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답도 없이 새까맣네 (3)
공양제 기간이 되자마자, 헬라를 찾는 사신들과 귀빈들이 줄을 이었다.
속국은 물론, 헬라의 인근 나라들도 부지런히 찾아왔다. 헬라와 꽤 거리가 있는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가을은 손님이 가장 많이 찾는 때라는 것이다.
“올해는 특히 기대가 큽니다.”
“예, 이번에는 뭐니 뭐니 해도 성자가 있는 기수라고 하니까요.”
성자! 헬라의 또 다른 주인인, 교황이 될 자가 아닌가!
‘누가 교황이 되느냐에 따라 정세가 좌우된다.’
원래 교황과 친분이 있는 자들, 새로운 교황을 원하는 자들, 다양한 이익 관계를 가진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만큼 공양제는 칼을 들지 않은 외교와 투자의 각축장. 헬라는 물론이요, 각 가문에게도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귀중한 자리였다.
사제들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귀빈들을 대접할 만하다.
“이렇게 성자님께 관심을 가져주시니 저희가 영광이군요. 성자님이신 키나 님을 보러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분위기를 휘어잡는 건 원래도 그들과 인맥을 맺고 있는 금의 사제들이다.
하지만.
“키나 공자가 왜 성자입니까?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
적의 사제들이 으르렁거리며 금의 사제들을 방해했다.
“예언이 내려온 거 모릅니까? 성자는 적에서 나온다고?”
“그딴 예언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만?”
“허, 우리 도련님한테 내려온 성흔이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금과 적의 사제들은 본인들이 최고라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럴 때-
“저기 사제들이 나옵니다.”
견습들이 처형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감탄했다. 특히 금가에서 귀하게 모신 사막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 저 아이들인가 봅니다.”
“오, 저 아이들이 그 유명한 차기 교황 세대인가.”
사막의 주인 라미크는 꼼꼼하게 사제들을 살폈다. 아직 앳됨이 남아 있는 이들이지만, 누구 하나 빠지는 법이 없다.
신성제국에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시 위상이 높을 만하다. 모두 신실하고 경건하며, 속세의 것을 뒤로하고 신의 종을 자처하는 모습…….
“잠깐, 저 아이는 뭡니까…?”
모두가 한곳을 보며 술렁거린다.
라미크도 목을 쭉 빼고 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유독 한 명… 목마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백금발.
사제라기엔 지독하게 세속적이며, 신의 종을 자처하는 모습치곤 지나치게 제왕적인…….
“잠깐, 저 아이, 누굴 목마로 삼고 있는 겁니까?!”
“밑에 있는 거, 적가의 후계자 아닙니까?”
“예? 적가의 후계자가 종 노릇을 하고 있다고요?!”
귀빈석이 술렁거렸다.
아니, 적가의 후계자만 그러고 있으면 또 모른다.
“뒤에서 망토를 들어주고 있는 건 교황의 손자잖아요!”
…누가 뭘 들어주고 있어?
라미크는 당황한 듯 그 기묘한 일행을 자세히 살폈다.
그래…. 그러니까 백금발의 아이가 적발 소년의 목에 올라타 있고, 고귀해 보이는 백발의 소년이 뒤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
곧 백금발 소년이 손을 까닥이자, 백발 소년이 옆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런 소년의 머리 위로 스윽 올라가는 손. 백발 소년의 머리를 팔 받침대로 쓰고 있는 모습이 참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연갈색 머리의 소년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제왕 같은 아이의 짐을 들고 따라가고 있다.
귀빈들이 신기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후보 경쟁을 한다더니, 사실은 이미 성자 발탁을 끝내신 건가요?”
라미크와 손님들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금의 사제들을 보았다.
“아, 그러면 목마를 탄 저분이 성자님이십니까? 대단하군요. 역시 신의 기운을 받아 총명하시고, 마치…….”
“저 되먹지 못한 원숭이 대가리 놈이!!!”
“예, 맞습니다. 원숭이 대가리같은 분…….”
…예?
