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정녕 이래도 되는 겁니까 (2)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고엘이었다.
그리고 누가 교황가 핏줄 아니랄까 봐. 생김새도 그렇고 품위나 화려함을 따지는 놈답게 100미터 밖에서도 눈에 띄는 놈이었다.
아, 물론 그 때문에 검소함이 상징인 청 안에서는 살짝 졸부처럼 보이는 게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아이작의 숙부란 의미다.
그런 그를 발견한 아이작의 눈이 반달로 히죽 휘었다.
뭐, 어릴 때부터 자신을 아니꼬워하며 저택에서 내쫓으려고 온갖 지랄… 아니, 난리를 쳤던 망나니 놈.
하지만 얼마 전 베리트 저택에 다녀온 이후로 자신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도 했지.
자신만 보면 죽이려던 놈의 태도가 왜 바뀌었을까? 으응?
‘베리트에서 뭘 보고 왔으니까 그런 거겠지? 응?’
아이작이 가장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초승달 눈이 될 법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 같은 얼굴로 숙부에게 깡총깡총 뛰어갔다.
“고-오-엘 쭉부니임!”
“?!”
아이작이 멀리서 총총거리며 뛰어오자, 고엘은 못 볼 걸 본 듯 흠칫 놀랐다.
시벌, 저거 뭐야!
쟤 왜 저래! 뭔데 저렇게 머리에 꽃 단 미친놈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달려오는 건데!
빌어먹을 릴라이가 묻었나 싶긴 하지만, 하필 상대가 저놈이라 방심도 못 한다.
아니, 자신을 저렇게 반기면서 오는 게 솔직히 무섭기까지 해!
새하얗게 질린 고엘은 혐오스러운 듯 재빨리 도망가려 했지만-
쾅!
“쭉부님, 어디 가세여?”
“……?!”
가는 길을 막았다.
이 자식이 성력탄으로 문을 박살 냈어!
심지어 눈을 번득이면서 발로 박살 난 문을 가로막고 있어!
이 자식 눈깔 돌아갔다고! 올라간 입꼬리가 찢어질 것 같아!
조카의 눈에서 광기를 느낀 고엘은 소름이 돋았다. 애처롭게 박살 난 교황청 문이 울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솔직히 놀랐다.
‘펜타곤 기간 동안 뭘 했길래!’
성력탄의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성력탄이 문제가 아니지. 이 새끼, 1년 동안 집을 나가 있더니 눈깔이 왜 이렇게 변했어!
슈리가 한 말이랑 전혀 다르잖아!
-아버지, 아이작이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청의 이름을 짊어질 사람이 되었어요!
정신을 차리기는 개뿔이!
애 정신이 더 멀리 나가버렸잖아!
물론 슈리가 그 말을 한 건 아이작이 스켈레톤들을 숨기면서 연기했을 때였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이작을 좋아할 리 없는 고엘이었다. 그리고 이 새끼가 자신을 좋아해서 이렇게 달라붙을 리도 없고.
‘상대를 말자, 상대를 말아…….’
그렇게 고엘이 답도 않고 돌아서려는 순간.
쾅!
“?!”
“쭉뿌님. 따랑하는 조카가 인사드리는데, 이리 무시를 하시다니요.”
안 사랑해!
그리고 이게 숙부한테 인사하는 거냐? 협박하는 거지?!
“이 아이작, 느무 슬퍼서 눈물이 나옵니다.”
입꼬리는 내리고 말해라! 그게 슬퍼하는 놈의 얼굴이냐!
고엘은 골치가 아픈 듯 벽을 짚었다.
솔직히 피하고 싶다. 조카고 자시고, 개무시하고 싶은데. 이 자식 하는 꼴을 봐선 상대를 해줄 때까지 물고 안 놓아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엘에게는 아이작을 쳐낼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최고신!’
정말 이 아이가 최고신에게 점지를 받은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교황가를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 생각에 미친 고엘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애써 웃어 보였다.
“그, 그래. 아이작.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이 숙부도 기쁘단다.”
“그렇죠? 아히힣, 조카를 보자마자 그렇게 도망부터치려 하시니 아이작이 뭔가 잘못한 줄 아랏죠.”
미친놈, 이딴 얼굴이 정녕 성녀의 아들인가.
누가 보면 마왕의 아들인 줄 알겠네.
아니, 마왕도 너무 품격이 넘치지! 어디 사이비 교단의 후계자라고 해도 믿겠어!
