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봤냐, 봤냐고! (1)
그래, 적(赤)가.
아이작은 원래부터 이놈들을 마음에 안 들어 했다.
왜냐고?
동료를 의심하는 성향이 짙다 못해 그게 주된 목적으로 변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애초에 좋아할 수가 없지?
애초에 해골왕이 성자가 되어 이 나라를 꿀꺽할 셈인데. 전직, 현직 마왕으로서 이단사냥꾼들을 좋아하면 안 되겠지?
뭐, 한마디로 천적이란 의미였다.
다른 이유로는 지들이 교황이 되겠답시고, 에슈아를 은근히 넘보는 눈빛이 거슬렸고 말이다.
괜히 적가의 수장 놈이 관심을 보일 때 꺼지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거 봐. 역시 사람 빡치게 하잖아.
‘이놈들이 감히 싸가지 없이 불시에 신앙심 검사를 해?’
[예고를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엄청 달라지지! 검사 전에 눈알을 뽑느냐, 검사 후에 뽑느냐가 달라진다고!’
[…차이가 있는 겁니까?]
엄청 크다.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쨌거나 마음에 드는 놈들은 아니었다.
‘개놈들. 청의 사람들은 호구일지언정 통수는 안 치는데.’
[…통수 치지 않았습니까? 사제 시험 떨어졌다면서, 집에 가두려고 했잖아요.]
아, 그러네. 역시 청도 같이 멸문시켜야겠다.
아이작은 밉살맞게 손을 내미는 나이저를 보았다.
“자, 어서 내놔. 추기경의 패.”
나이저가 다가오자 아이작은 슬쩍 물러났다.
뭐, 어차피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 실눈 때끼. 어쩐지 감옥에 순순히 보내준다 했더니, 역시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다른 신앙의 성물이라면 거의 모든 걸 파악하고 있지만, 하필 적가는 인간을 사냥하는 놈들이라 마족이랑은 잘 안 붙었거든.
‘도망은… 불가능하겠군.’
적의 펜타곤 때야 놈들을 쓰러트렸지만, 그들은 견습이었고 엄연히 시험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놈들도 실전이 아니기에 성법의 범위와 위력을 낮춰서 썼었고, 맨몸이었지. 목표 자체도 목걸이 뺏기였을 뿐, 놈들의 특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신앙심에 따라 로즈골드빛 장미색이 변하는 패라.
골치가 아프긴 했지만, 아이작은 슬쩍 코웃음을 치며 패를 보았다.
뭐, 그래. 영혼은 썩어도 몸은 성자였다.
그깟 신에 대한 신앙심? 만땅이지!
그리고 내가 그간 얼마나 성전을 읽어댄 줄 알아?
봐, 역시 별문제 없…….
[어유, 시커메라.]
…시커멓네. 장미가 아주 시커메.
내 미래처럼 아주아주 시커메!
하지만 뭐, 사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이깟 간이 검사 따위.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참고일 뿐이지, 심문에 끌고 갈 정도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걸 순순히 보여줄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너 같으면 줄 것 같냐?
아이작의 말에, 나이저는 어째서인지 확신에 찬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역시 결과가 말해주고 있구나? 왜. 검붉은색이기라도 하냐?”
도발하는 눈빛에 위스퍼는 건방진 새끼라며 굉장히 화를 냈다.
[와, 저 새끼가 주인님을 완전 개무시하네? 완전 답도 없을 정도로 씨꺼먼데?!]
내 보기엔 널 씨커멓게 태워야겠구나.
하지만 뭐, 그래. 악신도 완전 블랙까진 안 나오는데, 설마 블랙이 나올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이 패를 살랑살랑 흔들며 얄밉게 웃었다.
“이건 못 준다.”
“그래! 역시 찔리는 구석이 있…….”
“나한테서 이걸 가져가놓고, 청이 분실했다고 우기려고?”
“그래 분…….”
…뭐?
나이저는 벙찐 얼굴로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은 큭큭 웃었다.
“왜? 이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추기경의 패잖아? 가져가놓고 못 받았다고 우길 셈이잖아? 청한테 책임을 지게 하면 그만 아냐? 청한테 막대한 책임과 보상금을 뜯어낼 수 있잖아!”
그 말에, 듣던 적의 사제들과 이단심문관들이 기겁하며 쳐다보았다.
…생각한 적 없는데요?!
그보다 저 새끼는 그딴 생각을 했단 말인가?!
‘…무슨 양아치 같은 발상을!’
도대체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딴 말을 하지?
나이저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듯 성큼 다가왔다.
