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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13화 (113/272)

제113화. 정녕 이래도 되는 겁니까 (1)

“뭐? 적이 비전 약을 들고 병동을 찾아가?”

금의 추기경, 히레이 베리트는 핏대를 세웠다. 물론 평소라면 적(赤)이 뭔 짓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금이었다.

왜냐고?

적의 추기경이 하는 짓의 8할은 본인의 재미 추구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휘둘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2할이 문제였다.

보통은 신경을 꺼도 되지만, 그 2할에 속할 때는 신경을 바짝 세워야 했다. 다른 신앙들에게 해를 끼칠 일을 할 정도로 적이 본색을 드러내는 때니까.

마녀사냥이나 피의 이단심문, 가문 전쟁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경계할 때지.

‘이 미친놈들이. 하다 하다 세페트의 비전 약이라고?’

각 가문에는 그 가문만이 제조할 수 있는 특별한 비전 약들이 있었다. 효능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인 효능으로는, 신체 활성화를 통한 상처 회복.

그걸 아이작에게 들고 가고 있다고?

그게 무슨 의미겠는가.

‘세페트 그것들이 기어이 우리를 방해하겠다는 건가?’

아이작을 단번에 회복시켜서 신 뽑기에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리트가로서는 아이작을 절대 그 자리에 내보낼 수 없었다.

아니, 내보내서는 안 된다!

‘최고신이 나온다고!’

괜히 아이작한테 교황청 병동의 특실까지 내준 것이 아니었다.

최대한 어루만져가며 환심도 사고, 치료도 지연시켜 침대에 눌어붙게 할 심산이었다. 베리트로서는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흑의 추기경도 그렇고, 이젠 적의 추기경까지!

‘이 도움 안 되는 놈들.’

가뜩이나 흑의 펜타곤 때문에 이번 공양제에서는 견습들 전원이 신 뽑기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펜타곤의 과제가 된 이상, 계약할 신이 누구인지 모두에게 공개되거늘.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누구를 회복시켜서 어디를 내보내려고 해?

심지어 적의 비전 약?

‘하다못해 소환이라도 실패시켜야 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으려고 해?’

특히 적가의 약은 연결된 신과의 적합성을 올려주는 효능이 있었다.

게다가 최고신은 교황과 금의 직계도 뽑지 못한 신이었다.

그걸 청의 자식이 뽑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공식 신 뽑기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추가 뽑기 개념으로 해서 적당한 신을 붙여주려 했거늘.

그랬기에 금의 추기경은 시종에게 지시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약을 먹는 건 막아라. 신 뽑기에 내보내면 안 된다.”

이건 제국의 근간이 뒤흔들릴 일이었다.

하지만 시종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청이 적의 비전 약을 왜 먹겠습니까. 자백제를 섞을 놈들인데요.”

그래. 그렇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먹을 리가 없지.

그래. 제정신이라면 말이다.

‘찌바알! 개맛있네!’

문제는 아이작이 제정신이 아니다 못해 미친놈이라는 거지.

아이작은 호록호록 호로록 적의 비전 약을 들이켰다.

적포도주 맛이 나는 적의 비전 약은 아이작의 목구멍을 태워가며 꿀떡꿀떡 넘어갔다. 아니, 꿀떡꿀떡 넘어가다 못해 캬, 이거 취하겠네.

금의 비전 약이 쇠똥 같은 모양의 단약이라면, 이놈들은 푹 삭힌 와인이네. 술맛 죽이네, 미쳤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나이저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방울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금액인 비전 약을 저렇게 물 마시듯…….’

정녕 이래도 되는 겁니까, 아버지? 저도 못 먹어본 걸 저렇게 먹여도 되는 겁니까? 예??

“캬, 이거 맛 죽인다. 니들 술도 잘 만들겠는데?”

나이저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세페트는 남부 영지 기반이니까. 와인이랑 오일은 제국 제일… 아니, 저기. 너 그거 언제까지 마실……”

“왜? 먹고 싶은 만큼 마시라며?”

“아니, 그거 나도 못 먹어본… 아니, 이게 아니라, 한 방울만 마시라고…….”

“그래? 한 방울만 마셔? 정말로?”

아이작의 호랑이 같은 눈빛에 나이저는 스읍, 하늘을 보았다.

“…아니. 마음껏 마셔. 응.”

호록, 호록, 호로로로록!

그 귀한 약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이작의 목에 넘어가자, 나이저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젠장. 적가의 후계자인 자신도 못 먹어본 약을 저놈이! 형님들만 먹어본 귀한 비전 약을 저딴 놈이!!

아니, 하다못해 저놈만 먹으면 또 말이라도 안 하지!

“이거, 진짜 우리까지 먹어도 되는 거냐?”

“아이작한테 줄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따양하지 말고 둘 다 한 잔씩 드세요.”

대체 왜!

왜 이 귀한 걸 릴라이하고 슈리까지 처먹는 건데!

