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지금 뭐라고 했나? (3)
<재해진멸(災害殄滅)>.
그건 신들에게 대적하는 놈들을 가두는 최악의 봉인술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작이 벌레에 봉인당하고, 이 몸으로 태어나게 된 계기.
‘뭐, 왜 하필 태어나도 성녀 가문의 몸뚱이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원수 집안에 처박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뭐, 아이작도 10년 동안 조사했지만, 아직 이해할 수 없는게 많긴 했다.
왜 하필 ‘이 가문’이었는지.
왜 이 아이의 이름이 하필 자신의 이름과 똑같았는지.
‘이삭… 아니 아이작이란 이름이 흔한가?’
시벌, 그리 생각하면 더 열 받는데?
그리 흔한 이름이면, 또 다른 아이작의 몸에 넣어줄 수도 있잖아!
그래, 이왕 할거면 더러운 성녀 가문 말고 저기 황태자라든가! 저어기 돈 많은 백수 집이라든가!
그러면 누구보다 빠르게 매국노 짓을 해서 가문과 나라를 망하게 해줄 수 있는데! 시벌! 왜 하필 빌어먹을 성직자 가문이냐고오! 아오!
물론 그래서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고 덕분에 운 좋게 봉인에서 빠져나왔지만. 어쨌든 원래라면 아이작이 막아낼 수 없는 봉인술이라는 것이다.
‘이건 최고위 술법이다.’
대충 최고신급의 술법, <초월계위>의 성법이란 의미였다.
괜히 과거에 신에게 대적하던 절대적 존재들이 다 사라졌는 줄 아나?
어쨌거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만한 성법이 영혼을 놓칠 리 없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이 이리 평화로울 리 없다.
‘그래. 애초에 150년이다. 내가 사라진 걸 알았으면 이미 모든 성직자들한테 수배 명령이 떨어지고도 남았지.’
신의 사자인 천사들도 인계에서 눈을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마를 상대하는 청의 가문이라면 더욱 모를 리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설마 나 대신 다른 놈이 들어가 있다고?’
진짜로??
‘…아니, 그럴 리 없나?’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들이 괜히 신이 아니었다.
뭐, 정작 놈들은 자신을 경계했지만, 해골왕도 그들의 실력을 인정하긴 했다.
하급신들은 뭐, 좋은 발닦개지만… 상급신, 특히 주신급 이상은 만만치 않다. 마족을 단번에 몰살시킬 힘을 가지고 있었다.
‘뭐, 사실 신성력에 약한 해골이었을 때라 더 그랬던 것도 있지만.’
신성력에 약하다는 약점이 사라진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네.
‘아무튼, 나 대신 벌레에 다른 게 들어가 있는 거라면…….’
누구지?
어떤 놈이 들어가 있는 거지?
마력을 가진 상위 생물? 아니면 해골왕과 비슷한 이름의 대재앙?
‘그것도 아니면 설마… 신?’
그 생각에 미친 아이작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지금까지 본 미소 중에서 가장 즐거워보였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꼭 확인을 해봐야겠군.
“150년 전에, 혹시 신들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았고?”
“아, 예…! 왕께서 신계를 공격하신 후, 부상을 입은 신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행방불명된 신도 있지만, 지금은 대부분 다 찾은 듯한데…….”
푸헿!! 그래에! 그렇구나!
진짜 내 대신에 신이 갇혀있을 수도 있겠어!
심지어 이 새끼들, 내 자폭에 휘말려서 벌레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황이구나?
바깥 일이고 자시고 신경 쓸 겨를도 없구나?
아이고오, 그냥 혼자 죽기 싫어서 생체기라도 내려고 자폭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깨소금이네.
아무튼 지들 안방에서 해골왕이 설치고 있는데 그걸 모르다니, 이거 짜릿해 죽겠네.
‘내가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꽤 상급신이 갇혀있을 수도 있겠어.’
해골왕을 대체할 만한 놈이 들어가야 티가 안 나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이작은 더욱 즐겁게 입이 째졌다.
어디지? 어느 쪽의 신이지?
맛탱이가 간 금? 적? 백? 흑?
그것도 아니면, 5대 신앙이 아닌 마이너 신앙?
뭐 확실한 건 조무래기 신은 아니라는 거다.
물론 그렇다 한들,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만.
‘특히 주신들은 만만치 않은 놈들이거든.’
최소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소멸당하는 꼴은 보지 말아야지.
그런만큼 성자의 힘을 끌어올려, 놈들은 손도 대지 못할 만큼 강해져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네놈은 좀 쓸 만하겠다.”
아이작은 애쉬를 보았다.
“너는 마족 쪽으로 가서 내 눈이 되어라.”
감히 신들하고 짝짜꿍해서 내 물건을 팔아넘겨? 마족도 신들도 가만둘 것 같으냐.