“장난해? 여기 보는 눈이 몇인데, 받은 걸 안 받았다고 하겠어? 됐으니까 내놓…….”
“에에엥? 얘네 다 니들 식솔이잖아? 당연히 입을 맞춰야 하는 거 아냐? 너 바보 새끼야? 대가리가 없셔?”
아이작에게 뻗던 나이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며 주먹으로 바뀌었다.
적의 펜타곤 때부터 느끼는 거지만, 저 새끼…! 진짜 사람 열 받게 하는데 뭐 있다!
결국 패를 빼앗으려던 나이저는 됐다는 듯 손을 거뒀다.
“그래! 패는 됐다!”
아이작은 풉 웃었다.
역시 이렇게 하면 대놓고 패를 가져가기 힘들어할 줄 알았다. 그리고 이제 아무렇지 않게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엑.
아이작은 눈앞에 치솟아 오르는 붉은빛에 혀를 씹을 뻔했다.
눈을 번득인 나이저는 벽면을 짚으며 뭔가를 불러오고 있었다.
무기…는 아니다.
나이저의 소환에 응한 건지, 벽면에서 성법으로 불러낸 구조물이 튀어나왔다.
<적(赤) 비전- 피의 재판>.
쿠구구!
돌로 된 재단이었다. 석상과 바닥이 붙어있는 구조물로, 가시면류관을 쓴 여신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재단을 본 순간, 아이작은 드물게 움찔했다.
‘판별대?’
저건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작이 제국의 정보를 파악할 때, 중요한 역사에서 몇 번, 아니 수십 번을 보았으니까.
≪선혈의 누≫.
통칭 ‘운명의 판결대’.
이단심문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심판대로, 간이 검사가 참고 수준이라면, 저건 그냥 낙인대이자 확정 판결대였다.
간이 검사로 수상함이 감지되어 용의자 신분이 되면, 저기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전장에서 인간인 척하는 마족을 잡아내는 데 쓰거나.
그런데 사실 귀족한테는 저걸 들이밀었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이단으로 확정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작 정도의 가문에게 저걸 내민다?
‘저새끼 미쳤나?’
어지간히도 확실한 게 아니면, 저쪽도 공격당하기 딱이었다. 오히려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 역공격을 당할 텐데.
[확실하긴 하잖습니까.]
그래, 찌발, 그게 문제지!
‘도와줄 놈은…….’
있을 리 없구나.
그런데 그때, 아이작을 부하에게 데려다주었던 적의 사제들이 다가왔다.
“걱정 마십시오, 공자님.”
“!”
오! 이놈들, 스카웃 제의를 듣더니 도와주려는 건가?
하긴, 얘들은 그냥 교도관 일을 하는 적의 사제들이었다. 저 싸가지 없는 이단심문관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공자의 책임감과 심성이라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무죄를 증명하시고, 그걸로 적을 압박하세요!”
이놈들아. 지금 기사단장 자리에 눈이 멀어서 본인 신앙을 팔아먹냐?
그전에 당당하게 무죄를 증명 못 하거든?
빼도 박도 못 하게 이단 확정이거든?
‘칫, 적의 구역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그럴 때 나이저가 올라가보라며 석상을 가리켰다.
“신앙심이 있다면 여신이 눈을 감고 회개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이단 확정이면 눈물은커녕 눈을 부릅뜰 거다. 사람의 가죽만 뒤집어 쓴 놈들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없거든!”
즉, 석상이 눈을 뜨면 묻지도 않고 이단심문에 끌고 간다는 의미다.
“자, 너도 성자 후보면 당당하게 올라가보라고!”
아이작은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 말을 뭣하러 들어줘야 하는데?”
“너도 청에서 이름이 지워진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올라가보라고.”
그 말에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청에서 이름이 지워진 사람?’
하지만 아이작은 곧 상종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는 듯, 돌아섰다.
물론 결과가 좋다면 오히려 이걸 빌미 삼아 적을 공격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피하는 게 나으니까.
“뭐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증거도 없이 내 앞에서 저걸 꺼낸 것만으로도 넌 에슈아한테 큰 실수 한 거니까.”
아이작이 평소답지 않게 자리를 피하려 하자, 나이저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역시!
저 건방진 꼬마가 피해?
위험 부담은 크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신앙심에 문제가 있는 거다!’
나이저가 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을 하는가.
-에슈아가 펜타곤에서 놀라울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네요. 이대로면 에슈아가 날아오르겠어요.
-지금 안 꺾으면 못 잡겠죠. 떨어트릴 방법이 있나?
-그러고 보니 신앙심이 낮다는 소문이 있다던데.
