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첫 공을 세우다
금의 펜타곤.
교황가가 직접 주최하는 시험인 만큼 금이 킹을 차지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그래…. 분명 그래야 하는데.
“청이 해낸 마도제국의 일은 너무 세지 않습니까……?”
“견습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닙니다.”
선배 사제들은 청의 팀과 아이작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의 청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물론 금이 가져온 황실의 보물도 견습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긴 한데…….”
그들은 슬쩍 금의 관람석에 앉아 있는 키나를 보았다. 무려 키나가 홀로 야만족의 소굴에 쳐들어가 가져온 것이었다.
충분히 S급에 달하는 상급 임무 수준이었다. 본래라면 상급기사가 열은 붙어야 하는 임무를 홀로 해치운 것이다.
헬라의 명예를 드높일 탈환이라는 금의 펜타곤의 취지에도 맞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사제’들이기에 잘 알았다.
‘가져온 물건의 무게가 너무 다르다.’
성직자들이란 언제 어디서나 약자를 보호하고 사람을 위해야 하는 법.
키나는 분명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물건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뿐이다.
황실과 헬라의 과거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은 아니다.
그에 반해 아이작은 어떠한가.
‘제국민인 성기사들을 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도제국과 협상을 해 헬라가 현재 직면한 문제까지 해결했다.’
아이작의 행동으로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크라샨디아의 통로가 막히거나, 통행세가 올라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교역품의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교역품에는 제국민들의 생필품목이 일부 섞여 있었다. 만일 악화가 된다면, 제국민들은 대체품을 찾을 때까지 기약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겠지.
“의도를 한 것이든 아니든, 헬라와 제국민을 위한 큰 공을 세웠네요.”
“폐하께서 직접 오실 만했어요.”
사제들의 말에 팔짱을 끼고 있는 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아니, 의도한 게 맞다.’
키나는 맹수와 같은 눈으로 아이작을 쏘아보았다.
의도한 게 아니고서야 아이작이 마도제국에 그런 협상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영리한 꼬마는 분명 알고 있던 것이다. 금조차도 팔이 절대 안으로 굽지 못할, 최고의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제아무리 금이라도 제국민을 구했다는데, 킹을 안 줄 수가 있나.’
이쯤 되면 그냥 뭐, 가불기 수준이지.
누구나 인정하는 수준이라 점수를 안 주면 금이 되레 폭탄을 맞을 판이다.
뭐, 마도 황자를 구한 건 운이 따라줬다 해도, 어떤 보상을 뜯어내냐는 전적으로 저들의 몫. 보통의 견습이라면 그냥 마도제국이 주는 금이나 받아왔겠지.
물론 조금 머리를 굴리는 놈은 헬라에 도움이 되는 걸 가져오려 했겠지만, 현재 정세에 영향을 주는 협상까진 생각도 못 한다. 그럴 배짱도 없고.
그리고 이 상황과 의미를 모를 리 없는 키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제들이 속닥거렸다.
“같은 상급 난이도라고 해도, 아이작 쪽이 더 성자에 가깝네요.”
“…쉿!”
그때 교황청 심사단이 일어났다.
최종 결과 발표의 시간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재치 있고 훌륭한 물건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해골왕의 재림이 예고된 가운데, 뛰어난 사제들이 배출된 것 같아 몹시 기대가 큽니다.”
“특히 어려운 임무를 받고도 포기하지 않고 동료들을 구하러 간 팀이 있었죠. 그들은 동기들뿐 아니라, 선배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리라 봅니다. 제 목숨을 우선시하여 동료를 배신하고 팀을 바꾼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죠.”
어느 팀을 말하는 건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금의 자리에 있던 기존 청의 팀은 얼굴을 붉혔다. 이득 때문에 청을 배신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 수 없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청이 멍청하네, 진작 팀을 옮긴 자기들이 현명하네, 끝까지 떠나지 않은 청의 가신들을 머저리 취급하며 입을 털고 다니던 그들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앞장서 청을 깎아내렸던 몰렉 백작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는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황제는 웃었다.
“그럼 결과는 나왔군.”
사실 아이작이 마도 황자를 구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걱정하긴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악랄하기 짝이 없는 그 마도제국이었다. 황자를 납치한 것 아니냐는 괜한 꼬투리를 잡지 않을까 우려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놈들이 순순히 물건 반환과 크라샨디아의 통행료를 받지 않겠다고 할 줄이야.
