원히 무르익는 영광과 전승’이란 의미로 건국제를 닫는 마지막 날 밤에 거행된다.
그리고 둘 모두 신성제국의 주요 전력이었다. 괜히 나라가 세워진 영광스러운 날에 임명하는 것이 아니리라.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냐?
한마디로 서품식엔 구경꾼들이 무지하게 몰려온다는 뜻이다.
뭐, 원래도 마족과 대치 중인 상황인 만큼 서품식은 화제가 되었고, 올해는 특히 화제가 될 만하지만…….
“에슈아 공자들이라면 레아 님의 동생분들이 아닙니까앍!!”
“으얽!!! 카야 님!! 반드시 동생님들과 친해져서 카야 님과 인사를 해보겠다!”
그랬다.
혈기 왕성한 기사들에게 아이작과 슈리의 존재는 그들의 누님인 성녀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
“역시나 이번에도 젊은 기사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군요…….”
“에슈아의 성녀들이 인기가 좀 많아야지…….”
서품식을 준비하는 하인들이 한숨을 쉬었다.
에슈아는 원래부터 빼어난 천상의 외모로 유명했다. 괜히 마족들이 성녀를 보고 넋을 잃다가 썰려 나간 것이 아니다.
‘해골왕의 허점을 만들기 위해 미의 신이 특별히 외모에 관여했다지.’
문제는 정작 그 토벌 대상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거지!
심지어 넘어오란 해골왕은 안 넘어오고, 주변인들만 맛탱이가 갔다는 거지!
“우오오! 레아 님!”
“카야 니임!”
“한 번이라도 뵐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로 저렇게 말이다.
심지어 성녀들은 성기사들을 이끄는 무력의 천재들.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하다.
그래서 늘 사제품을 받게 되는 에슈아의 남자들은 성기사들의 관심에 고생 아닌 고생을 해야 했다.
“어휴, 에슈아 사내들은 참 기구하네요. 능력이 없으면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식장에 강제로 끌려가고, 능력이 있으면 요절하고.”
이쯤 되면 해골왕도 참 치졸하다 싶다.
“에이, 그중에서 제일 저주받은 건 아이작 공자님이시지.”
“아, 10살이신데 정말 젖먹이 모습이시라면서요? 아장아장 귀엽긴 한데 불쌍해서 어떡하죠.”
“그러니까. 오늘도 완전 비웃음을 살 것 아냐… 헉?”
그러나 만찬을 옮기던 하인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그들의 옆으로 지나간 남자 둘 때문이었다.
“바, 방금 보셨어요?!”
“어어어? 한 분은 슈리 에슈아 님이고, 다른 분은 누구시지?”
“장난해? 이 제국에서 백금발이 또 누가 있겠어!”
“…엑?”
“엑?!”
놀란 하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 연회장 안.
올해 사제품을 받는 졸업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같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각자 자유롭게 술렁이고 있었다. 주제는 모두 같았다.
“야, 슈리 에슈아 어디 갔냐? 젖먹이 동생 기저귀 갈아주러 갔어?”
“동생이 오늘의 주인공이시라고 맨 마지막에 등장할 생각인가?”
올해 배출되는 성법과 학생들은 총 오백 명.
그중 적의 공작가의 파벌은 아이작이 아장아장 들어오길 벼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10살짜리한테 사제품을 주다니. 너무 심하잖아.’
‘우릴 무시하는 건가?’
하지만 실력에 관해 뭐라 말하지 못하는 건 하필 아이작이 식당에서 구해준 사람이 적의 공작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아이작에게 도움을 받게 된 적의 공작가를 우습게 보는 게 될 수도 있으니.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을 툭툭 건드렸다.
“수석은 너인데, 사람들이 집중하는 건 그 젖먹이니 열 받겠어, 호크.”
모두가 이번 해 졸업 수석을 보았다.
녹빛 머리카락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는 특히 필기시험에서 7년간 한 번도 만점을 놓친 적 없는 압도적 천재다.
그럼에도 학년장은 차석인 슈리 에슈아가 차지했지.
그리고 이번엔 아이작 에슈아다.
“에슈아에 또 밀리다니, 억울하지도 않냐?”
“뭐, 불만이 있다 한들 촌구석 자작가가 어디 감히 대귀족한테 덤빌 수 있겠어.”
그 말에 주변이 되레 신난 듯 바람을 넣으려할 때 나이저 세페트가 막았다.
“시끄럽고, 준비나 해.”
“나이저……!”
