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적의 펜타곤 (3)
연무장 전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슈리의 얼굴도 얼어붙어 갔다.
말해두지만, 적의 신앙은 이단심문관을 배출하는 곳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여기 깔려 있는 적의 사제들이 전원 이단심문관이라는 이야기다, 시발!! 이단심문관 앞에서 신을 모독한 거라고!
슈리는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넘겼다.
‘진정하자.’
그래, 시발. 이건 꿈이야.
시험을 앞두고 긴장해서 꾸는 꿈이야!
그래, 아이작 이 새끼가 그렇게 형을 북돋아주는 따스한 말을 해줄 리가 없지!
아무리 이놈이 멍청이여도, 추기경에 이단심문관이 있는 곳에서 주신의 얼굴을 박살 내는 미친 짓을 할 리……
“아이작 에슈아가 주신의 석상을 부쉈다!”
…가 있네, 시발!
신성제국에서 가장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네!
결국 슈리는 아이작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
“형! 말로 해, 말로.”
“네놈은 젖먹이 때 버릇 아직도 못 고친 거냐!”
“크흠.”
아이작은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도 신들의 얼굴을 뻥뻥 부숴댔구만. 캬, 역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야지.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암.
그러나 슈리는 기가 찬 듯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새끼는 지금 뭘 스스로 기특해하며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그때는 브믈고읐짜나! 스벌뜨애끼야! (보물고 였잖아! 시벌 새끼야!)”
꼬맹이들만 있던 그때랑 똑같은 줄 알아?!
‘여기에 지금 어떤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러나 아이작은 실수는 인지했지만, 잘못했다고는 생각 안 했다!
왜냐고?
그러게 누가 냄새나는 신계의 기물을 소환하래?!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 죽겠는데, 하물며 형법의 신? 아오, 그 꼰대 놈. 그냥 좀 죽지.
어디 그뿐이야?!
저 시벌 놈이 신앙심이 있는 애들한테만 축복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차별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대로라면 모든 사제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으니 공평한 것 아닙니까?]
‘시벌놈아! 나는 신앙심이 없어서 못 받는다고!’
불공평하지!
[아.]
아무튼 기껏 작전을 짜놓았는데, 적가 놈들이 축복을 받고 대련에서 설치는 꼴을 볼 것 같으냐!
그러나 슈리는 모이는 시선에 흠칫 떨었다.
‘시발! 역시 쟤들 눈빛 바뀌었어!’
적의 사제들이 아이작을 위아래로 훑었다. 속닥이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
다른 사제들의 시선에 릴라이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애가 어리잖습니까. 긴장했나 봅니다.”
…긴장한다고 신의 모가지를 따?!
정말 괜찮은 거냐, 청??
그 와중에 아이작을 위아래로 훑는 키나의 눈빛까지 심상치 않다. 충격을 받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다. 슈리가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키나의 말은 좀 파장이 큰데!’
괜히 작은 교황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그만큼 신앙심이 높기도 했다.
“에슈아.”
젠장! 틀렸…….
“어떻게 주신의 석상을 부순 거냐? 비법이 뭐지?”
시벌, 여기 아이작 같은 미친놈이 또 있네!
덕분에 적의 견습 사제들이 핏대를 세울 만했다.
뭐? 비법?
“야! 너도 신앙심 검사 해봐야 하는 거 아냐? 감히 아이작 에슈아를 감싸?!”
그러나 키나는 잡종들이 어디서 방해하냐는 듯, 그들을 벌레 보듯 보았다.
“그깟 주신이 뭐 어쨌는데?”
“뭐, 뭐?”
“적의 주신 따위. 어차피 금의 신이 아니면 모든 신이 하급신들이나 마찬가지거늘. 하등한 놈들이 끼어들지 마라.”
“……?!”
슈리는 어질어질해졌다.
역시 지들 말고는 배척하는 금답다……!
반면, 적의 추기경의 늘 웃는 눈이 살벌하게 뜨여져 있었다. 그게 이단심문관으로서의 눈이란 걸 슈리가 모를 리 없다.
슈리는 급히 아이작의 머리를 붙잡았다.
“아하하! 이놈, 아이작! 연무장 강도를 테스트해본다더니, 이렇게 하면 어떡해! 다들 놀라셨잖아! 죄송합니다. 우리 집 애가 조심성이 많아서요. 역시 우리 팀 브레인! 자! 사과해!”
슈리는 붙잡은 아이작의 머리를 푹 눌렀다.
