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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89화 (89/272)

제89화. 지금 뭐라고 했나? (2)

세상엔 건들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하늘을 떨어트리는 자>, <명계의 패자>, <팔백만 마신의 지배자>. 그리고 그 모든 별호를 가진 자, 해골왕 이사악.

그런데 그걸 건드리면 어찌 될까?

‘…어찌 되긴 뭐 어찌 돼. 그냥 죽는 거지, 뭐.’

그래. 애쉬는 죽어야 했다.

분명 죽었어야 했는데…….

‘왜 아직 목이 붙어 있는 거지.’

애쉬는 가냘픈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감히 아이작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도 못했다.

분명 목이 필요하다는 아이작의 말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너. 14년 전에 청의 견습들을 먹어치운 놈 아니지?

-예?

아이작이 뜻밖의 말을 한 것이다.

마치 애쉬의 속내를 훑는 듯한 아이작의 마안은 혼불을 보는 것 마냥 기이하게 번뜩였다.

-인간을 하나, 둘… 그 정도 먹긴 했으나, 현상수배에 걸린 그놈은 아냐. 14년 전에 사제들을 뭉텅이로 잡아먹은 놈치고는 피 냄새가 별로 안 난단 말이지.

-그, 그것이…….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내가 교황청에 가지고 갈 ‘증거’가 필요하단 거니까.

-!

-하지만 어설픈 놈으로는 교황청을 못 속이는데.

아이작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눈치 빠른 애쉬는 바로 이렇게 외쳤지.

-시, 실은 한 놈이 더 있사옵니다!

그리고 애쉬는 스스로 마족의 목을 바치고, 공간이동을 통해 길을 안내했다.

하물며 아이작이 더러운 성기사들을 만지기 싫어한단 이유로, 애쉬가 하나하나 낑낑대며 성기사들을 몽땅 옮겨다준 현재.

애쉬는 그저 판결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아이작의 밑에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조아린 머리는 언제 칼이 떨어질지 몰라 땀이 주르륵 흘렀고, 예민하게 선 귀는 아이작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쫑긋 서 있었다.

“14년 전의 범인이 네놈이 아니란 건, 처음 보자마자 알고 있었다.”

그 말에 애쉬는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제게 피 냄새가 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

아이작은 가증스럽다는 듯 웃었다.

“네놈은 너무 약해.”

“……!!”

“아무리 14년 전이라 해도, 릴라이가 잡지도 못하고 쓰러졌을 놈이 아냐.”

스무 살에 이미 7계위였던 녀석이었다. 견습 때도 이미 그 정도 수준이었겠지.

“그에 비해 네놈은 한 6계위쯤 되려나?”

당시 잡아먹힌 견습들의 숫자는 무려 백을 넘어갔다.

“수백 명을 배 속에 처넣은 주제에, 청과 교황청의 수색에 아직도 안 붙잡혔을 녀석이 아니란 의미지.”

그래서 굳이 이걸 데려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어차피 교황청과 적의 신앙에서 조사해보면 범인이 아니란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래도 설마 진짜 범인의 모가지를 가져올 줄은 몰랐거늘.”

아이작의 웃음에 애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작은 그저 ‘교황청에 들고 갈 마족의 목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 범인의 목을 가져오란 소리는 결코 안 했으니까.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혹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모든 걸 깨달은 애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네놈이 그 정도의 머리가 돌아가는 놈인지를 본 거다.”

교황청에 들고 갈 목이 필요하다는 시점에서 다른 마족을 바치겠다는 걸 보면, 눈치는 제법 있는 놈이었다.

살고 싶으면 다른 목을 구해오란 의미를 정확하게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부족하지.

만약 본인의 부하나, 주변의 상관없는 마족의 목을 들고 왔으면? 아이작은 애쉬를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을 것이다.

그건 곧 본인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놈임을 뜻하으로.

즉 아이작이 원한 답은 이것이다.

“진짜 14년 전의 범인 중 하나를 가져오다니. 그건 칭찬해주마.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줄 알아라.”

이게 아니었다면 목이 달아났겠지.

애쉬는 처음부터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14년 전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군요……!”

