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봤냐, 봤냐고! (2)
“!”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여신상이 눈을 사납게 떴다. 마치 마족을 찾아냈다는 듯, 그리고 건방진 이단에게 벌을 주려는 듯이.
그 눈 뜬 모습에 재단에서 벗어나던 아이작은 드물게 움찔했다.
‘시바, 안 돼……!’
이거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걸린다.
이단 심문으로 넘어가게 되면, 성자고 교황이고 자시고 바로 처형이야!
그 모습을 본 나이저의 눈도 동그랗게 변했다.
저건 신앙심 0, 즉 이단이라는 증거!
자신도 모르게 나이저는 무기를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
너무 한순간이었고, 아이작이 재단에서 떨어지자마자 석상이 다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
눈물도 사라져 있었다. 마치 보았던 모든 게 환상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나이저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야! 너희들! 방금 봤……!”
봤냐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 일을 어떻게 할까, 회의 중이었다.
“야! 너희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니들, 방금 못 봤어? 저거!”
“아 저거요? 똑똑히 봤죠.”
“그래! 봤으면 당장…….”
“도련님이 이단이라고 해서 왔더니, 판결의 석상께서 성스러운 피눈물을 주룩주룩 거하게 흘리셨죠.”
“나 참,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 하십니까?”
“…청의 사람이 잘났다는 걸 증명해준 꼴이잖습니까. 그래서 회의 중인 거 안 보이세요?”
이런 망할! 본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거야?
‘타이밍 진짜……!’
나이저는 답답한 듯 외쳤다.
“그게 아니라! 방금 석상이 눈을 떴다고! 피눈물이 아니라, 눈을!”
“예에? 적가에 마가 낀 것도 아니고. 결과가 왜 중간에 바뀌어요!”
“청을 띄워주시더니, 이제 적을 후려치기까지 하시네…….”
아오! 새끼들이 믿지를 않네!
열이 뻗친 나이저가 아이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재단에 다시 올려놓으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이저가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야! 꼬맹이! 한 번만 더 검사해! 분명 내가 봤어!”
나이저의 눈빛에 아이작은 미쳤냐는 듯 푸웁 얄밉게 웃었다.
“왜? 치사하게 무슨 조작이라도 하려고?”
솔직히 아이작도 십년감수를 하긴 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여신상이 눈을 뜬 건 아이작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사람도 이놈 하나뿐인 것 같고.
[오히려 이득이 됐군요.]
그래. 오히려 심판대에 올려준 덕분에 앞으로 적에게서 당당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만큼 특수한 상황은 놈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마 생각이나 하겠어? 스켈레톤이 감옥에 딸려 들어왔으며, 그 스켈레톤의 신앙심이 잡힌 것으로도 모자라 결과 값도 중간에 바뀌었다고?
그리고 기껏 딸려온 행운을 이용 안 할 아이작도 아니었다.
“재검사는 무슨 재검사야. 이미 봤잖아! 피눈물 쏟는 거 봤잖아! 왜에에? 너는 올 수 없는 경지라 질투 나냐?”
“아니, 분명 봤어!”
나이저는 이를 갈았다.
저놈은 이단이 확실했다. 힘으로라도 끌고 가서 재검사를 해주마!
나이저는 도망가려는 아이작을 붙잡으려고 했다. 상대는 기껏해야 어린애. 그리고 이곳은 적의 본거지였다.
지까짓 게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못 나가게 해라!”
“도련님?”
나이저의 사나운 음성에 이단심문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돌아간 나이저가 아이작의 멱살을 강제로 잡으려 했다.
“새끼가, 어딜 도망…….”
그러나 그때였다.
턱!
“!”
누군가가 나이저의 팔을 단호하게 붙잡았다.
아이작은 물론, 그곳에 있는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할부지!”
나이저의 팔을 잡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청의 가주 일라이였다. 아무래도 손자가 다치는 광경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걸까.
팔이 잡힌 나이저는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얼어붙었다.