원… 뭐요?
귀빈들은 사제들의 나라에서 절대 들을 수 없는 상스러운 욕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제들은 우르르 사라졌다.
뭐,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 *
아. 이럴 줄 알았다.
슈리는 땀을 삐질 흘렸다. 아이작의 짐을 들고 따라가는 슈리의 눈에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야만인… 아니, 사제들이 보였다.
처형장 외곽 자리에 몰려온 사제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견습 사제들이 술렁거릴 만했다.
“뭐야, 사제님들이 왜 저러시지?”
“왜 저리 급하게 몰려오셨어?”
처형 멤버들은 선배 사제들의 모습에 뭔 일이 터졌나 불안해했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막 뭐라고 손짓 발짓 하시는데?”
“뭔가 중요한 신호인가?”
“기둥을 붙잡고 흔들고 계셔……!”
슈리는 하늘만 보았다.
아아, 손님들이 있으니 차마 처형장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는데, 아무튼 아이작의 목을 조르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실제로 아이작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야! 저거 안 끌어내?!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청, 해보자는 거냐!!’
어이고, 사제 놈들. 혈색이 좋네. 혈관이 막혀 죽을 걱정은 없겠어. 건강 관리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참 다행이야.
동시에 황실 쪽에서 선발된 처형 멤버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기이한 4인방을 보았다.
“저거 그 키나 베리트 맞지……?”
“저건 나이저잖아.”
“협박받은 거야? 뭐지? 쟤 뭐야?”
뭐긴 뭐야. 아이작이 자신들을 버리고 가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나이저는 이를 갈았다.
딸랑이로 맞은 그들은 아이작을 쫓아갔지만, 아이작은 몸종 따위 필요 없다고 했다.
-날 태워줄 말과 팔걸이 그리고 옷걸이는 필요하지만.
-…….
그 말에 각각 말, 팔걸이, 옷걸이가 된 것 뿐이다.
물론 아이작은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왜냐고?
‘성자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정치력이 절반이라고.’
압도적인 실력? 좋다, 이거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게 환경이다.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빽이 없으면 언젠가는 억울하게 쓸려나가기 마련이지.
이건 해골왕 때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두면 이 광경이 손님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질 것이 아닌가?
그럼 다들 이렇게 말하겠지!
아이작이 금과 적을 휘하에 두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은 똥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슈리에게 속삭였다.
“알았어? 대외적으로 먼저 성자라고 하는 게 임자야. 뭔 수를 쓰든 얼굴을 머릿속에 박아넣는 것도 중요하다고.”
“…넌 그딴 짓 안 해도 한 번 보면 못 잊어. 새끼야.”
“역시 내 얼굴이 너무 잘생겼나?”
…이 새끼는 양심이 있긴 한 건가?
‘진짜 어떤 신이 이놈한테 뽑혀 나올지 감도 안 잡힌다.’
뭐,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지.
아직 1부라서 추기경과 교황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들이 참여하는 건 처형 후, 공물을 바치는 때였다. 그래서 자신들도 아이작의 말에 따라준 것이었고 말이다.
‘어휴, 하다못해 추기경들께서 이 모습을 봤으면… 진짜 어우, 끝장이지.’
그래, 끝장이지. 끝장인데.
“…….”
“…….”
“…….”
추기경들 전원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처형장에 나타난 청, 금, 적의 추기경 굳어 있다. 그리고 백의 추기경은 벽을 짚은 채 갸날픈 어깨를 떨고 있다.
떨고 있다못해 힘들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청의 가주가 한마디했다.
“…그만 웃지?”
“풉, 푸웁. 실례. 세 분이 똑같은 얼굴을 하는 건 난생 처음 봐서요.”
“…….”
백의 추기경은 놀리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합의된 상황인가요? 설마 적의 공자와 키나가 저럴 줄은 몰랐는데요.”
“그럴 리가 있냐.”
청의 추기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사고 좀 치지 말라고 했더니, 사고를 치다 못해 적과 금의 통수를 갈겨버릴 줄은 몰랐네.
