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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79화 (79/272)

제79화. 청을 무시하지 마라 (3)

순간 침묵이 돌았다.

키나의 말을 들은 시종과 시녀들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지금 뭐라고?

‘청의 사제라니.’

그러니까 아이작이 금가의 후계자, 아니 교황의 손자한테 청의 사제가 되라고 했다고?!

슈리도 청의 팀원들도 이미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 미친 거 아냐?

말해두지만 한번 정한 신앙을 옮기는 일은 없다.

물론 아예 없진 않지.

내부의 다툼. 개인사를 이유로 옮기는 경우가 있었고, 상급으로 갈수록 따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신앙의 수호자들인 5대 공작가지.

그들은 절대 모태 신앙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신앙의 수호자가 이적을 한다? 그건 신앙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가끔 정체성을 깨닫고 신앙을 바꾸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가문을 버리겠다는 의미, 배반자가 되겠다는 뜻이라 모든 자격을 박탈당하고, 가문을 떠나는 것은 물론 성까지 바꿔야 했다. 한마디로 파문!

그런데 뭐? 키나 베리트한테 청의 사제가 되라 했다고?

‘말한 쪽도 제정신은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금의 사람들의 눈이 희번득하게 빛났다.

‘도발하는 건가?’

‘적가를 그렇게 만든 걸로는 부족했나?’

그러나 아이작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왜 말을 지어내? 이번 적의 펜타곤에서만 되라고 한 거지, 누가 진짜 되랬어?”

아, 그럼 그렇지.

모두가 안도하며 납득한 듯 했다. 문제는 정작 장본인이 납득을 못 했다는 것이지만.

“몰라, 그런 조건. 난 네가 ‘청의 사제가 돼라’는 말에 승낙한 거야. 기한은 없어. 그러니 나도 너와 함께 견습 생활을 하겠어.”

“도, 도련님?!”

키나는 알게 뭐냐는 듯 아예 자리를 깔고 누웠다.

“아버님께 전해라. 당분간 집에 돌아갈 생각 없다고.”

“도련님!!”

그러나 키나는 아이작을 뚫어져라 보았다.

‘분명히 저녀석이 성법을 써준 건데.’

슈리가 그렇게 갑자기 강해졌을리 없었다. 아이작의 힘이 틀림없었다.

‘무슨 힘이지?’

설마 정말 교황으로서의 힘인가?

아이작의 옆에 있으면, 어쩌면 교황의 힘을 쓸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뭐? 황태자가 청에 선물을 하사해?’

기가 차서는.

황태자가 또 하나의 프린스인 키나를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사실은 키나 역시 황태자를 거슬려 했다.

뭐가 태양과 달이 공존하는 나라란 말인가.

자고로 한 나라에 두 왕은 존재할 수 없는 법. 현재의 황실과 교황가는 서로를 제국에서 몰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청에 선물을 줬다고?

‘하물며 사제들의 옷을 맞춰줘??’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단체복을 맞춰준다는 건 그 단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옷에는 ‘소유’의 의미도 있었다.

‘황실 주제에 감히 교황의 것을 탐하다니.’

괜히 5대 신앙의 우두머리인 추기경들이 검은색 사제복을 입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사제복엔 ‘자신을 죽이고 신의 종자로 살아가겠다’는 수의(囚衣)의 의미가 담겨있지만, 5대 신앙의 경우엔 우두머리로서의 본인을 죽이고, 교황에게 충성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5개의 신앙은 모두 교황의 것. <청>에 소속된 아이작 역시 교황의 물건이란 의미였다.

그런데 감히 황태자 주제에 자신이 먼저 찜한 걸 가져가려고 하다니.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은가?

“아무튼 적의 펜타곤에서 도움을 준 대가는 받아야겠다.”

그 말에 시녀들과 시종의 얼굴 밝아졌다.

왜 고집을 피우시나 했더니. 이제 보니 청을 방해하실 생각이신 거구나!

‘역시 도련님…….’

“하지만 네가 바쁜 듯하니, 여기서 함께하는 걸로 대신하지.”

도련님?!!!

“원한다면 금의 펜타곤도, 청도, 흑의 펜타곤도 깨주지. 금의 사제들을 누르고 청의 팀을 십사육마 처형식에 다 꽂아주마.”

도련니임!!!

“이럼 문제없지?”

문제 많아요!!! 엄청 많아요!

금의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아, 안돼. 청을 이롭게 해주려고 하시다니……’

‘각하와 교황 성하께서 아시면 큰일 난다.’

자신들도 죽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저 사악한 아이작 에슈아는 냅다 도련님의 호의를 먹어치우겠…….

