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선물 (2)
교황청 면회실.
아이작과 함께 면회실에 들어온 슈리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낑낑거리며 자신들에게 차를 내오는 몰렉 때문이었다.
“젠장, 이 내가… 이 몸이 왜 시녀 따위가 하는 짓을.”
인망 높은 백작가의 자손이 시녀 일을 하는 건 본인에게도 꽤 수치스러울 것이었다. 실제로 울기 직전인 얼굴이 참으로 볼만했다.
‘그러니까 수작 부릴 상대를 잘 골랐어야지.’
하필 수를 써도 아이작에게 쓸 생각을 해.
자신도 10년을 못 버티고 아카데미로 도망쳐온 건데.
‘뭐, 그래도 아이작이 본성까지 궂은 놈은 아니다. 적당히 울리고 끝낼…….’
“야. 넌 귀족가 장남이 되어가지고 차 하나 제대로 못 타와? 온도가 너무 낮짜나! 다시 타와!”
“뭐? 벌써 다섯 번째인데?!”
“그래! 다섯 번! 다섯 번이나 가져오면서 차 하나 못 타는 니놈은 쁑신이냐?”
“이씨!”
…아무래도 저놈은 걸려도 제대로 걸렸구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한테 저런 적은 없었는데.
몰렉은 제발 아이작에게 한 소리 해달라는 듯 레아를 애타게 바라보았지만, 레아는 본 척도 안 했다.
성직자로서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할 만할 법한데도, 그녀는 아이작을 빤히 보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사실 레아는 모든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몰렉이 <화합>에서 슈리의 뒤통수를 치려던 장본인이란 사실을.
‘그리고 이 막내가 같은 팀 아이들을 독으로 협박했다고.’
뭐, 사실 그 때문에 아버지인 벤야민이 자신을 보낸 것이지만 말이다.
-결과는 좋아서 다행이나, 아무래도 아버지랑 릴라이의 행동도 그렇고. 청의 상황이 좀 걱정이 되는구나.
확실히 사이비 저주…를 내리는 할아버지와, ‘폭력은 애교 수준’이라는 릴라이 숙부의 발언은 제정신이 아니다.
특히 청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릴라이나, 우두머리인 가주가 그런다니.
청의 사람으로서 경기를, 아니 그냥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지금껏 이런 일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게 새파랗게 어린 막내다?
-그런 애가 가주를 논하다니 말도 안 되지. 아직 어리다 하니 네가 가서 단단히 교육 좀 시켜주고 오렴.
‘교육이라.’
레아는 온화하나 차가운 눈으로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 이해는 했다.
‘에슈아는 확실히 저주받았지.’
특히 에슈아에서 태어나는 남아들은 모 아니면 도였다.
재능이 아예 없든가, 천재로 태어나든가.
하지만 천재성을 타고나면 반드시 결함이 있었다. 시한부이거나 인성에 문제가 터지거나.
특히 인성.
넷째 숙부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형제도 인성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누님은 가문 일에 신경 쓰지 마시죠?
-신경?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하는 짓이 여아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해와서 성녀를 만들려는 거야?
-그럼 안 됩니까? 에슈아의 본분을 지켜야죠.
그리고 아이작.
이 아이도 들려오는 소문을 보면 ‘재능은 있으나 인성이 파탄’ 난 쪽이겠지.
‘그래도 아직은 애니까. 할아버지가 인성교육을 시도해보려는 거고.’
뭐, 사실 아이작은 인성보다 더 심각한 신앙심, 이단심문관에게 걸리면 바로 끌려갈 정도의 신앙심이 문제지만 그들이 알 리는 없다.
레아는 아이작을 보며 생긋 웃었다.
“아이작, 너는 가주가 되고 싶니?”
“눼. 그런데요.”
“가주가 되면 뭘 할 건데?”
그 질문에 줄곧 썩은 표정이던 아이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이놈이 처음 보는 사촌에, 성녀 후보라고 해서 조금은 얌전하게 있어 줬더니. 다짜고짜 묻는 게 사상검증인가?
팔짱을 낀 아이작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하긴요. 성녀들부터 없애버릴 건데요.”
“야!!!”
슈리는 당황해서 아이작을 보았다.
‘교황의 모가지로도 모자라서 이젠 성녀냐!’
아니, 이 자식이 아무리 철이 없다지만, 성녀 앞에서 이 무슨!
성녀는 에슈아의 상징이었고 에슈아 사람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주들이었다.
하물며 레아는 겉으로 볼 땐 그저 예쁜 여인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내용물은 무려 8계위 성기사!
