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답도 없이 새까맣네 (1)
“뭐? 신앙심이 멀쩡했다고?”
적가의 저택.
적의 가주 리온 세페트와 부가주 네온 세페트가 마주 앉아 있었다.
네온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이단심문관을 보았다.
“정말 아이작 에슈아의 신앙심이 멀쩡했단 말이냐?”
“예…. 멀쩡한 걸 떠나서 판결의 여신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
피눈물이라면, 최고의 신앙심이란 의미가 아닌가!
‘당대 최고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지고지순한 경지인 것을.’
사실 이번에 적의 가주가 아이작의 신앙심을 노린 데에는 진짜 이유가 있었다.
왜냐고?
‘형법의 신의 지시 때문이다.’
적의 펜타곤 때, 아이작이 ‘형법의 신’의 석상을 박살 내지 않았던가. 적은 어쨌거나 그걸 막지 못했고,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덕분에 벌을 받아 적가에게 내려주신 축복 중 하나를 강제로 회수당했다.
좀 자잘한 축복이긴 했으나, 마음은 쓰린 법. 이대로 끝내긴 억울해서 부순 범인이 누구인지 따로 고했다.
그랬더니 신께 문자로 된 답신이 내려왔었지.
-그 아이를 내게 끌고 와라.
얼핏 들으면 벌을 내려주겠다는 말로 들리나, 적가는 오히려 싫어했다.
왜냐고?
-축복을 내려주마.
축복이라니!
물론 그들은 그게 ‘교화’라는 걸 안다.
그도 그럴 게, 적은 회개의 신앙. 늘 그렇듯 채찍으로 때린 후, 당근을 내리실 생각이신 것이다.
‘어린애라서 더욱 그러시는 거겠군.’
물론 적(赤)은 어린아이를 불완전한 존재로만 보는 만큼, 어디 호구 신앙 청처럼 마냥 아이를 사랑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이라면 더욱 쉽게 교화가 가능했고, 그 자체로 적의 신의 힘이 되었다.
실제로 적이 다른 신앙에서 스카우트해 올 때 많이 쓰는 방법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작 에슈아는 청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축보옥?
‘축복 한 톨도 아깝다.’
아니, 애초에 형벌의 신이면 주신급인 상급신이었다.
‘감히 청의 사람을 우리들의 주신께 보낼 것 같은가. 사치다.’
적가 사람들도 직계급들만 연을 맺을 수 있는 귀한 신이거늘.
그래서 신앙심 시험을 해서 아이작은 교화 대상이 아니라, 처형 대상이라고 할 생각이었건만.
‘피눈물이라니.’
“그놈이 성자 후보 중 최고라고 우리가 인증을 해준 꼴이 아니냐!”
그렇기에 부가주 네온은, 죄지은 사람처럼 눈앞에 서 있는 나이저를 보며 화를 냈다.
“그런데 네놈은 그걸로도 모자라 재검사를 하자고 했다고?! 네놈이 정녕 적의 사제들한테 개무시를 당하고 싶어서 작정을 한 것이냐?”
“그…….”
“닥쳐라. 넌 네가 잡아먹은 장남과 차남 대신 가주가 되어야 하는데, 그깟 일 하나 제대로 못 하고! 교황이 되어야지만 네놈이 산다는 것을 모르는 거냐?”
나이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특히 네온은 가뜩이나 가문의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영토 분쟁에, 사업에, 가신 가문의 문제에, 신앙의 이름을 빌려주고 있는 곳들이며, 대륙 곳곳에서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의뢰까지.
이 모든 것들을 조율하려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해야 겨우 돌아갈까 말까인데, 청이 기세등등하게 해?
“네놈이 성자는 물론 교황까지 되어야 적이 천하 통일을 논할 수 있는데!”
“그쯤 해.”
가주 리온의 말에, 네온은 입을 다물었다.
“참, 곤란하네. 신앙심을 확인할 수 있는 패도 사라졌고.”
리온은 애초에 석상의 판결은 믿지도 않았다.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 속에서도 몇 없었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런 놈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약간은 더러웠겠지.
만약 아이작에게 빌려준 패만 있었으면, 추기경의 권한으로 노예들의 노역장에 보내버렸을 텐데. 그걸 그렇게 박살 내버리다니.
‘성미하고는.’
아무튼 청의 가주 놈 때문에 패에 남아있던 신앙심은 확인할 수도 없고. 청의 가주의 행동이 신경 쓰이지만, 확증은 없으니까.
리온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여흥이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야.”
“!”
“그리고 공양제 때도 그래. 신의 사자들이 내려오는 만큼, 문제가 있는 아이면 바로 발각되겠지. 그러니 그때까지 얌전히 있거라.”
사실상 ‘너는 이제 닥치고 있으라’는 경고에, 나이저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아냐. 나는 똑똑히 봤어.’