쌍욕이 나오지만 고엘은 애써 웃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 탓에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다. 싫은 놈한테 억지로 웃어 보이려니 얼굴이 마비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고엘의 반응을 살피는 아이작은 확신의 웃음을 지었다.
‘역시 뭔가 있구만.’
고엘의 태도가 바뀐 건, 분명 서품식 이후였다. 그리고 청의 가주라면 분명 고엘을 시켜 베리트의 뒷조사를 시켰겠지.
그래! 키는 이놈이 가지고 있어!
고작 이름없는 하급신으로 이 계산적인 놈이 자신에게 이럴 리 없지!
그 생각에 미친 아이작은 고엘에게 다가갔다.
“쭉부님. 아이작이 어떤 신을 뽑을 것 같아요?”
“……?!”
동시에 아이작의 꿍꿍이를 눈치챈 고엘이 흠칫 놀라 물러섰다.
이 자식, 협박하러 온 건가?
아니면 뭔가를 캐내려고 온 거야?
아니, 어느 쪽이든 입은 다물어야지. 신을 뽑기 전에 진실이 새어나가서 좋을 건 없다.
‘신 뽑기에서는 점지된 신이 거의 백 프로 뜬다고.’
즉, 뭔 짓을 하든 아이작이 최고신을 뽑는 건 기정사실.
그런데 그 전에 이 소식이 퍼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작을 노리는 자들은 물론, 청에서도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니 그전까지는 본인한테도 비밀로 하는 게 최고지.
“글쎄, 난 모르겠구나. 지금의 너 정도면 무난하게 청의 중급신을 뽑지 않겠느…….”
아이작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아이작이 악신을 뽑을 것 같아서요. 이번 신뽑기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역시 그게 맞는 거겠죠?”
아이작의 말에 고엘이 기겁하며 버럭 외쳤다.
“미쳤느냐?! 왜 포기해! 악신은 무슨, 제일 격이 높은 신…. 읍.”
고엘은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반응에 아이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하.
격이 높은 신? 그래에??
제일 격이 높으면 그래, 주신급인가?
곧 아이작이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듯 고엘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쭉부님. 아이작이 귀가 안 좋아서 잘못 들었어요. 제일 격이 높다니요, 그거 주신…….”
“아악! 난 모르겠고! 가주님이 오라 명하셨으니 난 빨리 가봐야 한다…. 으악!”
아이작은 고엘의 다리를 붙들고 쓰러트렸다.
“쭉부님. 따랑하니까 한 번만 더 말해봐요. 눼? 아이작이 어느 신을 뽑는다고여? 엉? 빨리 안 말할래? 띠지고 싶냐?”
망할!
이게 사랑하는 놈의 태도냐?!
성력탄은 치우고 말해!
그보다 이 자식, 진짜 눈깔 미쳤어!
* * *
수도 인근의 시가지.
명령으로 사람이 빠진 마을은 상급 성직자들로 가득했다.
“십사육마가 이 근방에 숨어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명!”
처형장에서 도망친 십사육마가 시가지에 숨어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마족이라면 분명 신성제국의 국경 쪽으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시가지에 숨어들다니. 등잔 밑이 어두웠다.
국경 쪽을 수색하던 이들도 되돌아오고, 무엇보다 청의 사람들까지 투입되었다.
‘마족을 찾아내는 건 청이 제일 잘하니까.’
금도 퇴마에서 우월하지만, 그들은 배척을 통해 마를 없애는 것. 지옥 끝까지 쫓아가 찾아내서 없애는 청과는 결이 다르다.
하물며 청의 추기경이 투입된 이상, 이제 십사육마가 잡히는 건 시간 문제……
“아이고, 허리야. 좀만 쉬었다 하자꾸나.”
시간 문제…….
“아이작, 아직 십사육마를 못 찾아냈느냐?”
시간 문제……….
“아이작이 아직 못 찾은 것 같으니 좀 기다려라. 적당히 나흘쯤 기다리면 될 거다.”
…이놈들 일할 생각은 있는 거냐?! 적의 사제들은 목을 조를 듯 청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백과 적의 추기경이 십사육마를 찾아낸 건 좋았다.
괜히 해골왕의 부하인 것이 아닌걸까.
사실 찾아낸 게 기적일 정도로 십사육마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마을의 분수대에 설치했던 결계에 십사육마가 우연히 걸리지 않았으면 아마 자신들도 평생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본인도 결계에 걸린 걸 단번에 눈치채고는 바로 시가지로 숨어든 것 같지만.
