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내가 뭘 들은 거지? (3)
음.
내가 지금 귀가 먹었나?
방금 교황가의 양자가 되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이작은 이보다 더 끔찍한 소리가 있을까 싶은 얼굴로 웃었다.
“되송합니다…. 제가 몸이 자란 지 얼마 안 대서 귀가 안 좋은지 즐믓 들은 것 같은대요…….”
“베리트가의 양자가 되라 했다.”
“…그렇죠? 제가 버러지 같은 교황가의 양자가 되라고 들은 것 같아서요…….”
“제대로 들었다.”
시벌. 진짜였냐……?
아이작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혼란…보다는 빡친다.
그러니까 이건 그런 느낌이다.
지금까지 월급도 밀리고, 24시간 일을 시키던 악질 회사가 퇴사 후에 ‘자네가 없으니 안될 것 같다’며 연봉 제시를 해오는데, 그 연봉이라는 것에 꼴랑 만 원 얹어주겠다는 느낌.
그러니까 한마디로 기분이 더럽다는 의미다.
‘뭐지? 능욕인가?’
이거 무슨 청을 견제하기 위해 새롭게 개발한 이간질 수법이야?
하지만 정작 베리트 추기경은 진심인 것 같았다.
“어떤 수작도 아니다. 진심으로 에슈아를 나와 우리 베리트 가문의 양자로 들어오라고 하는 거다.”
아이작의 표정은 더더욱 이상해졌다.
‘니들이 왜?’
청과 금.
에슈아와 베리트는 서로가 있는 곳을 향해 침 뱉는 것조차 수분이 아깝다며 안 뱉을 정도 아니었나?
원수지간 아니었어?
데려가서 인질로 삼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거라면 유학 정도면 충분하지.
‘굳이 에슈아에 싸움을 걸고 주변의 시선까지 곱지 못할 짓을 한다고?’
가볍게 말한 건 아니란 의미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얘들이 왜?
‘짐작가는 구석이라고는 서품식 때 일 정도인데.’
반려신 뽑기 결과는… 하급신이라고 했고.
‘그럼 내 짝퉁 새끼가 성자라고 불러서?’
아니다. 마족을 벌레 보듯 하는 이 철면피들이 그딴 말을 신경 쓸 놈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교황 손자 놈이 말했나? 내가 교황의 기술을 쓸 수 있다고?’
여러 가설이 떠올랐지만, 아이작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아니, 의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래를 들고 왔으면 내용을 까야죠. 양자가 되면 저한테 뭐가 이득이죠?”
중요한 건 대가지.
그게 베리트 추기경한테는 요사스러운 모양이었다.
‘저 나이에 ‘좋다, 싫다, 왜요’가 아니라, 거래 이야기를 하는 놈은 처음 봤군.’
교황가에서 받아주겠다고 하면 오히려 부모가 나서서 양자로 보내려는 놈들이 수두룩했거늘. 5대 공작가라고 자존심은.
베리트 추기경은 부서진 문짝을 성법으로 되돌리며 말했다.
“청이 지원할 수 없는 걸 다 해줄 수 있다. 교황가는 사실상 신성제국의 모든 걸 취급하고 있으니. 청으로는 부족한 걸 많이 느낄 텐데.”
아이작의 입에서 가소롭다는 듯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야? 교황가, 고작 이 정도야?
쩨쩨하다.
“에슈아에서도 부족한 건 없는데요.”
“에슈아가 널 집에 가두려고 한다고 들었다.”
시벌, 변태 새끼야? 남의 가정사는 왜 훔쳐 듣는데?
“뭐, 확실히 그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면 청에서 지내기 힘들겠지.”
지금 성격 지랄 맞다고 돌려 까는 거지?
“청은 본인의 마음을 죽여야 하는 억압과 인내의 신앙이지. 거기에 있으면 제약당하는 일이 많을 거다. 지금만 해도 한참 뛰어놀아야 할 어린애를 그런 시골 수도원에 가두려고 하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느냐.”
그건 맞지.
에슈아 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못돼 처먹었지.
“반면 이쪽은 네가 하는 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도록 하지. 그뿐이 아니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뭐든 지원해주마.”
그러나 아이작은 실소를 흘렸다.
이건 무슨 ‘몸만 오면 어떤 장난감이든 가지고 놀게 해주마.’라고 지껄이는 것도 아니고.
곧 아이작의 눈매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최소한 베리트의 가주로 밀어주겠다는 조건 아니면 좀 힘들 것 같은데.”
“!”
심지어 말까지 짧아졌다.
베리트 추기경은 순간 제 귀를 의심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아이작은 삐딱하게 허리를 짚었다.
‘지원은 무슨, 개뿔 같은 지원?’
애초에 가주가 되어버리면 그깟 지원 따위 없어도 모든 게 내 맘대로거든?