그리고 마족의 동향을 알면 신성진영에서는 알지 못하는 귀한 정보가 들어온다. 들어온 정보의 사실들도 교차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아이작의 말에 애쉬가 살았다는 듯, 그제야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목을… 바친 보람이 있다!
한때는 어찌 되나 싶었지만,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잘하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눈이 아까와 다르게 계산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충성하겠나이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
“입 놀리지 마라.”
“!!”
뇌를 찍어내리는 듯한 말에 애쉬는 다시 굳었다.
아이작은 애쉬의 생각은 이미 읽고 있다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살려주시면? 감히 누구에게 조건을 다느냐.”
“……!”
그는 어쭙잖게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말라는 듯 차가운 얼굴로 애쉬를 노려보았다.
“입장을 헷갈리지 마라. 그딴 게 아니어도 네놈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잠시나마 출세를 꿈꿨던 애쉬는 꼬리를 내린 짐승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모든 걸 꿰뚫어보시는 분이다. 이를 망각해서는 안 됐다.
자신은 이분과 동등한 거래 상대가 아니다. 그저 본인의 손발 대용품으로서 살려두고 있는 것일 뿐.
아니, 손발이라는 표현조차도 과분하지. 그저 불을 붙이기 위한 나무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 불을 붙일 나무는 차고도 넘친다. 그저 자신이 우연히 이분의 눈앞에 놓여 있었을 뿐. 그리고 다른 나무를 구하기 귀찮으시니 자신을 택하셨을 뿐.
분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분은 위대한 해골왕.
마족들의 본보기가 되실 분.
“명심하겠나이…….”
“감히 내 짝퉁의 환영체를 서품식에 보내?”
애쉬는 몸을 흠칫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그것은…! 입이 만 개여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에 계신 게 가짜인 줄 알았다면, 저도 그런 짓은…….”
“너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괜히 뒤질 뻔하고!”
“…그런 짓은…….”
“찌발. 너 때문에 그 뒤로 할부지가 금식시켜서 과자들도 못 먹었어, 띱때야!”
“…그런 짓은.”
“그런데 이번엔 너 때문에 나갔다 오느라 슈리 이 꼰대 때끼가 사탕까지 금지시켰다고!”
…뭔가 좀 이상한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사탕 500개만 사와.”
정말 괜찮은 거겠지??
* * *
“죽을 만큼 감사합니다!”
“아이작 님께는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이작은 눈썹을 치켜 떴다.
음, 그러니까 더러운 성기사 놈들이 인사를 하는군. 그것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흙바닥에 묻혀가며 절을 하고 있어.
“설마 혼자서 그 마수를 쓰러트리실 줄이야!”
뭐, 쓰러트린 건 내가 아니지만 말이다.
“심지어 혼자서 저희를 들고 그 거리를 이동하셨다니요! 성자님의 귀한 손으로 직접 옮겨지다니, 영광입니다! 더러운 마족의 기운도 다 날아갔겠죠!”
내 손이 아니라 마족 놈이 발로 차가며 데굴데굴 옮겼다만.
“하다못해 저희를 위해 물까지 놓고 가주시고. 물맛도 아주 좋았습니다!”
난 그런 거 놓고 간 적 없는데.
니들 도대체 뭘 마신 거냐?
설마 마수들이 흘린 오줌은 아니겠지?
어쨌거나, 아이작에게 구해진 성기사들은 몹시 고마워했다. 특히 끌려갔던 역마들은 사제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거라곤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자신들은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배달원에 불과했으니, 고귀한 사제 인력을 투입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것이다.
그랬는데……!
“다른 분도 아니고, 에슈아의 직계분께서 직접……!”
그들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솔직히 놀라운 일이었다.
잡혀간 성기사들은 총 11명. 그 중 3명이 조금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교황청의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질 정도였다.
잡혀갔던 청의 상급 기사는 면목이 없다며 아이작에게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하다하다 청의 상급 기사까지 잡혔을 줄이야. 역마들의 대장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이작님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됐어. 신경 쓰지 마. 우리도 임무였으니까.”
그러나 역마의 대장은 ‘역시 청의 사람다우시다’며 감격했다.
“아닙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저 7계위 기사 데레크 및 모든 역마들. 앞으로 아이작 님이 명하시기만 하신다면 어디든지 달려오겠습니다.”
그 말에 청의 상급 기사가 드물게 놀랐다.
‘세상에, 저 역마들이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하다니.’
단장인 데레크의 기원 능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역마들은 대륙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이다.’
그만큼 정보통의 귀재들이었다. 게다가 기동성은 제국 최강. 아마 곳곳을 떠도는 저들의 입을 통해 아이작의 이야기가 대륙 곳곳에 퍼져나가겠지.
‘교황청에서도 길들이지 못한 놈들을.’
보고드리면 가주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것이었다.
동시에 아이작은 교황청이 왜 이 임무에 느릿하게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하물며 왜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듯이 견습 사제들에게 이 임무를 떠넘겼는지도.