‘역시 해골왕이 기른 마족. 다른 마족들하곤 차원이 다르다.’
‘제국의 결계가 없는 쪽을 노리고 도망치고 있었군.’
옛날에 이단심문 때문에 시가지에 걸어둔 결계가 아니었으면 정말 놓쳤을 수도.
아무튼 여기서부터는 청이 나서면 십사육마를 찾아낼 수 있는데!
“아, 역시 삐러먹을 해골왕의 부하네. 찾기가 쉽지 않네.”
아이작 에슈아!
저놈은 왜 병실에서 기어 나와서 십사육마를 찾고 있는 건데!
‘심지어 잘 찾지도 못해!’
‘아까부터 몇 시간째 헛다리잖아!’
아이작은 뜻밖에도 고엘에게 대롱대롱 매달려서 나타났다.
아무래도 먼저 현장에 온 청의 가주가 고엘을 부른 것 같았는데,
-헉…! 허억! 아버지. 저 왔습니다. 찾으셨던 이 근방의 수맥 지도입니다.
-…아이작은 왜 매달고 온 거냐?
-그게! 허억! 아무것도 아니…….
-쭉부님. 이제 알려줄 마음이 드세여?
-시발!
아무튼 십사육마를 찾는 중이라는 말에 아이작이 자기가 찾겠다고 적극 나선 것이다.
물론 어린애가 나설 곳이 아니라고 하려 했지만, 뜻밖에도 청의 가주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해라.
그리고 자신 있게 나섰으면 일이라도 잘해야지!
“헉…! 틀렸습니다! 아이작 공자가 말한 위치엔 십사육마가 없었어요!”
“아 그래요? 십사육마가 참 잘 숨네여. 푸힣.”
저 새끼가!
이쯤 되면 십사육마를 일부러 놓치고 있는 거 아냐?
적의 사제들은 인내심을 삼키며 청의 가주에게 다가갔다.
“각하. 손자분께서는 아직 자격이 안 되시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그러나 청의 가주가 눈을 번득였다.
“지금 손자가 자격이 안 된다고 한 건가?”
“예?”
“너희는 추기경의 안목이 틀렸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로군?”
청의 가주의 불쾌하단 기색에 적의 사제들은 입을 잘못 놀렸다는 듯 얼어붙었다.
눈앞에 있는 건 교황 다음가는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감히 입을 놀릴 수 있을 리 없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계속 일 시켜.”
아니이!
적의 사제들은 미칠 것 같았다.
‘청의 가주. 무슨 생각이지?’
파업 건으로도 적을 곤란하게 만들더니! 이젠 십사육마까지?
그리고 그 원한 서린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고엘이 괜찮냐는 듯이 물었다.
“아이작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요. 괜찮으겠습니까? 쟤들 진짜로 아이작을 끌고 가겠습니다.”
“내 앞에서 할 수 있으면 어디 해보라 해.”
“답지 않으시게 보이콧을 지시하시고요.”
안 그래도 곳곳에서 고엘에게 ‘가주 좀 말려주십시오.’라며 매달려 오지 않았던가.
“가문 전쟁으로 이어지기 전에 그만두시는게…….”
“그놈들이 먼저 적반하장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안 이랬어.”
괘씸하게 천사를 다치게 한 걸 아이작한테 뒤집어씌우고, 오히려 사과를 시켜?
“아니, 답지 않다고 한 건 아버지가 에슈아의 아이 때문에 그러셨다는 겁니다.”
아이작을 보는 가주는 침묵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는 그였다.
신앙의 수호자들은 신앙과 신앙에 속한 자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가족은 없다.
가족들 역시 신앙을 지켜야 하는 수호자들일 뿐, 거기에 온정이나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면 안 된다. 신앙의 수호자들은 오직 신을 위해 죽어야 할 존재들.
그러나 가주는 아이작이 금의 펜타곤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부디 가족들을 소홀히 하진 말아주세요. 할아버지의 손가락들도 다 같이 품으셔야 할 약자들입니다.
가주는 눈을 감았다.
“조금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
“그리고 파업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적을 괴롭히는 거요……?”
가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그럼 전에 말씀하신 첩자 건 때문입니까? 그거라면…….”
“아니. 저 아이가 해골왕을 잡겠다며 그 부하도 찾아내겠다고 나섰다. 이거면 신 뽑기를 하기 전에 신앙심도 올라갈 테지. 악신 따위 나오게 할까 보냐.”
“…….”
이런 미친, 그놈의 신앙심이 문제였던 건가!
진실을 아는 고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