“자! 사과!”
“…뙤뚕합니다.”
“한 번 더!”
“…때따니 드릅게 뙤둉합니다.”
정말 죄송한 얼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단심문의 지도자인 적의 추기경의 구미가 당기는 일인 건 확실하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가 심상치 않다.
하물며 상대가 그 청렴하고 고고한 에슈아라니.
“이거 문제아를 털어보는 맛이 있겠…….”
“문제아라면 오히려 주신의 석상이 부서지게 냅둔 적(赤)이 아닌가?”
…이 인간이?
적의 추기경은 금의 추기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금의 추기경은 멈추지 않았다.
“고작 견습의 성법에 주신의 석상이 박살 나게 하다니. 애꿎은 견습이 아니라 적의 수장의 신앙심이나 조사해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지금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적의 추기경이 무언의 미소를 지으며 금의 추기경을 보았지만, 금의 추기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은 변절자를 찾아내는 신앙답게 감시관(監視官)으로서 제국에서 압수수색 일을 하고 있다.
적이 아이작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최악의 경우 아이작이 뽑은 신까지 캐내려 할지 모른다.
금의 입장에서 미쳤다고 끌고 가게 둘 것 같은가?
마주 보는 두 추기경의 눈에서 살의가 튀겼다.
본의 아니게 두 큰 세력에 싸움을 붙인 아이작은 핏대를 세웠다.
‘끄래서 언제까지 인사를 시키고 있을 건뒈.’
아이작은 자신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 슈리를 째려보았다.
그쯤 되자, 연무장에 오도카니 선 심판은 땀만 주르륵 흘렸다. 본래대로라면 아이작이 석상을 부순 시점에서 당장 아이작을 끌고 가야 했다.
그런데 추기경끼리 노려보고 있는 게 심상치가 않다.
평소라면 선을 넘을 일이 없겠지만, 이상하게 아이작 에슈아의 존재 때문에 뭔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자신들이 평소처럼 움직였다간 진짜 신앙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더 무서운 건 이 키나 베리트였다.
‘손에 저거… 8계위 성법 맞지?’
저거저거, 자신들이 아이작을 건드는 순간, 뒤도 안 보고 공격을 해올 것 같다. 나이저도 그걸 눈치챈 듯 무기를 뽑을 기세고.
눈깔들이 돌았다.
이거, 빼도 박도 못하고 신앙 전쟁 확정이다.
심판으로서는 그저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하…. 그냥… 됐으니까 시험 진행해주시면 안 될까요?’
평화를 깨는 이단심문관으로서 이처럼 평화를 바란 적이 또 있을까.
‘아이작 에슈아 하나 때문에 이게 다 뭐람.’
그때였다.
“고작해야 견습의 행동에 이단심문은 너무 과하지. 돌발행동에 대처하지 못한 적의 실수이기도 하니, 지금은 펜타곤을 속행하라.”
적의 추기경의 말에 심판은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시발…. 살았다.
하마터면 키나 베리트에게 살해당할 뻔했네.
하지만 적의 추기경은 굉장히 흥미로운 듯 아이작을 보았다.
‘도대체 아이작 에슈아에게 뭐가 숨겨져 있길래, 천하의 금이 이렇게까지 하실까.’
궁금하니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뭐, 적의 펜타곤에서 합법적으로 빼돌리면 금도 뭐라고 못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명령이다. 아이작 에슈아를 불구로 만들어라.
‘!’
그 신호를 읽은 나이저 세페트가 히죽 웃었다.
예, 아버지. 반드시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심판은 기쁜 듯이 손짓했다.
그와 동시에 적의 의전사제가 상자를 들고 나왔다.
상자에 새겨진 문장을 본 슈리가 침을 삼켰다.
‘피를 상징하는 가시장미. 그리고 사냥과 회개의 창.’
제국과 신을 위해 피를 흘리는 가시장미.
≪헌트 허트 로즈(Hunt hurt rose)≫
적(赤)을 수호하는 적가의 문장이었다.
상자 안에는 로켓(Locket) 목걸이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대장들은 하나씩 가져가 확인하세요.”
목걸이를 가져간 슈리는 깜짝 놀랐다. 얼핏 보면 평범한 로켓 목걸이였지만, 로켓 안에 장미 보석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른 사제들이 똑같은 로켓 목걸이를 가지고 나왔다. 총 29개였다.
하지만.