“확실히 잡힌 놈들이 교황청이 신경 쓰지 않을 놈들이군.”
역마들에, 청의 기사, 견습 기사들이다.
금의 신앙으로서는 굳이 인력을 보낼 가치를 못 느끼는 존재들. 구조대를 보내는 비용보다 11명을 그냥 먹히게 하는 게 차라리 싸게 먹힌다는 의미였다.
“청이 결국 뒤치다꺼리한 느낌인가.”
그러나 역마들은 무슨 생각인지 쓰게 웃었다.
“그렇지만도 않을걸요.”
“뭐?”
어째서일까. 그들은 아까부터 아이작이 상상도 못할 큰 공을 세웠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생존자들 중에 어린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꼬마애?’
얼핏 9살 정도일까. 그 아이는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반짝반짝, 선망의 눈으로 아이작을 보고 있다.
“저 아이가 누구인지, 저 아이가 가진 물건이 뭔지 아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함께 잡혀있던 저희도 듣고 놀랐으니까요.”
“뭐? 누군데? 견습기사…치곤 너무 어리고, 기사의 종자 아냐?”
그 말에 청의 상급 기사가 어째서인지 안절부절못하며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마치 이걸 말해도 되나 난색을 표하는 얼굴.
“그것이. 도련님께서 화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만.”
“왜. 누군데.”
“황자입니다.”
…뭐. 인마? 누구?
“막내 황자요! 마도제국의!”
…시벌, 뭐라고??
걔가 왜 납치된 기사들 중에 있던 건데!
동시에 아이작은 아차 싶었다.
설마 마법사 놈들이 그렇게 진을 치고 있던 이유가 황자가 납치되어서였던 건가?
그리고 마도제국의 막내 황자면 이란성 쌍둥이로, 황녀와 함께 역대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재능이 특출난 아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속삭이는 청의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저쪽도 아직 황자가 납치됐던 사실은 모를 겁니다. 신분을 숨기고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습격받고 있는 걸 저희가 구해준 것이라…….”
“…마도제국 사람을 왜 구해줘?”
“그, 그러니까 화내지 마시라고……!”
아.
그러니까 한마디로 청의 신앙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단 거구만.
아, 역시 호구 신앙.
뭐, 그럴 만하다.
그리고 왜 그렇게 강한 청의 상급 기사가 잡혀갔나 했더니, 저 아이를 보호하다가 같이 끌려갔단 거구만?
“어쨌거나 기사들뿐 아니라 황자까지 구하시다니. 그것만으로도 아이작 님의 명성이 높아질 질 겁니다.”
뭐, 그건 맞지.
이미 금의 펜타곤에서 비교가 불가능한 업적이긴 하지.
그래, 그렇긴 한데……
“형님이 그 소문의 아이작 에슈아 님이십니까?!”
도대체 무슨 소문이 퍼져있길래 마도제국 꼬맹이가 이런 선망의 눈으로 보는 거지.
“신성제국 놈들은 죄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이런 분도 계셨군요!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형님!”
그래. 부지했다니, 거 다행이구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교황청 놈들은 쓰레기 아닙니까? 어떻게 자기네 사람이 납치되었는데 구조대도 안 보내고, 견습의 테스트로 낸답니까? 사실상 버린 거잖아요! 그러고도 금의 신앙은 성직자입니까?”
오, 이 새끼. 어린놈이 제법 싹수가 있네.
“그에 비하면 청은 어떻습니까! 청의 기사는 마족에게 당해 혼자가 된 날 구해줬습니다! 내가 마도제국 사람인 걸 알면서도요! 형님, 이 은혜는 꼭 갚게 해주십시오!”
아이작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래? 그럼 나좀 도와줄래?”
그리고 그 표정에 밖에 있던 슈리가 수상한 듯 다가왔다.
“야. 다들 고마워하고 있는데 너 또 무슨 이상한 짓 하려고 그딴 표정을 짓고 있어? 이 꼬마는 또 누구고?”
그러자 아이작의 입꼬리가 더욱 히죽 올라갔다.
이 꼬마가 누구인지 알면 기절을 할 거고.
“다들 고마워한다고? 기뻐하기에는 아직 이른데?”
예?
“아마 집에 가는 길에 함정이 있을 거거든.”
“뭐?! 함정이라니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그렇게 요란하게 판을 깔아둔 금의 신앙이었다. 그놈들이 잘도 우리가 임무를 성공해서 돌아오게 하겠다!
즉, 자신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미리 함정을 설치했을 것이란 의미였다.
마법사들이 쫙 깔려있던 것도, 에슈아의 넷째 숙부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어쩌면 그와 연결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리고 함정?
뭐, 높은 확률로 사고 혹은 습격이겠다만…….
아이작은 마도제국 황자란 꼬맹이를 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슈리야. 난 이제 당하고는 못 산다. 앞으로는 걸어온 싸움은 죄다 갚아줄 생각이야.”
그러자 슈리의 표정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네가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