“아, 필요 없다고. 꺼지라고.”

아이작 에슈아 님! 만세!

하인들은 아이작에게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리고 자, 이 정도로 무시받았으면 키나 도련님도 자존심상 물러나실……

“왜! 같이 공부해주고 가르쳐준다며! 같이 공부해줄 때까지 난 안 가! 어디 끌고 가보든가!”

“?!”

도련니임?!

키나가 아예 아이처럼 대자로 누워버리자, 주변은 또다시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팀원들도 키나의 모습에 멘붕이 온 듯했다.

키나 베리트라 하면 대륙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놈이 아닌가. 그런데 그… 키나 베리트가 아이작에게 배움 구걸을 해?

“아, 눈치 없는 새끼. 언제라곤 안 했잖아. 적당히 이용당한 거 눈치채고 집에 가라, 좀!”

“……?!”

심지어 이놈은 걷어차는데?!

그러나 키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미 계약은 이행했다.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 정식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해주겠다잖아. 자꾸 귀찮게 하면 아예 취소할 거야!”

…대가를 취소할 수 있는 거냐?!

그러나 키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뭐, 마음만 먹으면 청을 뒤엎을 수도 있지만 지금 아쉬운 쪽은 자신이다. 그리고 아이작이 저러는 것도 대충 이해는 갔다.

‘그래. 역시 교황의 기술을 쓸 수 있는 녀석은 다른건가.’

본인의 수련을 더 신경 쓰는 것이다. 분명 방해받는 게 싫은 거겠지.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 존중해주자.’

키나는 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시종에게 돌아가자 고갯짓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알았다. 그럼 언제라도 기다릴 테니 네 수련이 끝나거든…….”

“필요 없어. 나는 너보다 말귀 잘 알아듣는 훌륭한 학생을 키우느라 바쁘다고.”

그 말에 키나가 우뚝 멈춰 섰다.

…나보다 훌륭한 학생?

키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누군데, 그게?”

눈빛이 무섭다. 감히 자신보다 훌륭한 학생이 있느냐는 듯한 눈빛.

하물며 지금 자신도 못 배우고 있는데, 뭐?

이에 슈리가 움찔거렸다.

시발, 뭔지는 모르겠는데 불안하다. 10년간 아이작 덕분에 쌓아온 촉이 불길하다고 말해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의 동공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냐. 아이작.

안 돼. 여기 보지 마. 보지 말라고!!!

동시에 키나의 눈빛에 아이작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누구냐고? 지금 그걸 묻는 거야?”

아니, 안 물었어!!

“당연히 우리 낌슈리지.”

시바아아알! 역시 불길한 촉은 안 빗나가지!

그리고.

“슈리?”

“어.”

“슈리이이?”

“어.”

“에슈아 가문의 슈리이이이????”

“어!”

키나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저게 나보다 훌륭하다고?”

방금 전까지 집에 가려고 했던 키나의 눈이 회까닥 돌아가 있었다.

“아, 그래. 그러면 저거보다 뛰어나단 걸 증명하면 그 가르침, 내게 주는 건가.”

슈리는 촉촉해진 눈가를 짚었다.

하…. 시발. 누가 나랑 좀 바꿔줘.

* * *

“우와, 쟤네 뭐야!”

교황청 연회장.

자리에 모인 견습들이 소란스러웠다. 보통 한달에 한 번, 연회겸 품평회를 하는데 오늘은 좀 더 특별했다.

“…미친. 청의 자리, 저게 뭐냐!”

“우리랑 연회 음식이 다르잖아!”

“오면서 봤는데, 생활관도 업그레이드되고 있더라…….”

“뭐?!”

견습들은 수련 때문에 콩 같은 간소한 음식을 먹는 게 보통이다. 연회식도 비교적 검소했다.

하지만 청의 팀에게 놓인 음식은 상상을 초월했다.

‘코, 코스요리?’

‘초호화 요리잖아…!’

‘역시 펜타곤에서 1등을 하면 대우가 달라지는 구나.’

화합 때는 성적을 매기는 시험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지만, 적의 펜타곤부터는 상위 팀에게 보상이 주어졌다.

적의 펜타곤에선 식(食)이었다. 하물며 보통 요리도 아니고, 축복이 담겨 육체와 능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요리다.

그렇기에 연회에 참여한 릴라이도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마… 아이작 팀에 1등을 주실 줄은 몰랐는데.’

적(赤)에게 이기긴 했지만, 그딴 행각을 벌였다. 솔직히 정체가 의심된다며 감옥에 안 끌려간 게 기적이다.