“이럴 거 같아서 와봤는데, 역시나였군.”
목소리가 살벌하다.
그러나 뒤따라온 릴라이는 한숨을 푸욱 쉴 뿐이었다. 이럴 것 같아서 오긴 무슨…….
‘…아니잖아요. 모르셨잖아요.’
적의 추기경이 남의 손자에게 사탕을 줬다고, 당신도 빡치셔서 ‘사탕’을 사러 가셨잖아요.
릴라이는 청의 가주의 뒷짐 진 왼손에 들린 인형을 보았다. 아이작이 좋아할 만한 ‘해골왕 처형 에디션-다이아몬드 버전’이다.
아무튼 인형을 사가지고 왔는데, 아이작에게 몰래 붙여둔 청의 기사가 급히 소식을 알려왔다.
-가주님. 큰일입니다! 지금 아이작 도련님이 계신 감옥으로, 적가의 3남과 정규 이단심문관들이 향하고 있습니다.
정규 이단심문관……!
그들이 움직인다는 건, 누군가를 털겠다는 의미였다.
하물며 아직 적가의 가업을 잇지 않은 적가의 3남이 함께해? 그럼 높은 확률로 상대는 아이작이겠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예상이 맞았다.
나이저의 팔을 꽉 잡고 있는 가주 일라이의 눈썹이 드물게 꿈틀거렸다.
“적하고는 이야기를 긴히 나눠봐야겠어.”
당장이라도 팔을 꺾고 얼굴이라도 갈겨버릴 것 같은 모습에, 릴라이가 옆에서 말렸다.
“아버지. 후계자를 치시면 일이 커집니다. 애초에 어른으로서 할 도리도 아닙니다. 일단은 아이작을 데리고 돌아가서, 어른답게 적에게 정식 항의서를…….”
그때였다.
릴라이의 말 때문일까. 그에게 다가온 아이작이 릴라이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쭉부님…….”
“응? 아이작,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픈 것이냐?!”
아이작은 일부러 흐느끼는 척을 하며 나이저를 가리켰다.
“쟤가 아이작 때려쪄여. 훌쩍.”
빠직, 눈이 돌아간 릴라이는 나이저의 멱살을 잡았다.
* * *
“숙부님, 그만! 그만!”
슈리와 적의 사제들은 릴라이의 팔과 다리를 붙들었다.
눈이 돌아간 릴라이는 벌써 나이저에게 딱밤을 수십 대 놓은지 오래였다.
차마 폭력은 휘두를 수 없어 참고 참아서 나온 결론 같지만, 8계위 성기사가 놓는 딱밤이 과연 평범할까……?
그 증거로 나이저는 이마를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성력을 안 실어서 그 정도지, 실었으면 정말로 이마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이단심문관들은 또 그들대로 릴라이를 끌어내려고 달라붙었다.
“릴라이읽! 니가 8계위 성기사면 다냐!”
“한 대도 아니고! 몇 대씩이나 우리 차기 가주님의 이마를 날려?”
“어이고! 니들이 언제부터 후계자를 신경 썼다고 난리야! 꺼져! 난 조카의 일이거든!”
그쯤 되자, 슈리는 뒷목을 잡았다. 이렇게나 개판이 났는데, 정작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은 사탕을 냠냠 먹으며 관람 중이고!
“아이고 경치 조타아.”
“아이작! 전부 너 때문이잖아! 숙부님 좀 말려!”
“내가 왜?”
왜? 왜에??
아이작의 실실 웃는 얄미운 얼굴에 슈리는 혈압이 올랐다.
‘아오! 저게 그 사이에 십사육마를 먼저 보러왔을 줄이야!’
사실 슈리는 교황청에서 다른 견습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다름 아닌, 십사육마 처형 건에 대해서였다.
처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또 십사육마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공부했다. 뭐, 결론은 ‘십사육마와 홀로 마주하면 무조건 죽는다’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그랬는데!