나이저 세페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에슈아라고 또 성법은 쓸 수 있나 본데, 그래 봐야 젖먹이 모습이지.”
“맞아. 그 아장아장 걸음으로 불려 나가면 가관이겠다.”
“오히려 주목을 샀으니 자충수야. 그 저주받은 모습 보면 다들 욕할걸?”
즉 아이작이 이름이 불려서 아장아장 들어오면 비웃어 주라는 의미였다.
그것만으로 이 사제품 수여식은 의미가 있었다. 애초에 나이저 세페트는 아이작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고 말이다.
가뜩이나 청에 대한 이미지도 최악인데, 아이작 에슈아?
성녀 보물고에서 그 새끼가 자신들에게 한 짓을 또 잊을 것 같냐? 그놈 때문에 10년 전, 얼마나 가문에서 갈굼을 당했는지.
“아버지께서 무슨 심보로 청 따위의 추천서를 받아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였다.
쾅!
“!”
거대한 문이 활짝 열리고, 떠들썩하던 연회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농담을 즐기던 학생들은 물론, 사담을 나누던 모든 이들이 즉시 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나타난 건 5대 신앙, 5대 가주.
금, 청, 적, 백, 흑의 순으로 다섯의 추기경들이 거침없는 일선을 그리며 상석으로 향했다.
모두가 경배하듯 고개를 숙였다.
절도 있게 흩날리는 검은 사제복하며, 사나운 듯하면서도 완벽하게 절제된 발걸음하며.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압도적인 분위기다.
‘저분들이 추기경들……!’
‘5대 신앙의 우두머리!’
과거 숱한 마왕들을 없애왔고, 이제는 무려 해골왕을 토벌할 수 있다는 유일한 이들이다.
어린 사제들에게는 그야말로 우상의 대상. 뭐, 정작 그중엔 시름을 앓는 이도 있는 듯했지만 말이다.
“어쩐 일로 청께서 지각을 다 하셨군요.”
적의 가주가 보기 드물게 옷이 흐트러진 에슈아 가주를 보며 웃었다.
“1분 전까지도 안 오시길래 오시지 않는 줄 알았죠.”
“꺼져라.”
청의 가주 일라이는 살짝 흐트러진 영대를 바로 하며 욕을 삼켰다.
빌어먹을, 손자 놈 때문에 이 나이에 이게 뭔 짓인지.
역시 23시간 만에 그 거리를 달려오는 건 좀 빡셌던 것 같다.
심지어 중간중간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계속 생겨서 돌아서 온 거리까지 생각하면… 망할 놈의 손자 놈!!
찾으면 그 머리털을 다 뽑아버려야지!
실제로 함께 온 릴라이도 보기 드문 흐트러진 제복으로 자리에 착석하는 중이었다.
릴라이를 알아본 후배들이 놀라고, 먼저 온 고엘이 땀 냄새에 질색했다.
“공작가 사람이 품위 없이 이게 뭐냐? 평민도 아니고.”
“그… 죄송합니다. 지각할까 봐 신수를 버리고 맨몸으로 뛰어오다 보니…….”
“미친놈! 그 거리를 뛰어왔다고?!”
놀란 고엘은 급히 물을 찾아 내밀었지만, 그 와중에도 릴라이는 좌절하고 있었다. 지금 힘들고 자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작,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혹시나 해서 연회장에 들어오면서 젖먹이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못 봤다고 하고.
“형님, 아이작을 못 보셨습니까?”
“그걸 왜 여기서 찾아? 네가 에슈아에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릴라이는 얼굴을 짚었다.
아이자아악!
‘여기에 온 게 아닌가?!’
“그런데 너야말로 슈리를 못 봤느냐?”
“슈리요??”
“순번상 앞인데, 얘가 어디에 갔지?”
한편, 자리에 착석한 청의 가주는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읽은 듯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군.”
그러자 옆자리에 있는 적의 가주가 웃었다.
“그야 올해는 말도 안 되는 최연소 사제품 수여자가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아, 슈리?”
“풉.”
적의 가주가 웃자 청의 가주는 혐오스러운 쓰레기 보듯 그를 노려보았다.
“왜 처웃어?”
“아닙니다. 직접 보시죠.”
“?”
그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교황 성하께서 드십니다.”
“!”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백을 걸친 사내가 들어왔다. 얼핏 청의 가주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바로 뒤따르는 것이 교황의 손자인 키나 베리트. 또 그 뒤로 수많은 사제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그야말로 왕좌의 행진.
신성제국의 또 다른 우두머리가 들어서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추기경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한쪽 무릎과 고개를 숙였다.
