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왕이시여
[꿇어라.]
머리를 찍어누르는 목소리.
단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애쉬는 척추부터 머리까지 전기가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한순간에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번개가 뇌를 새까맣게 태우는 느낌.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 목소리에 몸이 반응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
그녀의 떨리는 시선이 아이작의 백금발과 사제의 것을 두른 몸을 빠르게 훝었다.
보고 또 봐도, 자신이 아는 그 역겨운 무리들.
뭐지.
왜지?
왜 성직자 놈이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얼어붙은 애쉬의 눈이 공포에 일그러졌다.
아니, 마력이 문제가 아니다.
‘이 마력.’
상위 마족이기에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이건 일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력이 아니다.
아이작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붉은색의 마안.
그녀의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무섭다.
숨이 막혔다.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였다.
아니. 과연 처음인가?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위대하신 왕.’
물론 애쉬 같은 마족으로서는 해골왕의 옥안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딱 한 번.
그녀는 위대하신 왕의 힘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마족의 땅을 내놓으라고, 가증스러운 신들이 위협을 해올 때였을 것이다.
수많은 신들의 사자가 해골왕에게 덤벼들었고 이에 진마들은 대전쟁을 준비했지만, 왕은 산책 준비면 됐다고 했을 뿐.
왕은 허공에 한 번 선을 긋는 것으로 끝냈다.
주제 모르는 사자들이 한순간에 지상에 떨어졌다. 신들조차 그 힘을 불경시하며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 힘에 모든 마족들이 전율했다.
콧대 높은 순혈 마족들조차 최강의 마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왜 그때의 느낌이… 저딴 꼬마에게!!
애쉬가 눈을 부릅떴지만, 곧 얼어붙을 듯한 비소가 터져나왔다.
“지금 어디서 그 눈을 맞추고 있는 거냐.”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애쉬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쾅!!
‘허억……!’
보이지 않는 힘이 애쉬의 머리를 짓눌렀다. 떨어진 이마가 짓이겨질 듯 지면에 붙었다.
애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젠장…! 뭐야 이 흉악한 기운은!’
아까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신 따위는 미물이라는 걸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압도적인 힘.
더 무서운 건, 이게 힘을 쓴 것도 아니란 것이다.
동시에 팔짱을 낀 아이작이 다가왔다. 막강한 마력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알아서 기어 나왔으니 찾는 수고를 덜했구나. 네놈이 성기사들을 납치했나?”
그 말에 고개를 조아린 애쉬가 움찔했다.
…그래!
겁에 질려서 잊고 있었는데, 맞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이 꼬마를 먹으려고 했었지?
왜냐고?
위대한 왕의 육신을 먹은 꼬마니까!
애쉬의 이지러진 입꼬리가 그제야 주제도 모르고 씰룩거렸다.
‘이 꼬마 놈, 왜 이만한 마력을 뿜어내나 했더니!’
그래! 그런 거였어!
“네놈이 고귀하신 왕을 옥체를 먹어서 그렇구나!”
“?”
애쉬는 가까스로 마력을 움직였다. 그 마력이 지면을 타고 마수를 세상에 끌어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그분의 힘을 내뿜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지면에서 소환된 건 네 마리의 마수.
“왕이시여, 기다려 주십시오! 저 꼬마의 배를 갈라서 바로 옥체를 꺼내드리겠습니다!”
건물보다 거대한 새가 치솟아올랐다.
이들은 평범한 마수들이 아니었다. 해골왕의 힘을 받은 자신이 성장시킨 마수로, 이번에 성기사들을 납치한 마수이기도 했다.
해골왕의 힘을 받은 만큼, 상급 성기사들도 손을 쓰지 못하고 낚아채간 마수들!
그분의 힘이라면 저깟 꼬맹이를 찢어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마수를 본 아이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미소와 검은 마력이 지면에 퍼졌다.
쿠구궁!
모든 마법사들을 무릎 꿇릴 강력한 마력이 사방에 퍼졌다.
그리고 그가 불러낸 것은 <팔열지옥(八熱地獄)> 중 하나.
흑승지옥(黑繩地獄)!
<흑승지옥-염>
살생과 절도를 저지른 이들이 떨어진다는 팔열지옥. 그곳에서 불러온 불길이 아이작의 마력을 통해 실체를 드러냈다.
콰르륵!
팔열지옥의 불타는 쇠사슬이 마수의 심장을 뚫고 나왔다.
푸학!
피가 떨어질 시간도 없었다.
불타오르는 사슬은 한순간에 마수의 심장을 옭아매고-
콰직!
터질 듯이 묶인 심장은 순식간에 검은 마석으로 변하며 불을 피우는 원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연탄이 발화하듯 터져나오는 거친 불길!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쐐액!!