“생긴 건 똑같지만, 이 로켓 안에는 보석이 들어있지 않죠. 대장은 팀원 전원에게 똑같이 나눠주고, 진짜는 한 명에게만 줍니다.”
한마디로 대장이 직접 진짜 목걸이를 줄 사람을 정하라는 것이었다.
“미리 공지하긴 했지만, 적의 펜타곤의 룰은 간단합니다. 진짜 목걸이를 먼저 빼앗는 쪽이 승리합니다.”
“가짜들 사이에서 진짜를 찾아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내용물을 확인하는 건 자유지만, 보물의 위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슈리는 침을 삼켰다.
‘보석을 가진 사람을 정하는 것조차도 전략이라는 거구나.’
그 예상대로 심판이 눈을 빛냈다.
“진짜 목걸이를 찾는 방법은 세 가지.”
첫째, 대장을 붙잡아 자백을 받아내든가-
둘째, 뛰어난 안목과 추리로 진짜 목걸이를 가진 사제를 찾아내든가-
셋째, 30명을 하나씩 쓰러트리고 목걸이를 모두 회수하든가.
“참고로 대장은 승부에서 졌을 경우 자백을 해야 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백제를 쓸 일이 없는 시험이니까요.”
…저 새끼, 말 안 들으면 자백제를 쓰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심판은 진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괜히 헛짓 말라는 겁니다. 세 가지 모두 좋은 방법이니, 제일 자신 있는 방식으로 하십시오. 자, 그럼. 견습들은 최선을 다해서 적의 성물을 훔쳐 간 범인을 찾아주세요.”
사제들은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적의 신앙.
그런 식의 흐름인가.
적은 사람의 속내를 읽고 변절자를 찾아내는 신앙이다. 즉 전투는 물론, 상대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범인을 찾아내는 훈련을 겸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대장전으로 가면 고문과 자백 훈련까지 할 수 있다.
곧 슈리가 슬쩍 아이작을 보았다.
뭐, 적의 펜타곤에 대해서는 아이작과 이미 작전을 전부 세운 후긴 하지만…….
‘정말 거기에 숨겨도 되나? 역시 작전이 무모한…….’
그러나 슈리는 곧 아이작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뜬 생각하믄 띠진다.”
…옙. 그래야죠.
동시에 신호가 떨어지고, 슈리와 나이저가 30개의 로켓 목걸이를 받아 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로켓을 받은 팀원들은 각자 흔들어보고, 자신의 것이 진짜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99%는 전부 연기겠지만.
“그럼 전원 위치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과 청의 팀이 흩어졌다. 나무와 돌 뒤에 몸을 숨기며, 각자 대형을 이루었다.
나이저는 아이작과 키나 베리트의 움직임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청이 그래봐야 청이지.’
어디서 사람을 파악하고, 대인전에서 최강인 적가 앞에서 머리를 굴려?
괜히 나이저가 적의 차기 가주로 내정된 것이 아니었다.
저딴 놈들의 계획은 이미 다 눈치챘어!
그는 큭 웃었다.
‘애초에 이쪽은 기회를 줬다. 그걸 걷어찬 건 아이작 에슈아, 너야.’
사실 나이저는 경기 직전, 슈리가 대장직을 사퇴하겠다고 심판에게 말하는 걸 봤다.
‘뭐, 기가 약한 놈이니까 부담을 느낀 거겠지?’
하지만 그대로인 걸 보면, 아이작 에슈아가 막기라도 한 거겠지?
‘이쪽은 오히려 고맙다만.’
슈리는 아카데미에서 한 번도 자신을 이긴 적이 없다.
그리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릴라이도 걱정하듯 보았다. 실제로 그걸 지켜보고 있는 모두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적의 대장이 너무 센데. 청은 대장이 미덥지 못하지 않나?”
“경기 전에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키나로 하지.”
“아까 보니 아이작이 작전을 짜고 있던 것 같던데, 역시 어린애라 잘 모르나. 피붙이 형이 더 강해 보였나 보군.”
“이거 청이 지겠구만…….”
그 반응에 나이저는 웃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모든 신앙, 황실! 그리고 아버지가 직접 계신 이 자리에서 청이 얼마나 약한지 만천하에 까발려주지! 신앙 선택 때도, 십사육마의 처형도! 성자도!
‘전부 나야!’
모두가 안타깝게 청을 보고, 나이저의 입꼬리가 승리의 미소로 바뀐 그 순간.
“시작!”
아이작이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