한순간이었지만 분명 석상이 눈을 떴는데!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지.’
나이저는 눈을 번득였다.
“아버지. ≪공양제≫의 참가 명단은 다 정해졌죠?”
“그래. 명단엔 청의 팀이 대부분이고, 그중 아이작 에슈아도 있더구나. 너도 앞서 치른 흑의 펜타곤 경연에서 1등을 하지 않았느냐. 명단에 네 이름도 넣어줄 테니……”
“아뇨. 아이작의 종으로 넣어주십시오.”
…뭐?
부가주 네온은 뭔 개소리냐는 시선이었지만, 나이저는 확고했다.
“명단에 포함된 자들에게는 의전을 위해 몸종이 붙지 않습니까. 절 아이작의 몸종으로 넣어주십시오!”
사나운 일갈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나이저! 제정신이냐? 너 같은 아이가 왜 그딴 천하고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공양제의 몸종이라 해서 무슨 권위와 영광이 있는 줄 아는 건가? 말이 의전이지, 주인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씻기고 입히고 가장 궂은일을 하는, 사실상 하녀직과 같은 자리였다.
“하층민들이나 맡는 천한 자리란 걸 모르느냐? 공작가의 후계자가 그딴 천한 일을 한다니, 비웃음만 살 거다!”
네온의 언성에도 나이저는 물러서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면, 직접 증거를 잡는 수밖에.’
즉, 그는 아이작에게 직접 붙어 24시간 감시하며 함정에 빠트리려는 것이었다. 증거를 만들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만.
“그건 안 된다.”
“아버지!”
가주 리온의 엄포에 나이저는 억울한 듯 나섰다.
“몸종이 불명예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입니까? 그 자리에 가도 전 잘할 수 있…….”
“아니. 이미 차지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
“키나가 그 자리에 들어갔다.”
나이저는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요. 키나 베리트가 아이작의 종 자리에 가서…….”
나이저가 굳었다.
…예? 지금, 뭐라고?
* * *
청의 저택.
수도 저택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청의 가주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아버지가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건 좋은데, 틀어박혀 있는 얼굴이 문제다.
도대체 어떤 놈이 가주의 심기를 건든 건지, 집무실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다못해 집무실에 고드름이 얼고 있다고!
결국 탄식하던 아들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무슨 일이신데 아이작을 보신 이후부터 며칠간 심기가…….”
“왜 네 건 좋아하고, 내 건 싫어하지?”
………예?
…그게 무슨?
릴라이는 얼어붙었지만, 곧 가주 일라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을 보며 떠헉, 입을 벌렸다.
가주가 노려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해골왕 처형 에디션- 다이아몬드’ 인형.
사탕이랍시고 아이작에게 사 온 인형이다. 그 모습에 릴라이는 바로 이유를 눈치챈 듯 새하얗게 질렸다.
‘아이작! 설마 할아버지 선물은 안 받은 거냐!’
사실 릴라이도 가주와 함께 인형을 사 왔었다. 하지만 그건 잘 받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릴라이를 보는 일라이는 심기가 매우 불편한 듯 스타카토로 책상을 내리쳤다.
“왜 네놈이 산 ‘보석’은 잘 받는데. 내가 사준 해골왕 처형 에디션은 왜 안 받냐고. 이게 훨씬 비싸고 훨씬 더 좋은 건데.”
그 해골왕이 문제라는 걸 알지는 못하는 걸까.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릴라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그 죄송합니다.”
왜 죄송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죄송하다.
“그 건이라면, 제가 아이작에게 잘 말해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아이작이 블랙이다.”
……예?
도대체 뭐가 블랙이라는……?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릴라이와 차남 벤야민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설마 아버지께서 부수신 적의 추기경의 패 말씀이십니까? 그 신앙심 판독기가 검은색이었다고요?”
“그래. 장미가 시커멨다.”
“하지만 석상이 피눈물을 흘렸다고……!”
분명 잘못된 검사일 거란 의미였지만, 가주는 어째서인지 더욱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래서 그 뒤에 신앙심 시험을 다시 시켜봤다. 더 확실히 하려고 적의 보물고에서 신앙심 판별기를 훔쳐 왔지.”
에슈아의 수도 저택 관리자인, 차남 벤야민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훔쳐… 훔쳐 오셨다고요? 청이?
넋이 나간 형과 달리, 릴라이가 급히 물었다.
“보물고에 있던 거라면 제국의 중대사에 쓰이는 물건이니 결과도 확실하겠군요. 시험 결과는 어땠습니까? 투명한 색? 아니면 좀 진했나요? 물론 피눈물이었으니, 당연히 그 결과도 좋겠지만……”
“…블랙이었다.”
“…예?”
“답이 없을 정도로 새까멨다고…….”