‘지금쯤 외무대신이 좋아서 방방 날뛰고 있겠군.’
오랜 기간 동안 외무 건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으니, 아이작을 보자마자 예쁘다며 헹가래를 할지도 모른다.
특히 마도제국은 상대가 뭘 제시하든 교섭할 마음이 전혀 없는 놈들인데.
아무튼 아이작이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헬라로서는 몹시 큰 이득.
황제가 최종 판결을 내렸다.
“금의 펜타곤은 청의 승리요.”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회장에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의 사제들은 멘붕인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야, 청이 또 이겼어!”
“미쳤다. 금의 펜타곤에서 다른 팀이 킹을 딴 건 처음 아닙니까?”
“펜타곤 역사상 최초다, 인마!”
“심지어 청이? 금의 펜타곤에서? 푸하하하! 돌았네!”
금의 펜타곤은 여러 의미로 화제가 되었다.
펜타곤은 이제 단순히 견습들의 시험이 아니게 되었다. 원래도 화제였지만, 올해는 그냥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화제의 주인공들은 크으, 입을 틀어 막고 울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단 것이다.
“야아 들었냐? 지금 어딜 가도 사람들이 다 우리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
“아이작, 이 미친 놈. 이 예쁜 놈의 자식.”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라, 이 형들이 다 사주마.”
아니, 언제는 나가서 객사하라며?
나가 죽으라며?
누워서 턱을 괸 아이작은 사탕을 쪽쪽 빨면서 형들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청의 팀은 입꼬리가 귀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듯했다.
“설마 마도제국이랑 협상까지 했을 줄은 몰랐지, 이놈아!”
그 말에 아이작은 흐흐 웃었다.
그래, 솔직히 자신도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지.
‘뭐, 알고는 있었지. 금에게 킹을 뜯어내려면 마도제국과 얽힌 일을 해결하는 급의 공을 세워야 한다는 걸.’
누구나 인정할 만한 급이 아니면 안된다. 금의 편파 판정이 일어날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존자 구출 외에도, 일부러 더 큰 사건을 만들어야겠다고 계략을 짜고 있었고.
[뭐, 마법사들을 꾀어내 인질 자작극 하려고 하신 것보단 천만 배 낫네요.]
닥쳐, 새끼야.
‘그래도 확실히 마도제국 황자 놈이 도움이 되긴 했어.’
사실 마도제국 황자놈은 보상을 주겠다며, 원하는 걸 말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그럼 분쟁지역에서 빠져달라. 통행료를 요구하지 말라고 했지.
그랬더니 히베리우스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고작 그걸로 만족하십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고작은 아니지만,
-엉.
-하지만 그건 제국에 좋은 거지, 형님한테 좋은 게 아닌데요?!
푸웁, 괜찮단다. 아가야.
어차피 성자가 되려면 공훈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깟 황금 몇 푼 받고 입을 싹 씻는 것보단, 제국의 위상을 올려놓는 게 장기적으로 천만 배 이득이었던 것이다.
뭐, 그걸로는 너무 대가가 부족하다고 하길래 할 수 없이 아이작은 빼앗아간 헬라의 물건까지 내놓으라고 했었다.
그마저도 황자는 아직 부족하다며 더 요구하라고 했지만, 아이작은 됐다고 했다.
너무 많이 받아처먹어도 나중에 뜯… 받아내기 힘들어진다.
전직 왕이었기에 잘 알았다.
원래 이런 건 주고받는 무게가 중요하다. 무게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도, 저쪽은 그걸 빌미로 더한 걸 요구해온다.
그리고 앞으로 더 뜯어내려면 상대를 감질나게 해야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의아한 건 있었다.
‘내가 요구한 게 아직도 부족하다고 할 정도면, 그 황자 놈… 마도제국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놈이란 거야?’
막내 황자라길래, 가치 있어 봐야 얼마나 되겠나 싶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신분이 높은 듯했다.
목숨값으로 그런 걸 턱턱 내놓고, 마도제국도 턱턱 받아들인 걸 보면…….
‘설마, 황위 후계권을 가지고 있는 놈인가?’
뭐, 지금 못 받아도 상관은 없었다.
마도 황자는 헬라 황태자를 만나러 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으니까.
-음, 역시 이걸로는 좀 부족하오. 형님. 원하는 게 있으면 나중이라도 좋으니 더 말하시오!
분명 그렇게 말했으니, 뭐!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첫 공도 세웠다!’
이제 남은 펜타곤은 청과 흑! 두 개뿐!
