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내가 뭘 들은 거지? (4)
“뭐? <화합>을 통과했다고? 아이작이? 걔가 왜?”
신성제국의 수도.
황궁과 멀지 않은 도심지엔 에슈아의 별저가 있었다.
수도에 머물 때 사용하는 저택으로, 보통은 교황청과 황실에서 일하는 에슈아들이 쓰는 곳이었다.
가주도 종종 머물긴 하나, 국정 시즌이나 큰 행사 때가 아니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청’ 자체가 인격 수양을 중시하는 신앙인지라, 세속과 가까운 수도를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품식이 끝난 만큼 가주 역시 영지로 돌아가야 하건만, 그는 여전히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이유는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허어, 이상하군. <화합>에서 반드시 탈락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 그렇게 아이작한테 탈락하라고 고사를 안 지내셔도…….”
릴라이는 가주의 방을 장식한 성물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평소엔 보지도 못할 최고급 성물들이 즐비한 게, 성직자로서는 참 눈이 호사스러운 광경이긴 하지만…….
“떨어져라. 떨어져라. 손자 놈아, 떨어져라.”
광경이 좀 이상하다.
주변에서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릴라이…. 우리 청의 신앙이 언제부터 저주 신앙으로 바뀐 거냐?”
“하, 하하.”
릴라이는 둘째 형님의 말에 땀을 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 그렇게 볼 수밖에 없긴 하지.
본래 영지로 돌아가야 할 청의 가주가 대뜸 수도 저택에 눌러앉은 것도 신기한데, 귀한 성물을 저리 걸어놓고 매일같이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원.
물론 모르는 사람은 호사스러운 축복이라며 부러워하겠지만…….
‘문제는 저게 손자의 탈락을 비는 기도란 거지.’
그리고 어딜 봐도 사이비…에 가까워 보인다.
그쯤 되자 수도 저택의 관리자이자 에슈아의 재무 관리자인 에슈아의 차남. 벤야민 에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릴라이. 내 아직 조카를 본 적은 없다만, 그 아이가 그 정도로 문제아냐?”
릴라이는 기겁했다.
“문제아라니요! 아이작이 얼마나 착하고 순하고 예의 바르고, 똑똑하고 예쁜 아이인데요!”
“…그럼 아버지의 저 행동은 뭔데?”
“그… 손자가 너무! 걱정되시니까 저러시는 겁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아이작은 아직 10살이니까요! 금과 적의 테스트를 치르기엔 많이 위험하죠. 너무 아끼시니까 집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겁니다.”
…정말로?
벤야민은 안경을 치켜올렸다.
아니 뭐, 가뜩이나 후계 문제로 말이 많은 에슈아였다.
‘차남인 나도 가문을 이을 수 없으니, 후계의 싹을 가진 아이가 나타난 건 좋은 현상이다만…….’
“이상하군. 이 축복에 걸리면 의욕 과잉으로 걷다가도 넘어져서 3일은 기절하게 될 텐데.”
…아버지. 그쯤이면 이미 저주 아닙니까?
“왜 그놈한테는 축복이 안 걸리지?”
지금으로서는 안 걸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굉장히 아끼시는 아이란 건 알겠어요.”
“!”
청량한 목소리에 릴라이는 깜짝 놀랐다.
그의 옆에 차남의 딸이 서 있었다.
“레아, 헬라에 돌아왔구나!”
“예. 가주님과 막내 숙부님을 뵙습니다.”
릴라이에게 인사를 하는 건 18살쯤 될까. 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은발의 가인이었다.
그리고 사내만 태어나던 저주받은 에슈아에서 처음으로 그 굴레를 끊은 성녀 후보. 역대 성녀 후보 중에서도 천재라 불리는 기사였다.
그런 그녀는 아이작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청의 가주’는 ‘성녀’를 만들고 그 정책을 정하는 존재.
만약 차기 가주가 되는 게 레아 본인이 아니라 아이작이라면, 아이작은 성녀들의 목숨 줄을 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여러 문제가 있는 듯하지만.
“뭐지? 손자 놈이 어떻게 <화합>을 통과한 거지? 화합을 할 수 있는 놈이 아닌데? 설마 진짜 애가 뒤바뀌었나?”
“아버지…….”
아들들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가주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사실 가주가 아이작을 끌고 가려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일단 교황이 아이작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거기에 귀찮은 교황의 손자 놈까지 아이작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재앙이군.’
뭐, 애초에 아이작은 지나치게 빨리 사제가 된 것이었다. 1, 2년쯤 꿇어도 상관없다.
‘교황이 주기로 한 칭호는 해골왕의 습격으로 연기되었지만, 어쨌든 받을 수 있는 거고.’
아무튼 원래는 아이작의 목숨만을 지키기 위해 데려갈 생각이었지만…….