저 손에 썰려 나간 적이며 장수가 몇인데!
슈리는 레아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레아는 화내는 게 아니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왜?”
“왜긴! 성녀의 존재는 필요 없으니깐!”
아이자앍! 제발 조옴!
슈리는 제발 부탁한다는 듯 아이작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진심이라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시발, 니들이 있으면 내가 뒤진다고!’
슈리는 결국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누님. 어린아이입니다. 아직 배움이 부족한 아이라 그러니 누님께서 조금만 이해를 해주시면…”
그러나 레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면 성녀를 없애고 나면? 뭘 할 건데?”
“돈 많은 빽수(백수).”
슈리는 죽겠다는 듯 얼굴을 짚었다.
정녕 이게 청의 사람이 할 말인가!
아니, 그보다 성녀의 말은 가주 선발에 큰 입김이 된다. 성녀의 말이면 원로회에서도 아이작이 후보에서 내쳐질 수도 있었다.
슈리는 아이작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능력 있는 놈이 가주 후보에서 떨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누님…. 이놈이 해골왕의 마력을 먹어서 정신이 좀 많이 이상합니다. 무시하십시오.”
그러나 레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확실히 정상은 아니네.”
그 청량한 웃음소리에 슈리는 놀란 듯 쳐다보았다. 레아가 소리를 내서 웃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홀로그램 멜리사를 보았다.
“그런 의미로 할머님도 성녀 때려치는 게 어때요? 도움이 전혀 안 대는데.”
“아이자아아앍!!”
그러나 아이작은 도끼눈을 했다.
너만 은퇴하면 나도 편하게 에슈아를 꿀꺽하고 이 나라를 없앨 수 있을 것 같거든?
“해골왕 잡는 건 관두고 은퇴하세요. 해골왕 내가 잡아줄게.”
물론 잡는 건 짝퉁이지만, 어쨌거나 그걸 잡으면 할미 좋고, 손자 좋잖아?
그리고 은퇴하면 성물은 나눔 좀 해주고. 몽땅 경매에 내놓게.
속이 시커멓다 못해 문드러진 아이작이었지만, 슈리도 뜻밖에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맞습니다. 모두 가모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10년 동안 집에도 안 오시고… 이제 돌아오실 만도…….”
그러나 멜리사는 어째서인지 쓰게 웃었다.
[돌아가는 건 안 된단다.]
왜 안 되는데, 시키야. 됐으니까 빨리 유품 좀 내놓으라고!
[이 할머니는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지었거든.]
“예?”
[에슈아가 저주받은 이유는 모두 나 때문이다. 저주를 풀려면 어쩔 수 없이 해골왕을 잡아야해.]
아이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슈리의 표정은 굳었다.
“…지어서는 안 될 죄라니요?”
멜리사는 대답 대신 웃을 뿐이었지만, 사실 레아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레아, 사실 이 할미는 정말 딱 한 번. 해골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단다. 정말 절호의 기회였지. 해골왕을 반드시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죽이지 못했어.
-왜요?
-…글쎄. 하지만 신께서는 그걸 용서하지 않으시는 거겠지.
가모는 자세한 내막은 삼켰지만, 분명 있었겠지. 가모가 해골왕을 죽이지 못했던 이유가.
결국 멜리사는 대답 대신 손짓했다.
그 손짓에 레아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뭐, 오늘 아이작을 보자고 한 건 다름 아닌 이것 때문이었다.]
가모가 준 선물에 슈리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는……!”
아이작조차도 내심 놀랐다. 위스퍼는 식겁해서 소리쳤다.
[성녀의 로자리오가 아닙니까!]
그래, 저건 성녀라는 걸 상징하는 상징패. 세상에 둘도 없는 물품이라 값어치를 매길 수가 없다.
이 자식이 어쩐 일로…….
그러나 가모는 생각이 많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는 금의 펜타곤을 두고 마족의 움직임을 읽었던 것이다.
‘분명 그 마족이었다.’
14년 전, 릴라이가 견습사제였던 시절.
금의 펜타곤에서 역대 최악의 살생 피해를 냈던 마족. 그놈이 견습들의 시험 장소로 오고 있었다.
신성제국에서도 수배를 내렸으나 끝내 잡지 못했던 <사제 사냥꾼>.
막 사제가 된 어린 사제들만 궁지에 몰아넣고 잡아먹던 악질이다. 자신도 피해를 막으려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분명 올해 무슨 일이 생긴다.
그러니 보험이었다.
[아이작은 공격 성법이 약하다 들었다. 그 물건엔 내 힘을 담아뒀으니 <신기>를 쓸 수 있을 거다. 여차하면 날 소환할 수도 있지.]