설령 흑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청에서 킹을 따면 처형식에 가는 건 확정이다. 아니, 사실 지금도 거의 확정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청에서 킹?
“찌발. 누워서 떡 먹기지!”
어디 그뿐인가?
이번 펜타곤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청의 가주가 후계 수업을 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니들 나한테 짤보여야해. 푸헿!”
그리고 그 무렵이었다.
청의 뒤풀이 회장에 낯익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청의 기사들과 견습들도 놀라 예를 차렸다.
“헉…! 각하!”
“일라이 님!”
그러나 청의 가주는 예를 차리는 이들에게 쉿, 검지를 세웠다.
“손자를 보러 온 것뿐이다. 신경 쓰지 마라.”
청의 가주는 정말 아이작을 찾아온 것이었다. 손자를 보러 온 일라이는 티내지 않았지만, 몹시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저 살아서만 돌아오라고 했거늘.’
뭐, 오는 길에 몰렉 백작과 마주쳐서 면박까지 제대로 주고 왔지. 몰렉 백작의 표정을 아이작이 봤어야 했는데.
게다가 설마 그 역마들까지 길들여서 올 줄은 몰랐다.
역마의 대장이 아이작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말에, 교황청 사제들의 얼굴이 얼마나 볼만했는지.
아무튼, 청의 명예를 위해 네가 죽을 필요는 없다고 했었건만. 이런 결과를 내주다니.
물론 예상치 못한 건 마도 황자였지만 말이다.
그 맹랑한 꼬맹이는 청의 가주를 직접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청의 가주시여. 손자분을 마도제국에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구워삶아 먹으려는 게 아니면 상관없다.
-그러면 아이작 에슈아 님을 형님으로 모셔도 되겠는지요?
-꺼져.
뭐, 대충 황자의 목적이 훤히 보이긴 했다.
‘아이작이 마음에 들었나.’
한마디로 성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미리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다.
‘하물며 마도제국은 드래곤을 탐낸다.’
드래곤 중 유일하게 교류 중이지 않은 신성드래곤을 미치도록 얻고 싶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자는 신성제국을 부강하게 할 존재.
‘성자를 빼앗아 헬라의 힘을 낮추고, 신성드래곤도 뺏고 싶은 거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성자가 될 것 같은 녀석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리라.
‘뭐, 그것도 전부 아이작이 성자가 돼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일단 추기경, 즉 가주 자격을 획득해야 가능하겠지.
그래서 가주는 아이작을 찾아온 것이었다.
약속대로 후계 수업… 아니, 후계 자리를 주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인성이 매우 걱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부분은 교황청에서 지내면서 어느 정도 고쳐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저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저의 사람이 될 팀원을 지키고, 작은 것들을 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좋다. 충분히 청의 교리에 맞는 인재가 되지 않았는가.
‘그래 그 아이라면 이제……’
가주는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아이작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ㅈ…….”
“푸헿! 가주 자리? 까짓것, 별거 아냐! 이빨만 까주면 돼! 가주 놈이 좋아할 몇 마디만 해주면 껌이라고! 동료 좀 아끼는 말 좀 해주고, 교리나 몇 마디 읊어주면 돼!”
“캬, 이 꼬맹이 놈, 그래, 맞다. 네 말이 맞… 헉.”
청의 팀은 문 쪽에 있는 청의 가주를 보곤 얼어붙었다.
“아, 아이작.”
“왜? 내 말이 틀릴 거 같아? 그 전에 청의 신앙에서 킹을 따는 것도 걱정 마! 야, 우리 청이야.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킹을 안 줄 것 같아? 가만있어도 준다! 캬! 이게 적폐지! 완전 개꿀이라니까…. 뭐야, 왜 말이 없어, 형들?”
왜겠냐.
땀을 뻘뻘 흘리는 청의 팀은 대답 대신 뒤를 가리켰다.
“뭐야, 왜끄… 푸엑.”
고개를 돌린 아이작은 먹던 사탕을 떨어트렸다. 그러곤 드물게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헉. 할아뿌지, 언제……?”
아이작의 뒤에 서 있는 청의 가주는, 웃음기를 지웠다.
“…아무래도 후계 자리는 너무 일렀나 보구나.”
“아니, 할부지. 그게 아니라!”
“…가정교육 수준으로는 택도 없겠어.”
“?!”
아니, 억울해!
그보다 낌슈리?
할아버지가 오면 말을 해줘야지, 찌발! 이 새끼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