그 말에 듣던 모든 이들이 멘붕에 빠졌다.
아버지가 말한 건 분명 찻잔에 입을 대게 해, 남은 물의 색으로 신앙심을 알아보게 하는 물건일 것이다.
보통은 홍차를 타서 마시게 하는데, 신앙심에 따라 조금씩 물이 진해진다.
그런데 블랙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릴라이가 의문을 제기할 만했다.
“그럼 석상이 흘렸다는 피눈물은 뭡니까! 그게 잘못 나올 리도 없고…….”
“얼마 전에 아이작이 멜리사를 만났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영향일 수도 있지.”
“아…….”
아들들은 단번에 납득했다.
그 석상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한 유명한 인물이라면 어머니 정도밖에 없다.
그쯤 되자, 그들은 왜 아버지의 얼굴이 심각한지 깨달았다.
“이제 악신을 뽑는 게 문제가 아니다. 걔가 악신이 될 판이야.”
‘커헉……!’
동시에 그들은 다급해졌다.
“그럼 지금 비상 아닙니까? 펜타곤 상위 입상자는 처형식이 있는 공양제에서 신을 소환할 텐데요!”
“적의 추기경도 그걸 노리고 있을 테고요!”
아이작이 만약 악신이라도 불러내면, 그것이야말로 명확한 타락의 증거.
“아니. 그건 내가 막았다.”
“!”
가주는 교황청 회의에 들어가서 공양제의 규칙을 아예 바꿔버렸다.
-그럼 다음 안건은 처형식 이후, 신을 소환하는 행사군요. 상위 입장자 중 누구를 추천하시겠습니까?
-저는 아이작 에슈…….
-이건 장차 교황 성하가 되실 키나가 해야지. 무조건 키나가 해야 한다. 키나가 너무 대단하지. 모두에게 모범이 되겠군. 이건 볼 것도 없어. 키나로 결정. 끝.
-…청의 추기경님?!
그렇게 아이작의 신앙심이 만천하에 드러날 위기를 겨우 모면했는데, 뭐?
설마 흑의 추기경이 그딴 식으로 나올 줄이야!
-귀찮으니, ‘흑의 펜타곤’은 견습들이 뽑는 신으로 평가하겠음.
이…! 망할 흑가 놈이!
건방지게 회의에 출석도 안 한 주제에, 남의 계획을 틀어놔? 심지어 그런 중요한 걸 쪽지로 남기고 가?!
‘기껏 아이작이 신을 안 뽑게 막아놨더니. 하필 그걸 평가 과제로 낸다고?’
물론 가주도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작을 집으로 납치하려 했다. 정체가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랬는데!
망할 흑가 놈이 보상은 또 억수로 좋은 걸로 걸어놓았다. 그랬더니 아이작이 눈이 돌아가서는-
-저 할래요!
손자 놈이 바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들은 릴라이는 뒷목을 잡았다.
“…아이작, 본인의 신앙심을 모르는 거겠죠?”
“위험한 건 미리 알려주셔야죠. 왜 신앙심에 대해 안 알려주셨습니까?”
그러자 깍지를 낀 일라이가 호랑이처럼 눈을 번뜩였다.
“알려줘서, 진짜 타락하면 어떡하느냐!”
“…….”
“아무튼… 슈리에게 아이작의 몸종 자리에 들어가라 해라. 뭐, 1부인 처형식 때는 별일 없겠지. 중요한 건 2부다. 신을 못 뽑게 해. 아이작에게 신앙심에 대해선 반드시 비밀로 하고. 이제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에슈아 전원의 목숨 문제다.”
고개를 끄덕인 릴라이도 한숨을 푹 쉬었다.
“예. 슈리도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했을 겁니다. 아이작에겐 절대로 비밀로 하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아이작이 신을 뽑지 못하게끔 몰래 움직이려고 했다.
그랬는데.
[진짜 부하를 구하신 후에, 신까지 뽑으실 생각이십니까?]
‘흑의 펜타곤 상품이 뭔지 못 봤냐? 꼭 1등 해야 해.’
그래…. 그랬는데.
‘시발 이건 뭔 상황이냐.’
공양제 당일.
처형대에 모인 견습들이 어딘가를 보며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 내 말 못 들었냐?!”
“무슨 말?”
교황의 손자와… 적가의 후계자가 싸우고 있다. 아이작을 가운데에 두고.
그러니까…….
“이 녀석의 몸종은 나라고!!”
“아니? 나야! 시발아! 내가 이미 등록했어!”
“내가 먼저 등록 끝냈거든?”
각자 지가 아이작의 몸종이 되겠다며…….
그들을 보는 슈리의 동공이 풀렸다.
‘주여…. 이건 또 뭔 경우입니까……?’
한편, 그들을 보고 있는 아이작은 딸랑이를 꺼낼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