둘은 썩 내키지 않는 듯 약을 사양했었지만, 아이작이 기어이 강제로 먹여버렸다.

그리고 그 귀한 걸 받아먹었으면 감사해하면서라도 먹을 것이지.

“비싼 것치고는 맛은 더럽게 없네.”

“우리가 만든 건 안 이런데.”

이 망할 놈의 청!

‘평소엔 이런 건 구경도 못 해본 놈들이! 비약의 맛을 알기나 해?’

청은 인내의 신앙인 만큼, 원래도 비전 약에 의존하기보다는 미련하게 스스로를 갈고닦는 놈들이었다.

그들이 영약을 먹는 건 죽음을 각오한 싸움에서 마지막 불을 태울 때뿐. 비전 약을 잘 먹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게 생겨도 팔아서 가신들에게 돌리는 편이다.

그런 만큼 약빨도 잘 들을 테니 감사히 여겨줬음 좋겠는데! 재력 규모도 적가한테 딸리는 놈들이!

“아이작한테는 너무 쓰겠구나. 다음에는 아이작이 좋아하게끔 더 잘 만들어 보거라.”

아오!

나이저는 억울하긴 했지만, 뭐라 할 순 없었다.

‘저놈 하나 때문에 청이 파업을 해버렸으니.’

청의 파업은 적에게도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청이 움직이지 않자, 그들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던 적의 사업들도 모조리 멈춰버리게 된 것이다.

‘젠장, 설마 청이 파업 같은 짓을 할 줄 알았나!’

물론 자신들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귀족들의 싸움은 일단 명분을 잡는 게 최우선이었으니까.

-파업을 멈추고, 적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해 사죄해라. 그렇지 않으면 청과 연계된 사업을 모조리 중단해버리겠다!

-남부 땅이 품고 있는 청의 사람들도 죄다 내쫓겠다!

그렇게 강하게 나가면 청도 적당히 물러날 줄 알았다. 가신들을 건들면 청은 보통 수그렸으니까.

그런데 청이 물러나기 전에, 오히려 중간에 껴 있던 상단들이 잘됐다는 듯 청에게 우르르 몰려가서는-

-십사육마를 놓친 적가를 믿을 수 있나. 저 변덕쟁이 새끼들을 믿느니 차라리 청을 믿지.

-파업이 길어지면 우리도 안 좋아.

-오히려 잘됐군. 이 기회에 청으로 가세. 최근엔 청도 믿음직해지지 않았나.

-아하. 아이작 도련님 말이지?

-?!

오히려 적에 있던 큰손들이 탈주할 기미를 보였다.

아무튼 장기전으로 가면 적의 손실이 꽤 컸다. 비전술 한 통으로 퉁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지.

그리고 목적은 그것뿐이 아니었으니까.

‘이놈을 일단 치료해서 신 뽑기에 내보낸다.’

거기서 적가의 신을 소환해서, 아이작을 살펴보게 하는 거야!

뭐, 아이작이 상급신을 뽑으면 이쪽이 되레 공격당할 수도 있지만, 괜찮았다.

‘저놈이 상급신을 뽑을 리 없잖아.’

그 신앙심으로? 허, 지나가던 개가 처웃겠네. 예의 여신상이 눈을 부릅뜬 걸 자신이 잘못 봤을 리 없다.

‘저놈은 변절자가 틀림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저가 그냥 저 술을 먹이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자백제가 들어있다고. 지금쯤 목이 째지는 기분일 거다.’

‘캬. 기분 째지네, 째져!’

아이작은 꺄꺄 병을 뒤집으며 트림을 했다. 어린애라고 술도 못 처먹게 하던 청하고 비교하면, 세페트! 이 얼마나 예쁜 놈들인가!

‘뭐, 자백제를 탄 모양이긴 한데.’

그 증거로 아이작에게 해가 없는지 먼저 먹어본 두 사람의 표정이 몽롱했다.

“우리 예쁜 아이작, 어서 자라서 이 숙부랑 해골왕을 뼈까루로 만들러 가자꾸나.”

“아, 빌어먹을 아이작. 사실 네 밥에 코딱지 넣어놓은 적 있… 푸컥!!”

하 이 멍청한 성직자놈들.

이놈들은 왜 자백제에까지 마력핵을 쓰는 거야? 물론 성직자를 해하는 약으로는 마력핵이 최고지. 그러니 이해는 하는데.

그렇게 기대하듯이 바라보고 있으면, 양심 찔리잖아.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하셨습니까?]

있어. 그러니까 얌전히 술병만 비워주고 있잖아.

[양심 참 일그러지셨네요.]

내 양심이 얼마나 동글동글 예쁘고 반듯한데?

‘뭐, 마력핵으로 배합한 자백제 말고, 평범한 자백제라면 나도 좀 위험하겠지만.’