아니, 너는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고.
[남은 펜타곤은 정화 성법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공격 성법 대신 쓰려무나.]
짜식. 뭐, 그래도 중요할 때 제일 필요한 걸 주긴 줬네. 마법이 있긴 하지만 그건 히든카드니까.
아무튼 성녀들이 쓸모도 없다고 한 건 취소…….
[곧 헬라에 갈 일이 있을 것이다. 가면 꼭 일대일 해골왕 퇴마 교육을 시켜주마.]
역시 필요없얽!! 영원히 오지마!!!
그렇게 홀로그램 멜리사는 사라졌다.
슈리도 꽤 유용한 성법서를 받은 듯, 기쁜 듯이 일어났다.
“야, 면회 시간 다 됐어. 슬슬 가야 할 시간이야.”
아이작도 일어나려는 그때, 뜻밖에도 레아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이작.”
“눼?”
레아는 물끄러미 아이작의 심장 쪽을 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 아이작은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게 레아의 눈은 성녀의 눈.
성녀의 눈은 자고로 마를 꿰뚫어 보는 성안이었다. 심지어 그게 아이작의 심장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너 마력핵 가지고 있지?”
그 말에 아이작의 얼굴이 드물게 굳었다.
쿵.
심장은 크게 철렁거렸다.
마력핵이라니. 설마 자신이 마력핵을 만들었단 사실이 들킨 건가?
위스퍼도 당황한 듯했다.
[서, 설마 들킨 겁니까? 마법을 쓰는 걸?]
지금껏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지만, 성녀는 좀 달랐다.
‘성녀’는 ‘해골왕’만을 죽이기 위해 설계된 완전무결한 병사.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해골왕에 대해 기민한 이들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마력핵도 감별했는지도 모른다. 영혼은 동일 인물인 만큼, 마력의 고유 냄새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신성제국 사제가 몸에 마력핵을 만드는 건 절대 금기 행위. 이를 어길 시 사형에 처해진다.
그런 만큼 아이작의 눈빛이 살벌하게 바뀌었다. 레아가 어떻게 나올 줄은 모르나,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이 자식, 지금 처리해두지 않으면…….’
“왜? 그거 별관에 있던 마력핵 아냐?”
아이작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벼, 별관?
그러나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작의 가슴 주머니를 가리켰다.
“지금도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잖아. 마력핵.”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더듬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먹지 못한 마력핵이 딱 하나 있었지.
‘무슨 마력핵인지, 봉인이 걸려서 나도 먹지 못한 거……’
아니, 시벌. 놀랐네!
안 그래도 아까워서 계속 들고 있던 마력핵이었다. 별관에 있던 마력핵 중에서 가장 강한 물건이었다. 못해도 9계위 이상이었는데.
그리고 사제품을 받으면 해제 성법으로 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체가 뭐길래 뭔 짓을 해도 안 풀려.’
위스퍼조차도 이 물건의 정체를 분석하지 못했고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레아가 이 마력핵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서 내밀었다.
“그 봉인, 이거면 해결 가능할 거야.”
“?!”
당황한 아이작은 미쳤냐는 듯 레아를 보았다.
이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기겁할 만한데, 뭐? 봉인까지 풀게 해준다고?
“네가 과연 그걸 쓸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가문의 비전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건 알겠구나.”
…비전? 뭐 인마??
‘비저저언? 이게?’
그러나 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견습이 끝나거든 내게 오렴. 교육해줄게.”
그말에 슈리는 입을 떡 벌리며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달려왔다.
“지, 지금 레아 누님한테 직접 교육을 받는다고?! 야이씨, 부럽다!”
동시에 청의 생활관에서 레아가 나오자, 호위기사가 그녀를 반겼다. 호위기사는 레아의 목에서 사라진 목걸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가보는 어찌하신 겁니까?”
“막내한테 두고 왔어.”
호위기사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에슈아의 비전을 찾아낼 수 있는 가보인데요. 그래서 가주께서 레아 님께 물려주신 게 아닙니까.”
저 물건이 가진 의미에 대해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다른 직계들이 탐내고 있는 물건입니다!”
“빼앗기면 그게 본인의 실력인 거지.”
“만약 성공하면 저분이 가주가 되는 겁니다!”
레아는 풋 웃었다.
“그렇다고 교황가에 가게 할 순 없잖아.”
“레아 님!”
그녀는 아이작의 말을 떠올렸다.
-성녀를 없앨 거야.
그녀는 어린 동생의 그 답이 몹시 좋았는지, 계속해서 마음으로 음미하고 또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