아이작은 섬뜩하게 웃었다.

“그래. 하나는 너 같은 여자, 또 하나는 그 여자가 데리고 다니던 마수. 뭐, 어쨌거나 넌 합격이다. 쓸모가 있겠어.”

눈치도 좋다. 마수라곤 하나, 14년 전 공범의 목을 단번에 베어온 걸 보면 실력도 제법 있다.

물론 애쉬의 목을 따서 교황청에 가져다주면, 그걸로도 충분히 공적이 되겠지. 교황청은 늘 마족의 목을 원했으니까.

하지만 굳이?

애초에 애쉬를 데려가면 아이작에겐 손해였다.

‘이단심문관들은 사체에서도 기억과 정보를 뽑아낼 수 있거든.’

잡아간 마족들은 전부 교황청에 넘겨져 조사를 받는다.

산 놈이면 산 채로 <적의 신앙>에서 고문을, 죽은 놈이면 죽은 대로 <흑의 신앙>으로.

그게 무슨 의미냐고?

[주인님이 저놈과 대화한 것도 성직자들에게 들어갈 가능성이 있단 소리군요.]

‘그래, 그런 거다.’

뭐, 짐승들은 사고방식이 달라서 기억을 뽑기 힘들다 쳐도, 사고 체계가 비슷한 인간형을 가져다 바친다?

자신이 해골왕이라는 사실을 성직자들에게 알릴 일 있나?

물론 기억이야 지워버리면 그만이다만…….

[아직 고위 성직자들을 속일 만한 기억 조작은 못 쓰시죠.]

그래그래.

어디 그뿐이야?

기억 조작 흔적이 있는 걸 내가 들고 가면 개 수상하잖아.

공적을 쌓는 건 다른 놈으로도 충분하지.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뱉는 것이었다.

“익명의 정보원이 네놈을 14년 전 마족이라고 지목했다. 짐작 가는 구석이라도 있나?”

어쨌거나 부하의 정보를 물고 온 참새는 애쉬를 14년 전 마족이라 지목했다.

그냥 지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애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실은 14년 전 그 범인은 제 언니입니다.”

아.

그래서 신상 정보나 기운이 비슷한 것이었군?

“언니는 본인의 마수에게 사제 사냥을 시키며 간식으로 먹였습니다.”

아이작은 바로 납득했다.

그래, 바로 그 여자가 릴라이가 쫓던 놈이겠군.

뭐, 그래도 사제들을 먹어 치운 장본인을 잡은 것이었다.

그래도 좀 기뻐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육사까지 잡으면 더없이 좋아할 것 같다만…….

“네 언니의 계위는?”

“9계위입니다.”

아이작은 어째서인지 탄식했다.

아아아, 릴라이가 못 잡을 만하네.

[9계위면 진마들 아닙니까?!]

응 그래. 그런 것 같다.

<진마(眞魔)>.

마왕 밑에 존재하는 최고위 마족.

기존에 마족들을 지배하던 이들로, 결국에는 해골왕에게 굴복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굉장히 강한 순혈 마족들이었다.

그리고 순혈들인 만큼 비천한 스켈레톤이 본인들 우위에 서는 걸 싫어하던 놈들도 있었다.

뭐, 불만 있는 놈은 싹 닥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싫겠지.

그 새끼들한테 스켈레톤이란 본인들이 소환하는 소환수일 텐데, 그 소환수한테 지배당하는 입장이라니.

하지만 싫으면 어쩔 건데? 꼬우면 지들도 노력해서 올라오든가!

암만 기를 써도 옷자락도 못 스치던 핏덩이 새끼들이.

꼰대 같은 말이어도 뭐 어쩌랴. 불만이면 지들도 수백 년을 스켈레톤으로 살아보라지.

아무튼 해골왕이 사라진 지금 시점이었다.

“그, 상층부의 뜻은 잘 모르겠지만 해골왕께서 신들과 싸우신 후 힘이 약해지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자를 죽이고, 해골왕을 위해 힘을 모아오라고…….”

푸핫! 그러니까 가짜를 내세워 힘을 모으고 있단 의미인가!

뭐, 괘씸하지만 대충 사고방식은 이해…….