가주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책상 위 서신을 보았다.
“아버지, 그 서신은 누구한테 온 겁니까? 에슈아에서는 쓰지 않는 참 호사스러운 봉투입니다만.”
에슈아의 두뇌답게 날카로운 차남의 질문이다.
물론 가주에게 보내는 봉투에 파란색을 쓸 수 있는 건 에슈아 사람밖에 없었다.
즉 에슈아 직계가 보냈다는 걸 모를 리 없었지만, 그걸 알기에 차남은 일부러 묻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에슈아가 건방지게 독을 갈아 넣은 봉투를.”
“넷째다.”
“……!”
그 답에 벤야민도, 릴라이도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슈아의 4남.’
그들의 이복형제였고 고엘의 동복형이자, 교황 쪽의 핏줄.
그리고 아이작의 넷째 숙부. 무엇보다 에슈아에서 가장 가주 자리를 탐내는 놈이 아닌가.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 슬슬 후계를 생각해야지.”
가주의 말에 두 아들의 눈빛이 번득였다.
이 시벌 놈이, 무슨 망발 편지를 보냈길래.
“아닙니다, 아버지. 아직 현역이신걸요.”
아이작 탈락 기원 기도를 하던 가주는 책상을 톡톡 쳤다.
멜리사는 가문의 일은 네 일이라고 했지만, 역시 가주의 자리는 아무한테나 줄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면 가주의 자리가 넘어갈 사람이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그래서 가주 자리는 언제 줄 겁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내려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 서신을 보낸 넷째 놈도 그중 하나.
‘보나 마나 아이작 때문에 이딴 걸 보낸 거겠지.’
지금까지야 젖먹이 상태니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서품식에서 자랐단 소문이 퍼졌다.
하물며 서품식에서 아이작이 오죽 눈에 띄었는가? 당연히 불안하겠지.
그것도 가문에서 제일 어린 코흘리개 조카 놈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기긴 싫겠지.
‘하지만 이놈만은 안 된다.’
그러니까아, 아이작이 인성 교육이 돼야 하는 것인데!!
북북!
“아버지?!”
청의 가주는 성질이 난 듯 서신을 찢었다.
“아이작이 안 되면 릴라이, 네놈한테 모든 걸 던져놓고 튈 것이니 알아서 해라.”
릴라이는 콜록콜록 헛기침을 했다.
아니 씨, 난데없이 이런 봉변이?
“그래도, <화합>을 통과했다니 손자 놈도 희망이 있는 듯하군.”
이 정도면 영지에 가둬놓고 인성을 뜯어고치지 않아도 될 듯한…….
[인격 개선은, 옘병아!]
“!”
검은 뱁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구… 샬라크 님!”
아이작의 왕급 성령이었다. 슈리 혼자로는 아이작 감시가 힘들 것 같아, 추가로 붙여놓은 것이었다.
[너 걔가 백의 신앙에서 어떤 사고를 쳤는지 모르지?]
“사고? 사람을 패지만 않으면 됐어.”
[주교가 실신했다, 자식아!]
가주는 침묵했다.
“…거기는 너무 꽃밭이라 가끔 실신해도 돼.”
아버지???!
벤야민은 제 귀를 의심했다.
‘동료를 실신시켜도 되는 겁니까?’
하물며 백의 신앙이면 5대 신앙 중 제일 온화해 보여도 추기경만큼은 장난 아닌데? 거기, 꽃이랑 혀로 사람 죽이는 곳인데?
하지만 성령은 아이작을 감싸는 가주를 못마땅하게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인성 불손 놈을 가주 후보로 밀려는 걸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잔고까지 털어 구하기 힘든 영단이나 던져주고 가고.’
[너, 그 손자 놈이 어떻게 <화합>을 통과했는지 모르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또 딸랑이로 두들겨 팼나 보군. 그래, 그 정도면 괜찮아.”
벤야민의 눈이 떨렸다.
아버지. 방금 사람을 패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릴라이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그 정도면 몸풀기죠.”
…패는 게 몸풀기?
“그래. 그 정도야 귀여운 수준…….”
귀… 뭐? 귀여운??
그러나 성령은 개소리 말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독을 먹여서 애들을 협박했다!]
“?!”
[해독제 만들어 주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가주는 뒷목을 잡았다.
“아버지!”
“…아냐. 독으로 협박한 거면 아직 괜찮다.”
“예…. 괜찮죠.”
“…….”
…저기요 청(靑), 진짜 괜찮은 겁니까??
지금 신앙이 파괴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벤야민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하지만 가주는 미간을 짚었다.
“그놈이 교황가와 손을 잡겠단 말만 안 하면 다 괜찮다.”
릴라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절대 말이 안 되죠. 교황가도 아이작도 서로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할아버지! 큰일 났어요!!”
