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아, 최고라고요! (1)
고엘은 씩씩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말 안 하려 했는데!’
하지만 참기엔 속이 터진다!
이놈의 망할 집안! 답답해서 그냥 말해야겠다!
‘말 섞다가 속 터져 뒤지겠네, 진짜!’
결국 모든 진실을 외친 고엘은 그제야 좀 속이 시원해진 듯 허리를 쭉 폈다.
자! 어떠냐, 이제 좀 정신이 드냐!
하지만 기껏 진실을 말해줬는데, 정작 들은 놈들이 반응이 없다. 그저 눈들만 끔뻑거릴 뿐.
고엘의 눈썹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 말, 들으신 겁니까?”
“뭐? 최고신?”
“예!”
“누가?”
“아이작이요!”
“누굴?”
그 반응에 고엘은 가슴을 퍽퍽 쳤다.
아, 진짜!
“아 최고신 뽑았다고요! 서품식에서! 최고신한테 간택을 받았다고요!”
“고엘.”
“예!”
“꿈꿨냐?”
아씨!!!
고엘은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 진짜라고요! 베리트가에서 보고 왔다고요! 왜 베리트가 그놈을 입양하려고 하고, 금의 펜타곤에서 죽이려고 하고. 그 지랄을 했겠습니까. 그 고고하고 본인들 외엔 천민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요! 왜 그렇게까지 했겠냐고요!”
그러나 아버지와 동생은 뭔 개소리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딴 놈이 그만한 걸 뽑을 리 없잖아.”
“맞습니다 형님. 아이작이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럽다지만, 그건 진짜 아닌 것 같습니다. 꿈이랑 분간도 못 하시면 어째요…….”
심지어 동생 놈은 안 믿다 못해 측은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백의 신앙에 이야기해둘 테니 잠이라도 푹 주무시고 오실래요……?”
“아와으우악! 아오아악! 아악!!”
고엘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나라도 믿긴 힘들지만!
솔직히 믿지도 않겠지만!
“형님. 우리 아이작의 애착 인형을 쓰실래요? 숙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릴라이가 아이 베개랑 인형을 가지고 와 꼭 안겨주자, 고엘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하지만 동생은 진지하게 형을 걱정했다.
“효능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 베개에는 백의 수면 성법을 걸어놓았거든요!”
“아와우악!”
고엘은 베개를 집어 던지고, 애착 인형은 북 찢어버렸다.
내가 진짜! 이놈의 성녀 집안 때문에 화병이 나 죽겠다! 그냥 망해버려라, 에슈아!
어떻게 된 게 이 집안에는 정상인이 없지?
“아, 그래요!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십시오! 기껏 교황가의 목줄을 쥐게 되었는데, 그냥 넋 놓고 버리시라고요! 저는 아이작을 데리고 이 집을 떠나겠습니다!”
그 말에 릴라이도, 심지어 일라이조차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누가 누구를 데리고가?
쟤가? 아이작을??
“형님!”
“그래! 이제야 좀 믿겠느냐?”
“아이작은 땅콩 당과를 제일 좋아하고요. 자기 전에 꿀 넣은 밀크티를 마십니다. 양치질도 꼭 시켜주시고요, 그리고…….”
이 미친놈이?!
“그리고 성인식에서는 꼭 히스크산 옷감으로 예복을 지어서 챙겨주십시오!”
고엘은 대답 대신 릴라이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에도 릴라이는 가슴의 꽃은 파랑색이 좋겠다는 둥 고엘의 주먹을 불렀다.
하지만 그쯤 되자, 일라이는 슬슬 기이하게 느끼는 듯했다.
“…설마, 진짜냐?”
“네!!”
제발 사람 말 좀 믿어라, 씹새들아!
그러나 일라이는 똥씹은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놈이 어떻게 최고신을 어찌 뽑는데?”
“그건 저도 모르죠.”
“그 신앙심으로?”
“저도 모른다니까요?”
일라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꽤 심각해 보였다.
최고신…. 변태였나?
아니면 아이작이 성자라서 최고신이 붙은 건가?
지금까지 우리가 한 건 잘못된 건가? 반대로 해야 사랑을 받는 거였나?
“저기요, 아버지?”
고엘은 땀을 삐질 흘렸다.
점점 이상한 고민을 하는 듯한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곧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의 취향은 중요하지 않다. 최고신을 뽑은 시점에서는 신앙심도 묻어갈 수 있으니.’
그 누구도 뽑지 못한 신.
주신들보다도 우위에 있는 존재.
그야말로 신들 중에서도 신적인 존재인 최고신을 뽑았다는데, 뭐 어쩔 거야! 최고신을 누르고 이단심문에라도 끌고 갈 건가?
하지만 그쯤 되자 일라이는 다른 의미로 심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고신이 어떤 존재인가.’
괜히 금에서 그 지랄한 게 아니었다.
최고신의 존재는 그야말로 엄청난 길(吉)이지만, 그 누구도 겪어본 적 없고 손에도 안 잡히는 존재니, 사실 무섭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아이작이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최고신 정도면 애초에 감당이 안 돼!’
상대가 너무 강하다!
그리고 그때였다.
“가주님, 큰일입니다.”
“!”
가주의 기사가 급히 눈앞에 떨어졌다. 평소 평정을 잃지 않는 전령의 얼굴이 드물게 하얗게 변해있다.
일라이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적의 신앙이 아이작 도련님께 이단심문을 걸었습니다.”
…뭐?!
* * *
“뭐? 누구한테 이단심문?”