그리고 지금 에슈아에서 가주 자리 먹을 수 있는 건 나뿐이거든? 할아버지가 날 얼마나 예뻐하는 줄 아냐?
비록 집에 가둬두려 하고, 해골왕의 마력을 빼낸답시고 성전을 읽게 하고, 서품식에서는 손자 놈도 해골왕이랑 같이 날려버리려고 하고. 툭하면 해골왕 앞에서 해골왕 쌍욕을 날리긴 하지만, 아무튼 예뻐하거든?
‘아마도……?’
하지만 아이작의 반말에 베리트 추기경은 불쾌해진 듯, 눈빛이 바뀌었다.
“성자의 자리에 욕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는 건 교황 자리에 욕심이 있단 거겠지.”
“!”
베리트 추기경은 너 따위가 그 자리에 올라올 수 있을 것 같냐는 듯 눈을 번득였다.
“말해두지만, 금이 아니면 교황은 될 수 없다.”
“성자를 교황 자리에 올리라는 신의 계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계시는 계시일 뿐이다. 계시를 해석하는 건 종들의 몫이고. 수천 년의 관습을 뒤집는 걸 사제들이 기꺼워할 것 같으냐.”
띠꺼운 건 사제들이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하지만 뭐, 이해는 한다.
기득권은 관습이 크게 바뀌는 걸 싫어한다.
“교황은 5대 신앙을 모두 통솔해야만 하는 우두머리지. 하지만 청인 네가 교황이 된다 한들 다른 신앙이 네게 충성을 맹세할 것 같으냐?”
이놈은 성자 선발전 자체가 의미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교황의 좌를 노린다면 금으로 이적하는 게 미래에 도움이 될 텐데?”
아이작은 싸늘하게 웃었다.
이 건방진 놈이 사람을 우습게 보네.
“허, 제가 아무리 그래도 청의 사람입니다. 제가 그딴 걸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면……”
“네 이름으로 된 부지 계약서와 영지, 금을 가득 채운 금고, 네 이름으로 된 금의 사병, 시골이 아닌 수도에 너 혼자 오롯이 쓸 수 있는 저택, 필요하다면 곳곳에 별장, 그 외 직계 자격의 권리도 얹어주마.”
“…생각해볼 수도 있고 말고요.”
시벌 놈들, 치사하게 돈이랑 돈으로 밀어붙이냐?
돈에 약한 아이작은 눈을 부릅떴다. 베리트 추기경은 반가운 듯 곧장 종이를 집었다.
“좋은 거래가 성사되어 기쁘구나. 그렇다면 이쪽에서 바로 소속을 밟아주마. 에슈아에는 아직 말하지 말고.”
“눼에. 저는 말 안 하겠죠.”
아이작의 미묘한 웃음에 베리트 추기경이 움찔했다. 동시에 뭔가 깨달은 추기경이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부술 듯 열었다.
쾅!
“으악!”
문밖에서 엿듣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슈리였다.
“…아, 아!”
엉덩방아를 찧은 슈리는 화들짝 놀랐다. 베리트 추기경과 눈이 마주친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유. 낌슈리 지리겠다, 지리겠어.’
하지만 뭐, 이해한다.
베리트 추기경이 좀 피 빨아먹는 흡혈귀처럼 생겼냐.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겨서 학생들은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던데.
“슈리.”
“아악!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슈리는 부리나케 일어나 허겁지겁 도망갔다.
그래, 그래. 그렇게 잘 도망가야 기운을 강하게 뿜어내서 추기경의 주의를 빼앗은 보람이 있지. 내 몸값을 올리는 계획에 동참하느라 수고 많았다.
결국 슈리가 사라지자, 추기경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뭐, 상관없다. 중요한 건 네 의사니, 에슈아에 알려져봤자…….”
“이봐요. 생각은 해본다 했지, 간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뭐?”
베리트 추기경은 눈을 부릅떴지만, 아이작은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황가가 미쳤다고 날 데려가고 싶어 하겠어?’
그도 그럴 게, 아이작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교황가가 얼마나 마를 혐오하고, 순수하지 못한 것을 집요하리만치 배척하는지.
그 집착과 오만함으로 교황가는 과거 아이작이 소중하게 생각한 걸 벌레처럼 죽였다.
-널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도 버릴 수 있단다.
-이삭, 너하고 나라면 이 굴레를 끊어버릴 수 있을 거야.
한 명은 마족이란 이유로, 또 한 명은 단순히 마족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지들 아군을 죽였다.
그런데 아예 마왕의 마력을 품은 자신을 양자로 들여?
지나가던 개가 처웃겠네!
‘백 프로 내게 이득을 취하고 버리든지, 아니면 말이 교황가지 어딘가에 가둬서 방치하겠지.’