‘근데도 용케도 킹이 나왔구나…….’

교황청…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채점하다가 단체로 머리에 벼락 맞았나?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아이작의 옆자리다…….

모든 팀, 하물며 사제들도 땀을 삐질 흘리며 아이작 쪽을 보고 있다.

그래…. 그러니까……

‘키나가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쟤 오늘 교황과 중요한 행사가 있지 않았나?

왜 저기 앉아서 보란 듯이 아이작에게 좋은 고기를 골라주고 있는 거지?

물론 아이작은 키나를 개무시하고, 슈리가 퍼 놓은 고기를 먹고 있지만… 그리고 왜인지 키나는 슈리를 노려보고, 슈리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지만…….

아무튼 아이작이 1등이라니 기쁜 일인가?

‘그래. 이런 식이면 우리 청도 다시 올라갈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때였다.

“청이 이겨서 표정 관리가 안 되시는군?”

“!”

릴라이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 장발에 검은 사제복, 어깨에 붉은 영대. 적의 추기경이었다.

릴라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각하.”

적의 추기경은 특유의 실눈으로 쿡쿡 웃었다.

겉보기엔 30대로 젊어 보이지만, 마흔쯤 됐겠지. 만약 아이작의 아버지이자, 릴라이의 큰형이 살아있었다면 같은 나이였을 공작.

그걸 인지한 것일까. 적의 추기경은 릴라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들었소. 곧 9계위에 도달할 것 같다고. 그 나이에 대단도 하시지.”

9계위는 추기경과 성녀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즉, 릴라이가 9계위가 된다는 건, 가주가 될 수 있단 의미.

하지만 적의 추기경은 청이 이긴 게 못마땅했던 걸까.

“청의 가주도 시름이 크시겠소. 유일하게 자리를 물려줄만한 릴라이 경이 ‘시한부 생명’이라니.”

“……!”

릴라이가 움찔해서 적의 추기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적의 추기경은 실수했다는 듯 웃었다.

“아하. 아니지. 목숨 문제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가주는 무리였나? 자네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니.”

“……!”

릴라이는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저런 기특한 조카들이 있으니 청의 가주께서도 한시름 놓으시겠구려. 자네도 어차피 서른다섯을 못 넘고 금방 요절할 몸. 죽기 전에 아이작을 키워내고 싶어 했던 것도 알고 있고.”

“각하…….”

“뭐, 삼남이긴 하나 적가문의 후계자가 황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깨졌소. 이 정도 심술은 봐주시오. 하하하.”

적의 추기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돌아섰다. 릴라이는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사람을 읽어내는 신앙.’

에슈아의 저주에 대해서도 들킨 건가.

하지만 알게 뭐람. 틀린 말도 아니고, 어차피 가주가 될 생각도 없었으니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뭐, 아이작한테만 해를 안 끼치면… 헉?!’

아이들을 지켜보던 릴라이는 식겁했다. 적의 추기경이 아이작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애한테는 또 무슨 망발을 씨불이려고!’

자신이야 어떤 소리를 들어도 괜찮지만, 애한테는 안 됐다.

릴라이가 급히 따라가려고 했지만, 귀족들에게 붙잡혔다.

곧 적의 추기경이 아이작의 뒤에 섰다.

“에슈아 공자?”

그의 등장에 음식을 미친 듯이 퍼먹던 청의 팀들은 바짝 얼어붙었다.

적을 능멸하고 1등을 차지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처바른 놈들의 수장이 왔으니,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들은 먹다 말고 일어나 넙죽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적의 추기경은 여우처럼 한껏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만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혼자 앉아 계속 음식을 먹고 있었다. 옆자리의 슈리가 아이작을 쿡쿡 찔렀지만, 아이작은 본 척도 않고 고기를 먹느라 바쁘다.

“아이작 군?”

“야. 부르잖아……”

“아, 뜨발. 왜 묵느데 띠룰이야. (아, 시발. 왜 먹는데 지랄이야).”

결국 고기를 내려놓은 아이작이 돌아앉아서는 꾸벅 인사를 했다.

“눼. 각하.”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군이 적의 펜타곤을 앞당겨주면 보여주기로 했던 재미있는 건 뭐였죠?”

“아, 못 보셨어요? 댁의 아드님이 처발리는 거요.”

아이자아아아악!!!

일동, 먹은 음식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좀 즐거우셨나요?”

아이들은 겁에 질린 듯 적의 추기경을 보았다. 적의 추기경의 등 뒤로 마기가 치솟는 듯했다.

이 썅노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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