저택 안으로 슈리가 뛰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땀범벅의 슈리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슈리, 금의 펜타곤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느냐? 외출도 힘들 텐데 도대체 무슨……!”
하지만 가주는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또 아이작이냐? 말해봐라.”
“아이작이 베리트 추기경이랑 만났는데요!”
젠장, 이번엔 또 추기경이야??
“왜, 뭔데? 금이랑 싸웠느냐? 딸랑이로 얼굴을 갈겼어? 아니면 독? 할 거면 뒤처리하기 쉽게 땅에 묻어버리지…….”
“그게 아니라! 베리트 추기경이 아이작한테 자기 양자가 되라 했어요!”
순간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양자?
“양자?!!”
이 새끼들이 미쳐 돌았나?!
가주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아이작은 뭐라고 답했지?”
“에이, 아버지. 아이작도 에슈아 사람입니다. 에슈아 사람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절을 할…….”
“좋다고 했어요.”
릴라이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뭐? 좋다고 했어?! 아이작이?! 왜!”
“그게 하필이면 아이작이 제일 좋아하는 돈으로 꼬셔서…….”
에슈아 사람들은 이마를 짚었다.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래, 돈이면 넘어갈 만하지…….”
“넘어갈 만하네요…….”
“넘어갈 만한 거냐?!”
벤야민은 당황스러워했다.
조카 이 새끼,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러나 고엘은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니냐며 한술 더 떴다.
“그쪽으로 가면 아이작이 사고를 쳐도 교황가의 책임이고. 이쪽도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고엘 형님!”
“오히려 에슈아로서는 아이작이 그쪽으로 가서 득을 취해오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가주 자리에 앉히고 싶으신 거면, 그쪽에 보내고 나중에 돌아오게 해도 되지 않습니까. 아버지도 그쪽이 속이 편하실 텐데요.”
하지만 가주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이 개똥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아, 아버지?”
낮게 깔린 음성이 심상치 않다.
“기어이 전쟁을 해보자는 건가.”
그게 아무리 근본 없는 거지 깽깽이 같은 놈이라도 그렇지. 할아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핏줄을 데려가려고 해?
가주의 눈이 번득였다.
* * *
“와, 저게 뭐야?”
청의 생활관 앞이 소란스러웠다.
“뭐야, 이 번쩍이는 궤짝은?”
금 열 궤짝.
사제들은 이만한 금은 처음 본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물론 생활관 앞에는 청의 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팀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속닥이고 있었다.
“저거, 금에서 보낸 거지?”
“어, 저 문장, 베리트가의 문양이잖아.”
“금의 신앙하고 친하다는 게 진짜였나……?”
사제들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이작이 ‘금환약’으로 팀원들을 포섭했다는 소문이 은밀히 퍼진 상황이었다.
세부적인 내용이야 장본인들이 쪽팔린 듯 쉬쉬해서 알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소문은 부풀려지고 있었다.
-아이작 에슈아가 교황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아이작의 파벌에 들어가면 우리도 금환약을 먹을 수 있다!
‘…진짜 옮겨? 청의 신앙으로?’
‘시발, 금환약이면 이야기가 좀 많이 달라지는데?’
하지만 정작 아이작은 황당하다는 듯 생활관 앞에 온 물건들을 보았다.
뭐, 금 궤짝이야 예상했던 범주였다. 입막음 비용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코딱지만 한 보석함에 금을 담아오길래 눈을 부릅뜨고 돌려보냈었다.
-시벌 놈들아, 뒤질래?! 내가 고작 이거 달라고 3일이나 준 줄 알아?!
-!!
그랬더니 돌아온 게 이 산더미 같은 금덩어리다.
물론 아이작은 단순히 삥만 뜯으려고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양자 이야기가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일부러 테스트를 해본 거니까.
그러니 이건 상관없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그쪽이 아니라…….
“그래서, 이 물건은 도대체 뭔데?”
아이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구를 틀어막은 물건을 가리켰다.
마치 교황가의 물건에 대적하기라도 하듯 놓여 있는 건 반짝반짝 보석들 그리고 초콜릿, 질 좋은 비단, 비싼 가죽에 사치품, 비싼 먹거리…….
슈리는 땀을 삐질 흘렸다.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이거 너무 많이 보냈어요.
교황청 사제들까지 큰 충격을 받아 크게 술렁거릴 만했다.
“그 청의 가주께서 저걸 보내셨다고……?!!”
“그 청빈과 금욕의 신앙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날 징존가?!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질 징조야??
그러나 아이작은 보물과 함께 온 서신을 보았다. 서신엔 의미 모를 진지한 굵은 글씨가.
-넌 우리 집 아이다.
…뭐지?
청의 새로운 저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