“영광스러운 신의 축복이 헬라와 함께하신다.”
그 말과 함께 귀빈들이 자리에 앉았다.
“사제품 수여를 시작하겠습니다. 호명한 자는 앞으로.”
안내의 말과 함께 학생들이 움직였다.
청의 가주는 이제야 좀 숨을 돌릴 수 있겠다는 듯, 물 잔을 들어 물을 삼켰다.
“아이작 에슈아.”
낯익은 이름에 물을 삼키는 청의 가주는 눈살부터 찌푸렸다.
아니, 교황도 있는데 일 처리가 왜 이따위야? 참석도 안 한 사람 이름은 빼야 할 것 아냐.
‘젠장,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빨리 집에 돌아가서 그 애가 사고를 치기 전에 찾아내야…….
“아이작 에슈아, 자리에 없나?”
없다니까, 새끼야?
청의 가주는 빨리 넘기라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달랐다. 이미 이곳에 온 것을 확인했다는 얼굴들이다.
“슈리가 그 젖먹이 데리고 화장실 간 거 봤어.”
“아, 그럼 지금 거기에 숨어 있는 거야?”
그때 문을 살짝 열고 슈리가 연회장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왔다.
슈리의 품에 젖먹이의 옷이 들려 있어서 그를 보는 아이들은 히죽 웃었고-
“결국 그 헐렁한 사제 옷 입혔나 봐.”
청의 가주와 에슈아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두 눈을 의심했다.
‘…저, 젖먹이 옷?’
뭐지?
쟤가 저걸 왜 들고 있지?!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에슈아 일가가 벌떡 일어났다.
‘설마!’
반면 슈리의 동기들은 옆에 온 슈리를 보며 풉 웃었다.
“동생은 어디에 버리고 온 거냐?”
“…닥쳐라.”
안 버렸거든?
시발, 이젠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리고 오거든? 미쳤네, 정말.
슈리는 힐끗 문 쪽을 보았다.
“아이작 에슈아.”
“네.”
들려온 대답에 설마 했던 청의 가주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잠깐, 지금 진짜 대답했어? 대답한 거야?
걔 진짜 여기에 있는 거야?!
곧 문이 열리고 백금발이 보이자 객빈들도, 학생들도 기대하듯 보았다. 특히 학생들은 놀려줄 준비로 가득했다.
끼익-.
그래. 그렇지.
그렇게 문을 열고, 아장아장 들어…….
‘응?’
…왜 아장아장이 아니지?
아니, 잠깐.
“아이작 에슈아, 여기 왔습니다.”
저거 누구야?!
학생들은 갑자기 나타난 소년 모습에 기겁하듯 입을 벌렸다.
몸에 딱 맞춰 재단한 듯한 흰색과 회색이 섞인 무소속 사제 제복.
나타난 건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젖먹이였던 아이라고는 상상도 안 될 정도로 자랐다.
하지만 젖먹이일 때부터 눈에 띄던 특징적 이목구비나 머리색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 그대로, 시간만 십수 년 돌린 듯한 모습…은 뭐?!
“쟤 누구야?! 설마 그 젖먹이가 저리 큰 거야?”
“아이작?!”
역사상 가장 칭송받는 시조의 머리색.
제국에 둘도 없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고, 아직 앳되긴 하지만 쭉쭉 뻗은 팔과 다리가 몇 년 뒤의 미래를 기대하게 할 법하다.
그가 등장하고 당당하게 걸어오는 것만으로 연회장은 다른 의미로 술렁거렸다.
고엘은 경악했고, 벌떡 일어난 릴라이는 눈이 휘둥그레져 있다.
청의 가주는 들고 있던 물 잔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들고 있다.
하다못해 교황가 사람들도 눈을 의심하듯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모습이 왜.’
분명 오늘까지도 불길한 젖먹이의 모습이었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베리트 추기경도, 키나 베리트도 드물게 당황한 듯 그를 보고 있었다.
객빈들도 술렁거렸다.
“에슈아의 막내는 해골왕한테 저주를 받아서 못 자란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10년 동안 모습을 감춘 거라고…….”
“무슨, 제대로 자라 있는데?”
아이작을 조롱할 생각이었던 나이저 세페트와 학생들은 되레 멘붕이 온 듯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저주에 걸린 놈이 어떻게……!’
설마 그 해골왕의 저주를 푼 거야?!
그리고 모두가 술렁거릴 때, 교황의 시선이 아이작에게 향했다.
아이작은 교황을 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