그러다가 최후엔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죽일 것이다.
옛날부터 그런 놈들이었다. 뭐, 과거 선조들이 한 짓이니 새삼 후손에게 연좌제를 적용할 생각은 없지만, 교황가가 예뻐 보이겠는가?
가뜩이나 금의 성법은 마력을 배척하는 성법이라 마력핵을 가진 몸에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는데?
‘오려면 니들이 처기어 와야지. 어디서 확.’
그렇기에 아이작의 눈매가 휘었다.
“죽어도 교황가로는 안 갑니다.”
그 말에 베리트 추기경은 어째서인지 움찔했다.
“죽어도?”
“예, 죽어도.”
추기경은 끝내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실소 후에 아이작은 흠칫 놀랐다. 베리트 추기경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차가운 눈이 아니라, 아이작을 찢어 죽일 듯한 살기 어린 성력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지 어미랑 똑 닮은 얼굴로 똑같은 말을 하는지.”
“……!”
아이작은 움찔 떨었다.
아씨, 지뢰 밟았나.
아니, 그러니까 얼굴 본 적 없는 아버지 놈아. 왜 남의 약혼녀를 빼앗아와요, 빼앗아오긴.
자식 놈이 곤란해지잖아! 시발!
“의외군. 하는 짓을 보면 에슈아에 그만한 정이 없는 줄 알았는데.”
니 새끼들 보다는 애정 많아. 빌어먹을 배타주의자들아.
“죄송하지만 금보다 청이 깨끗하거든요.”
호구들이라 좋아요.
그러나 베리트 추기경은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엔 약간의 자비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건방 떨지 마라. 지금 당장 내 말 한마디면 너는 즉시 제명당해 평생 사제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교황은커녕 성자조차 못 된다는 거지. 아니, 교황의 권한으로 영원히 신성제국을 밟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걸 알고서 지금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냐?”
이건 협박이었다. 자신들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아예 올라갈 수단 자체를 없애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신성제국에서 영구 제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재산은 압류당하고, 그 어떤 시설도 이용할 수 없으며, 최후엔 신성제국에서 추방당한다.
제아무리 잘난 귀족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연륜 있는 주교들조차 제발 그것만은 내리지 말아달라며 울부짖었다. 하물며 어린 아이라면 얼마나 두려울까.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는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럼 사제도 교황도 필요 없는 나라를 만들면 그만이겠네.”
“……!”
베리트 추기경은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들은 거냐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협박에 떨기는커녕, 도리어 눈빛으로 추기경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애초에 한 나라에 머리가 둘씩이나 있는 게 이상했지. 어차피 내 나라가 될 건데, 그건 기분 더럽잖아?”
“……!”
베리트 추기경은 아이작이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눈치챘다. 황실을 밀어버리겠다는 말은 아닐 테니, 교황청을 날려버리겠다는 말이겠지.
그래서 바로 위험을 감지한 추기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 정도의 용기는 있어야 해골왕도 잡을 수 있겠죠?”
“!”
아이작은 언제 도발했냐는 듯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이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게 각하께도 좋지 않겠습니까?”
이 자식이?
“처음엔 관심도 없었는데. 그래도 덕분에 아주 조금은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네요.”
무엇에 관심이 생겼냐고 되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서품식이죠?”
“!”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교황가가 사람 눈 피해가면서, 심지어 원수인 집안의 직계를 양자로 들이고자 한 건지. 이쯤 되면 제가 뭘 가지고 있는 건지 오히려 꼭 알아내야겠네요.”
“……!”
아이작은 본인이 교황가조차 달려들 유리한 뭔가를 가지게 된 걸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검의 손잡이는 교황가가 아니라 본인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도.
“제국 사람들도 아주 궁금해할 겁니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되면 제가 교황가에게 ‘뭔가’를 할 수 있겠군요.”
뭔가를 할 수도 있어? 이 새끼가… 설마 지금 교황가를 상대로 협박을 하는 건가?
“협박은 각하께서 먼저 하신 거겠죠.”
이놈은 독심술이라도 익힌 건가.
추기경은 기가 찼다.
성녀 가문의 아이라 그래도 작은 호랑이 새끼쯤은 될 줄 알았는데, 호랑이는 무슨. 이건 거의 마물 놈이 아닌가.
하지만 아이작은 문을 열면서 멈춰 섰다.
“아, 그리고 깜빡했는데.”
“?”
“입막음 비용이랑 협박으로 인한 정신적 보상, 금 열 궤짝으로 봐드릴게요.”
“허.”
이 미친놈이.
교황가를 능욕한 것도 모자라서, 뭐? 금 열 궤짝?
“네놈이 지금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
“아……”
뭔가 눈치챈 아이작이 대단히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3일 내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