-신앙심 문제가 있으면 교황은 못 되는 거 아닌가요?
나이저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같은 성자 후보로서 저놈은 반드시 떨어트리고 간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 눈빛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가 저걸 꺼내봤자 뭐 어쩔 거야.
‘저깟 것 응해주지 않으면 그… 어?!’
갑자기 허공에 붕 들린 아이작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던 그가 고개를 돌렸지만, 뒤에는 자신을 번쩍 안아 들고 있는 나이저가… 뭐?!
시발, 뭐?! 들려?
이 새끼한테 들려어?!
아이작은 50센티미터는 바닥에서 들린 상태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10살짜리와 16살의 체구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아이작은 물에서 갓 나온 민물장어처럼 팔딱거렸지만, 나이저는 큭큭 웃으며 재단으로 다가갔다.
“발버둥 치지 마. 1초면 끝난다.”
아뉘이! 찌발, 이 버러지 같은 성직자들 같으니!
이거 아동 학대야! 학대라고!
그리고 아이작을 재단 바닥에 톡 내려놓자, 재단에 문양이 떠올랐다.
그 뒤론 아이작은 힘을 쓰기는커녕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분명 도망 방지용이겠지.
위스퍼도 드물게 당황했다.
[주인님!]
온몸을 샅샅이 감시하기 시작하는 성력에, 아이작도 드물게 당황했다.
아니, 이거 진짜 위험해.
진짜 X 되겠어!
당황하는 아이작의 얼굴과 확신에 찬 나이저의 표정이 교차했다.
‘자. 여신상이여, 눈을 떠라! 이거면 성자 후보와 청을 없앨 수 있다!’
그래, 없앨 수…….
주르륵.
…없앨 수?
“오오! 석상에서 눈물이!”
뭐라고?!
나이저가 벙찐 얼굴로 석상을 확인했다. 여신상은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이저의 표정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 또 봐도, 눈물이다.
아니, 그냥 눈물이면 말을 안 하지.
‘…피눈물?’
신앙심이 있는 자가 재단에 서면 여신상이 눈물을 흘린다. 보통은 맑은 눈물이지만, 신앙심이 높을수록 진해지고, 더 지고지순한 경지면 피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피눈물은 추기경들께서나 가능하신 것 아닙니까?”
당연히 이단심문을 생각하고 온 이단심문관들도 얼어붙었다.
하지만 정작 당황스러운 건 그들이 아니었다.
‘…찌발. 저거 왜 울고 있는데??’
아이작의 동공이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작도 저 석상에 대해서 잘 알았다. 저 여신상은 조작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미 추기경의 패로 검은색이 뜬 이상, 저 여신상도 눈물은커녕 눈을 부릅떠야 했다. 이단으로 판별해야 한단 의미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신앙심이 최대치로 뜰 리가 없는데? 그럴 때 아이작은 품속에 있는 기척에 아차 싶었다.
‘설마 이놈이냐??’
설마 스켈레톤의 신앙심이 잡힌거야?!
[하긴. 신앙심 0에 100을 합치면 100이죠.]
그게 가능해?!
[저 판결대가 꼭 인간 전용은 아니니까요. 저희 입장에서 주인님은 뭐… 이미 10계위셔서, 초월 계위를 바라보시는 분 아니십니까. 마왕님 정도면 신앙의 대상이죠.]
아이작은 신이 난 듯 푸웁 웃었다.
‘그래, 그렇지! 신들도 신앙의 대상으로 봐주는데 마왕이라고 안 되겠어?’
[아니면 성자의 몸뚱이 영향일 수도 있지만요.]
어쨌거나 좋구나! 신앙심을 어떻게 속일까 했더니, 이걸 응용하면 되겠어!
멍청한 성직자들! 이걸로 이제 니들은 껌이다!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이단심문관들 전원의 싸늘한 시선이 나이저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신 거 아니었어…?”
“그보다 피눈물은 나이저 도련님도 아직 불가능하지 않아……?”
그 속삭임을 들은 나이저는 얼어붙었다.
결국 이럴 리 없다며 나이저가 아이작을 붙잡았다.
“너 잠깐, 다시 해봐! 성녀님의 물건이라도 들고 있는 거 아냐?!”
“푸헿! 뭐래, 소지품은 감옥에 들어올 때 니들이 전부 압수했잖아! 신체검사도 니들이 했으면서!”
그런데 그때였다.
나이저의 힘에 아이작이 뒤로 밀려나자, 일순 아이작의 망토에 붙어있던 스켈레톤이 재단 바닥 범위에서 밀려났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번쩍!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신상이 눈을 부릅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