금의 추기경은 한심하다는 듯이 먼저 쌩 걸어갔다. 그 모습에 백의 추기경이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어머, 의외로 신경 안 쓰시네요. 아드님에게 엄격하실 텐데.”
금의 추기경은 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금의 추기경은 이 상황을 짐작했다. 뭐…그래. 저딴 꼴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도 그럴 게, 키나가 아이작의 종자로 등록한 사실 때문에 저택이 이미 한바탕 뒤집어졌었던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더니, 키나는 이리 말했지.
-교황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교황의 자리를 넘겨줄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딴 길로 새는 것보단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이작은 최고신을 뽑을 정도의 놈이다. 그 계획을 위해서라도 붙어있는 게 좋지.’
물론 최고신은 못 뽑게 해야지. 뭐, 이미 수를 써놨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 모습에 백의 추기경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왜 금께서 조용하실까.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 말에 걸음을 멈춘 금의 추기경이 건방지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가뜩이나 성직자 사회는 굉장히 배타적이었다. 다른 신앙은 몰라도 추기경 자리에 여자가 앉는 걸 교황과 금이 반길 리가 없다.
“키나가 교황이 되는 것엔 변화 없다.”
신을 뽑는 것?
‘아이작은 어차피 오늘 신을 뽑지 못할 것…….’
“참! 금께서 잊으신 것 같더군요. 아이작이 신을 소환하는 명단에 없길래, 제가 다시 넣어놨습니다.”
적의 추기경의 말에, 금과 청의 추기경의 뒤에 블리자드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뭐, 인마?
뭘 넣어?
원수인 둘은 동시에 한 놈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가 그딴 쓸데없는 짓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적의 추기경은 싱글벙글 여우처럼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어떤 악신이 나올지.”
두 추기경은 눈빛으로 적의 모가지를 비틀 기세였다.
‘시발! 이 새끼 모가지부터 비틀어버릴까? 악신이 나오면 끝이거늘!’
‘시발, 악신 안 나와. 최고신이 나온다고.’
그 광경에 백의 추기경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부하들이 하도 아이작에 대한 욕을 해대서 어떤 아이인가 궁금했었거늘.
결국 금의 추기경이 부하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했다.
그리고 그때, 처형장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십사육마가 처형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십사육마가 나타나자마자, 처형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처형을 시작하겠다.”
아이작의 눈빛도 바뀌었다.
중앙에 있는 처형대 위로 검은 깃발이 올라갔다.
까마귀를 담은 흑가의 문장.
곧 가면을 쓰고 있는 흑가의 처형관이 손짓하자, 적의 사제들이 원을 만들며 창을 땅에 꽂았다.
번쩍!
땅에 붉은 성법진이 새겨지면서 그 위로 검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문용 투구를 쓰고, 치렁치렁한 구속구를 달고 있는, 마족의 모습이었다.
마족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제들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저, 저게 십사육마……!”
“봉인된 상태가 저정도란 말야?”
처음 보는 9계위 마족의 모습에 견습들은 물론, 사제들 모두 바짝 긴장했다.
“저런 놈을 지배하던 해골왕은 도대체…….”
슈리도 나이저도 움찔했다. 처형을 위해서 감옥에 있을 때보다 더 구속을 강화했을 텐데, 저만한 힘이라니.
반면 그 광경에 아이작은 오히려 살기를 뿜었다.
얼씨구, 새끼들이 뭘 저리 칭칭 감아놨어?
뒤지고 싶나?
심지어 고문 도구?
지금 손님들 왔다고 저딴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데리고 나온 거야?
하지만 그 모습에 몸을 떨던 견습과 사제들은 되레 놀란 눈치였다.
“역시 청…. 마족을 볼 땐 눈빛이 달라지는구나!”
“저런 힘 앞에서 떠는 게 아니라, 사명 의식을 불태우다니.”
“저 정도는 되야 성자라는 건가.”
아니거든?!
지금 빡쳐서 그런 것뿐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