하지만 그렇다 한들 여긴 사제들의 나라였다. 더러운 성직자들이 사제들한테 평범한 자백제 따위를 생각하겠냐! 푸헿!

아무튼 맛있는 술에 마력핵까지 섞어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 뭐, 마력핵의 독기운 때문인지 청의 두 사람은 이미 곯아떨어졌지만.

[축복 효과도 있는 것 같네요. 신을 뽑을 때 유용하겠습니다.]

그래, 신앙심이 이 모양이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을 뽑을 생각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만발의 몸 상태인 게 좋지. 소환에 실패하면 가문의 망신이니까.

아이작은 술병을 탈탈 털며 말했다.

“아, 다 마셨네. 딸꾹.”

“오, 그럼 이제 파업을 중단해줄 마음이 들어?”

“아니. 부조캐.”

“…뭐?”

“한 병 더 내놔.”

“뭐, 인마?!”

“너 품에 하나 더 있잖아.”

“아니, 이건!”

나이저는 반사적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가 아니라, 이거는 자신이 신 뽑기를 위해 준비해둔 자신의 축복약이었다.

주신을 뽑기 위해 남겨둔 걸 줄 것 같냐!

하지만 아이작의 눈이 더욱 번득였다.

“안 주면 계속 파업하라고 할 거야.”

“젠장! 그럼 딱 한 입이다, 딱 한 입만… 악! 이제 안 돼! 그만 먹어!”

결국 나이저가 가지고 있던 축복약까지 몽땅 빼앗아 먹은 아이작이 입맛을 다셨다.

이건 와인이 아니라 꼬냑인가? 적가 놈들의 약들은 죄다 술이라서 더럽게 좋네.

나이저는 텅 빈 본인의 약병을 보며 절망했다. 자신도 신 뽑기 때문에 특별히 가주께 받은 선물이었거늘……!

‘참자. 참아!’

이제 이걸로 파업 건도 정리되고, 저놈을 신 뽑기 장소에 보낼 수 있게 됐으니…….

“야. 더 없냐? 니네 집 가면 이거 더 있지?”

“네놈은 남의 집을 파산시킬 생각이냐?!”

하지만 핏대를 세우던 나이저는 곧 아차 싶었다.

‘아니지. 오히려 집에 온다고 하면 더 좋은 거지!’

알아서 심문을 받으러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이저는 급히 아이작을 잡았다.

“아냐, 좋아. 가자! 좋은 신을 뽑게 도와줄게!”

“근데 나 아직 다친 곳 때문에 다리 아푼데.”

“그, 그래? 그럼 내 장비 줄게. 이동에 도움이 되는 신발이야. 이거면 편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신발을 받아 신은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아아, 어쩌지이. 성력이 부족해서 신 뽑기를 하기 전에 수련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니네 집에는 못 갈 것 같아.”

“성력 늘려주는 성물 빌려줄게!”

“아아. 아이작은 좋은 신 뽑고 싶은데, 이걸로는 수련을 더해야 할 것 같은데.”

“아오씨! 하나 더 빌려줄 테니까!”

결국 모든 성물을 빼앗긴 나이저가 땀을 뺐다.

“자! 이제 가자!”

“밥도.”

“아오! 가지가지 하네!”

나이저가 사비로 비싼 간식을 주문했을 때였다.

“희소식입니다! 드디어 추기경 각하들께서 십사육마를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뭣이? 그게 정말인가?”

“다시 잡아 올 수 있겠군!”

“예! 그래서 교황청에 지원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오오오오! 됐어, 됐다고!”

교황청 내부가 십사육마의 소식으로 펄펄 날뛰기 시작헸다.

그 소란스러움에 나이저가 혀를 쯧 찼다.

“체통은 지킬 것이지. 뭐, 우리하곤 관계없는 일이지만 말야. 아무튼 배도 채우고, 물건도 빌려줬으니 이제 집에 가ㅈ…….”

그러나 고개를 돌린 나이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야!”

흔적도 안 남기고 튄 아이작의 모습에 나이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편, 먹튀를 시전한 아이작은 신발의 힘으로 교황청을 빠져나왔다.

뭐, 적가에는 지금 상태로 가봤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뿐이고. 가려면 더 안달 나게 만들어야지.

‘부하 놈이 꺽정이군. 냠냠.’

입에 비싼 간식을 문 건 덤이었다.

뭐, 부하 놈이 걱정되긴 하지만, 지금은 마주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주변 놈들이 이 정도로 나오면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다.

‘적은 나한테 신 뽑기를 시키려 하고. 금은 기를 쓰고 막으려 하고.’

어디 그뿐인가?

백은 힘내라는 쪽지를 남겼다.

하물며 흑의 추기경조차 갑자기 평가 과제를 신 뽑기로 하려고 한 것도 이상해.

‘단순히 이름 없는 하급신으로 이러진 않겠지.’

도대체 누구길래?

한번 알아봐야겠다.

그런데 때마침, 그 답을 알려줄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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