-아이작이 지금 혼자 십사육마를 보러갔대!
-이단심문도 같이 당하고 있대!
시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견습들은 물론, 강의하던 선배 사제들 모두가 뒤집어졌다.
-적의 추기경은 미치셨어요? 애한테 십사육마와 대면시키시다니!
-어른들도 마기에 이기지 못하고 앓거나 죽어요!
아이작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하게 달려왔다.
그런데 이 모양이다.
“이 망나니 놈아! 그걸 왜 보러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그리고 처형식에 참가한다고 해도 우린 지켜보는 것 정도야! 집도하는 건 전문 흑의 처형관이라고! 해골왕의 부하가 얼마나 위험한데……!”
그러나 아이작은 귀를 후볐다.
‘처형은 무슨. 그 십사육마는 내가 탈출시킬 거다, 인마.’
수갑을 풀어낼 도구를 건네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차 작업이었다.
가장 시간이 오래걸리는 걸 미리했을 뿐이고, 진짜는 목에 걸린 ‘교황의 목줄’이다. 그것만 풀어주면, 부하는 수갑도 이미 풀려있겠다, 쉽게 달아나게 되겠지.
그래서 처형식에서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 서야 한다는 건데…….
“그보다 이단 심문이라니…! 너 이제 처형당하는 거야?!”
왜 당연히 처형당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이 때끼가.
딸랑이로 한 대 맞은 슈리가 핏대를 세웠다.
“니가 신앙심이 정상일 리 없잖아!”
그 말에 아이작과 친해진 교도관 사제가 커흠, 기침을 했다.
“무례한 말씀이시군요. 공자께서는 아주 멋지게 통과하셨습니다만!”
“뭐?”
“이야, 그런 눈물은 처음 봤습니다.”
그 말에 슈리는 물론 릴라이도, 청의 가주도 모두 움찔했다.
…눈물이라니?
“그게 무슨…….”
아이작은 바로 나이저를 가리켰다.
“쨰가 무서운 여신님 석상 불러냈셔.”
“뭐야아아?!”
그게 뭔지 바로 눈치챈 릴라이는 다시 한번 나이저의 멱살을 잡았다.
“이 녀석이 다짜고짜 아이작한테 운명의 판결대를 꺼내?”
“무서운 피 색 눈물이 흘러서 놀랬쎠.”
“이 자식아! 아이작이 피 보고 놀랐다잖아!”
“숙부님, 숙부님!”
슈리가 그를 잡아 말렸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눈물이라니!’
슈리도 그 판결대에 대해서는 잘 안다. 하물며 피눈물이라니……?
그런데 그때였다.
“감옥에서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게 누구신가.”
“!!”
감옥 로비에 장신의 적발 남자가 나타났다. 부하들을 대동한 적의 가주이자 추기경인 리온 세페트였다.
적의 가주가 나타나자마자, 청의 가주 일라이가 바로 눈을 부릅떴다.
“너 이 새끼, 잘 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마주선 일라이가 두목 늑대처럼 험악하게 눈을 번득였다.
솔직히 멱살만 안 잡았지, 이미 머리채를 잡고 있는 광경 같다.
“이 새끼가 그냥 십사육마만 보여주면 될 것이지. 같잖게 신앙 검사를 해?”
그 살벌한 기운에도 적의 추기경은 전혀 밀리지 않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해골왕의 부하를 만나러 간다는 것도 수상한데, 하물며 요청을 한 게 청의 사람이었습니다. 청한테는 엄격해도 될 것 같은데요? 신앙 검사야 필요한…….”
“운명의 판결대가 필요한 거라고? 지금 싸우잔 거냐?
“아…. 석상까지 꺼냈습니까?”
적의 가주는 슬쩍 시선을 피하는 나이저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큭 웃었다.
“뭐, 그거 죄송하게 됐군요.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
“그걸로 입 닦으려고?”
“예?”