“왕의 재산도 썼습니다.”

…뭐, 인마?

“왕의 보물과 성을 매각했습니다!”

이 시벌 놈들이??

뭐? 뭘 매각해?

누구한테, 인간들한테?

아이작의 돌아간 눈에 위스퍼가 눈치를 슬쩍 살폈다.

[주, 주인님?]

하. 뭐, 그래. 열이 뻗치지만 무려 마왕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깟 재산이 뭐가 중요하… 시발, X나 중요한데?

내가 스켈레톤 때부터 어떻게 모은, 아니 이게 아니라 원래 재산이란 꿍쳐두기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중요할 땐 써줘야 의미가… 있기는 개뿔이.

시발, 존X 아깝네… 아니아니 이게 아니라, 힘의 보강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랴! 그깟 재산이 뭐가 중요… 아닌데, 시발! 개 중요한데!

아무튼 인간에게 재산을 처분해서 살림에 보탬이 된다면…….

“신들에게 전부 팔아치웠습니다!”

뚝.

그 순간, 뭔가에 화들짝 놀란 위스퍼가 비명을 질렀다.

[주인님! 힘! 힘이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으악 못 버텨, 꺄으악!]

마침내 위스퍼가 꾹 눌러놓고 있던 마력핵의 힘이 폭발했다.

마치 가스가 압축되어 있던 가스관이 내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구멍이 뚫리듯.

쾅!

마력핵에서 마력이 새어나왔다.

새어나온 힘에 창문이 깨져나가고, 방 안의 물건들이 쓸려나가며 엉망이 되었다.

와장창!

“으악!”

가까스로 위스퍼가 마력을 잡아 누르긴 했지만, 아이작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돌아가 있었다.

“이 새끼들. 가만 안 둔다.”

시벌 놈들이. 팔아도 팔아넘길 놈들이 따로 있지. 시발, 넘겨도 신들 새끼한테 넘겨?

수백 년 동안 어떻게 모은 건데!

그 새끼들이 어떤 놈들인데!

내가 신들한테 모욕당하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어떻게 모은 건데!

그리고 그 새끼들은 벼룩의 간을 빼먹지! 부자 새끼들이 뜯을 게 없어서 마왕의 재산을 노리냐?!

고자질을 한 애쉬는 엎드린 채 덜덜덜 떨었고, 위스퍼는 죽겠다는 듯 끙끙 앓았다.

아이작은 반쯤 돌아간 눈으로 기절 직전인 애쉬를 보았다.

“신들에 대해서도 아나?”

“예, 예?”

“150년 전, 해골왕이랑 신들이랑 싸운 후에 어찌 됐냐고.”

“그…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신계에 큰 피해가 있었는지, 지금까지 조용했습니다.”

조용?

아이작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거 의외네.

자신이 봉인된 상황인 만큼, 그 기회를 틈타 마족을 쓸어버리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인데.

굳이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럴 여력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생각보다 자폭의 영향이 컸나 본데?’

티끌만 한 피해라도 좋으니 엿이나 먹으라고 자폭을 하긴 했지만, 아이작의 생각보다 피해 범위가 컸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150년이 지나도록 조용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좀 이상했다.

아무리 피해가 있다고 해도 너무 조용하다.

‘이상하다. 그놈들의 성격상, 지금쯤 마족 쪽을 미친 듯이 뒤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왜냐고?

봉인이 실패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해골왕의 영혼을 놓쳐버리면 걔네들 입장에서는 X 된 거니까.

그런데 조용하다고?

하다못해 해골왕의 재산도 멋대로 가져가며 업보를 쌓으면서도 느긋하다고?

해골왕을 그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기엔, 그랬으면 애초에 해골을 속여서 봉인할 생각조차 안 했겠지.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예?”

아이작은 본래 놈들에게 당해 벌레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내가 여기있다는 건 벌레가 텅 비었단 건데. 날 찾으려고도 안 했다고?”

“왕이시여?”

…이 새끼들, 설마 내가 아직 벌레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냐. 그것들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냐.’

곧 아이작의 눈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설마… 그 안에 나 대신 다른 놈이 들어가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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