불길에 찢긴 네 마리의 마수가 한순간에 해골왕의 연료가 되어 증발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흔적이라고는 검은 재와 함께 떨어지는 짐승의 털들뿐. 그 털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애쉬는 눈을 꿈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
지금 무슨 일이?
애쉬의 눈이 떨렸다.
……어? 어어?
………어???
애쉬가 상황을 깨달은 건 아이작이 코앞까지 왔을 때였다.
“고작 6계위 수준으로 내게 덤비는 거냐?”
“……?!”
그 섬뜩한 목소리에 애쉬는 멘붕에 빠졌다.
고작이라니!
6계위 수준의 마수 4마리면, 인간들은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수준이거늘!
그러나 아이작은 푸핫 웃음을 흘렸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애쉬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법의 위력을 시험해보고 싶었거늘!’
신성제국 안에서는 마음껏 마법을 쓸 수 없는 그였다.
물론 이보다 더할까 싶을 정도로 해골왕 최고의 걸작인 마력핵을 만들었지, 거기에 성자의 몸 때문에 마력은 더 압축해서 농축시키지!
위력이 안 오를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위력이라니!
‘역시 옛날보다 위력이 올라가 있다.’
위스퍼는 황홀해서 죽으려고 했다.
하물며 이번에 아이작이 쓴 힘은 주인님이 불러내는 지옥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급이 낮은 지옥의 불!
그중에서도 아직 콧김에 불과한 불이었다.
그런데!
[아, 아아! 고작 5계위 마법으로 이만한, 이만한 힘을 내시다니!]
물론 마법 내성이 없는 마수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확연하게 체감이 되었다.
‘역시 성력과 마력이 섞이니 특별한 힘을 내는군.’
긴가민가 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절대 합쳐질 수 없는 성력과 마력이 합쳐지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들이 인간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려 한 이유일지도.’
원래도 모든 술법에 정통한 해골왕이었고, 성녀와 싸운 만큼 누구보다 성력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무방했으니까.
만약 성력을 쓸 수 있는 몸이 되면, 저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예상 밖인데.
‘고작 이 정도 단계로 벌써 이 만큼의 힘이라.’
아이작의 현재 마법 경지는 아직 5계위 수준. 성법은 정화를 제외하곤 아직 4계위 수준이다.
그러니 초월계위, 아니 10계위만 가도 어느정도의 힘이 될지 상상이 되겠는가?
물론 아이작은 이미 한번 마법의 정점을 찍은 마왕이었다.
거기에 마력핵에 깃든 해골왕의 고유한 성질의 마력, 아니 전보다 더 신경 써서 만든 마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계위가 낮으면 쓸 수 있는 마법 개수가 적은 거지, 힘을 못 쓰는 게 아니거든.’
이깟 마족 하나 굴복시키는 일쯤이야.
아이작이 애쉬의 머리통을 잡아 눌렀다.
“컥……!”
그럼에도 애쉬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법을 쓸 수가 없다!’
그녀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방금 그건 단순히 먹어치운 해골왕의 힘을 발산한 수준이 아니었다.
‘본인의 힘을 쓰신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쓸 만한 분은 세상에 오직 단 한 분!
‘왕!’
그걸 깨닫는 순간 애쉬는 숨이 턱 막혔다.
아니나 다를까,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애쉬의 귀에 떨어졌다.
“너희는-”
사무칠 정도로 무섭다.
“내 말이 우스웠던 건가?”
아이작이 말을 더할 때마다 머리가 짓눌려진다.
“분명 인간은 건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거역할 수 없는 흉악한 마력이 목을 조르고, 숨구멍을 틀어막는다.
애쉬는 결국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어, 어째서 왕께서……?’
그분은 왕의 성에 계신 것이 아니었나.
아니, 지금은 머리를 굴릴 때가 아니었다. 왜 이분이 여기에 계신 건지,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애쉬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왕이시여…! 죽을죄를! 해독제도 당장 내놓겠나이다!”
“아니. 해독제는 됐고.”
…뭐?
해독제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었어?
하지만 아이작은 눈을 번득였다.
“됐으니까 납치해간 성기사들 위치나 불어.”
“예! 공간이동으로 곧장 데려오겠나이다!!”
“오. 데려올 수 있어?”
아이작의 목소리에 반색의 기운이 어리자, 애쉬는 됐다는 듯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 말씀만 하신다면 바로!”
그러나 아이작은 고개를 우득거렸다.
“그런데 말야.”
“예!”
“내가 금의 펜타곤에서 완벽한 킹을 받으려면, 성기사 탈환뿐 아니라 증거가 필요하거든.”
“즈, 증…거라 하시면.”
그 말에 아이작은 제 목을 손날로 내리치며 섬뜩하게 웃었다.
“마족을 확실하게 처리했다는 증거.”
자신의 목을 가리키는 듯한 아이작의 눈빛에, 애쉬는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