“석상이 ‘피눈물’을 흘렸다잖아. 애먼 사람을 건드려놓고, 고작 미안하다 한마디로 땡을 치신다고? 그 빌어먹을 모가지가 아직 붙어있을 만한가 보지?”
참, 추기경다운 고운 언변을 쓰면 좋겠는데.
어딜 봐도 사죄와 함께 적절한 보상을 내놓으라는 협박에, 적의 추기경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뭐, 괜히 이걸로 언쟁을 펼쳐봐야 적이 불리해지는 건 사실이다.
“예. 청에는 그만한 보상은 해주죠.”
열 받는다. 청만 좋은 일을 해준 셈이니 당연히 열 받았다. 하지만 더 열받는 건, 청의 가주의 얼굴이었다.
실제로 청의 가주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입가가 씰룩이고 있다. 내버려두면 어깨가 아주 하늘까지 승천할 것 같다.
뭐, 그것도 그럴 만하긴 했다.
고작 10살짜리 손자 놈이 ‘피눈물’이라니!
이건 역사에 남을 기록이었다.
손자가 예쁘지 않을 리가 없다.
하물며 아이작의 신앙심을 걱정하고 있던 참이라면 더더욱.
‘그간 신앙심 바닥이라고 걱정했는데.’
아이작을 보는 일라이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뭐, 본래 핏줄이라는 게, 딱히 예쁜 짓을 안 해도 예쁜 법이긴 하지만.
그 기고만장한 꼴이 마음에 안들었던 걸까, 적의 추기경이 손을 내밀었다.
“됐으니, 빌려준 패나 다시 돌려주시죠.”
일라이는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사탕 먹는 아이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작을 고양이 잡듯 들어 올리더니, 곧 품속에 꼭꼭 숨겨둔 패를 노련하게 홱 빼앗아왔다. 마치 사탕을 빼앗아오는 듯한 모습이다.
“허. 같잖게 이딴 패나 아이작에게 쥐여주고.”
“오해 마시죠. 신앙심 검사를 겸한 겁니다. 워낙 잡음이 많은 아이잖습니까. 성자의 자격이 있는지 가리는 일은 중요하니까요.”
일라이도 그 말의 의미는 안다.
과거에도 하찮은 마족이 성자인 척해서 진짜 성자를 죽이려고 했었지. 그 정도로 성자의 자격 확인은 중요했고,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석상에서 최고 신앙심의 상징인 피눈물까지 쏟은 마당이었다.
“확인해봤자 곱고 고운 선혈 색이겠지, 등신아.”
그렇게 일라이가 패를 슥 내밀려는 그 순간.
“…….”
음, 그러니까.
패에 있는 장미가… 까맣… 까맣???
시발, 이게 뭐냐는 듯, 일라이의 얼굴이 티 나지 않게 굳는다. 그렇게 일라이가 패를 건네줄 생각을 안 하자, 주변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하?”
적의 추기경도 어차피 내놓을 거 뜸 들이지 말라는 듯, 짜증 섞인 손을 내밀었다.
“거, 우리도 바쁜 사람들입니다. 빨리 내놓으…….”
빠각!!!
“……?!”
적의 추기경은 제 눈을 의심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그러나 빛과 같은 속도로 패를 두 동강 낸 청의 가주가, 주먹으로 퍽퍽퍽퍽 패를 박살 냈다.
아니, 박살 내는 것으로는 부족한지, 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발로 짓밟았다. 묘하게 급해 보인다면, 착각인 걸까.
콱콱콱!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던 패의 장미는 완전히 박살 나면서 색이 빠져버렸다.
마치 신앙심 검사 따위, 한 적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추기경의 귀한 패…. 그러니까 교황께서 내려준 귀한 패가 박살… 박살?!
“각하?!”
마침내 증거를 인멸한 청의 가주는 뒷짐을 지며 슥 돌아섰다. 침을 뱉는 건 덤이었다.
“줄 건 없다 시발놈아.”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