제국의 황태자, 샤블리스는 뜻밖의 이야기에 미간을 좁혔다.
“아이작 공자한테 이단심문을 걸었다고? 사실인가?”
그러나 황태자의 말에 흑의 추기경은 딱 잘라 말했다.
“이제 관심 끄십시오.”
“뭐?”
“의심을 받고 있는데 십사육마가 있는 곳까지 굳이 처기어들어와서 마족의 문자를 보고 있었다고요? 논외군요. 그 정도로 상식이 없는 놈인 줄은 몰랐습니다.”
“가차 없군.”
“상식 없는 놈은 상대를 안 할 뿐입니다.”
흑의 추기경의 말에, 황태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몰렉 백작에게 암살자를 보내서 아이작 공자를 없애라 한 건, 생각이 있고?”
“그건 전하께서 아이작 에슈아랑 꼭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잖습니까.”
“…뭐라고?”
“암살자들에게 죽을 뻔한 걸 황태자가 구해주면 호감이 생기겠죠. 그럼 은혜를 못 갚을 바에야 제 대가리를 깨는 에슈아로서는, 알아서 황가에 충성하지 않겠습니까?”
에슈아는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놈들이니까.
그러자 황태자는 기가 찬 듯했다.
허, 저게 정녕 성직자인가? 하여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북쪽의 까마귀들답다.
뭐,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지키는 이들인 만큼 실력하나는 최고지만. 그리고 제국 최고의 두뇌이기도 하지.
하지만 몰렉 백작만 선동했으면 말도 안 하지.
“귀공이지 않은가. 흑의 펜타곤에서 공작전을 시작한 게. 모든 가문에 암살자를 붙여서 서로 싸우게 만든 게 그대이면서.”
“떨거지들은 알아서 떨어지라는 의미였습니다. 지금도 쌓여있는 문제가 한가득인데, 느긋하게 성자 뽑기? 시간 낭비입니다. 당장 투입할 전력이 필요하건만.”
“그래도 학자로서 아이작 공자의 답안지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나.”
펜타곤 동안 견습 사제들에게 내려진 과제는 ‘해골왕을 잡는 방법’이었다. 아이작도 이를 갈긴 했지만, 결국 과제를 제출 했었고 말이다.
그 결과, 아이작의 답안지에 교수들과 사제들이 무척 놀라워하며 감격하지 않았던가.
-해골왕을 잡는 데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다니!
-정녕 천재인가!
-청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던 흑의 추기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정말로 본인이 쓴 거라면요.”
흑의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그 꼬마한테는 이제 관심을 끄십시오. 흑의 펜타곤 직후에 이단심문이 시작될 겁니다. 신 뽑기에서 본인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대로면 청은 멸문하겠죠.”
그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흑의 펜타곤에 모인 모든 이들이.
“지금부터 공양제 2부가 시작될 것이다. 귀빈들이 계시니 결코 실수하면 안 된다. 일단 신 뽑기를 해서 계약할 신을 고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
“…노려보고 있는 사제들은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요!
어린 견습 사제들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게, 신 뽑기 장소에는 견습 사제들보다 더 많은 수의 이단심문관들이 깔려 있었다.
드디어 누군가를 잡아갈 수 있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금쪽의 사제들도 아이작만 노려보고 있다.
그러니 슈리는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작, 이 새끼. 또 뭔 짓을 한 거야.’
십사육마를 찾으러 가서 십사육마를 계속 놓치는 짓을 하지 않나. 십사육마가 남긴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뭐, 메시지 건은 슈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설마 아이작이 해골왕의 암호를 읽을 수 있을 줄이야.’
아이작은 십사육마의 메시지가 있던 곳에서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적의 사제들은 신이 나서 왜 거기에 있었냐며 취조에 들어갔지.
뭐, 아이작은 정석적으로 ‘십사육마의 기운이 느껴져서 조사를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답했지만. 글쎄.
-십사육마가 남긴 이 메시지에 네 이름과 해골왕에 대한 찬사가 써져 있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다.
-좋은 말로 할때 해골왕을 섬긴다고 불어라.
-띠발, 뭐래, 때끼들이.
-이래도 발뺌할 거냐? 내용도 그래. <비록 신께 무릎을 꿇고 죄를 사죄한 해골왕이지만, 그 위대한 업적을 깊게>…….
-시벌 놈들아! 그딴 말 안 써져 있거든?! 뒤질래?
-……?!
‘아이작, 이 바보 같은 놈!’
아무리 청이라도 마족의 언어를 알진 못한다고!
아니나 다를까, 적들은 신이 나서 아이작을 잡아갈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안 잡아가고 흑의 펜타곤에 온 이유?
‘나이저가 여기서 적의 신을 뽑아 소환할 거니까.’
신이 소환되면 악신을 뽑은 아이작은 적의 신에게 처벌을 받게 되겠지. 그럼 악신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즉, 귀빈들 앞에서 보여주기 식이었다.
“정말 그 청이 타락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오늘 그 증거를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거라면 단순한 이단심문보다 더 확실하지!
청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숨에 나락에 보내고, 본인들의 위상은 드높일 수 있는 방법.
‘저 새끼들. 아주 실실 웃는 꼴을 보아하니 당연히 악신이 뜰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하지만 그런 상황인데 정작 아이작은 미쳐 돌았는지 오히려 웃고만 있고.
‘무슨 생각이지?’
그때였다.
교황청 사제들이 견습들에게 외쳤다.
“자, 그럼 신 뽑기를 시작합니다. 구슬에 성력을 담아서 신을 부르세요.”
그말과 함께 모두가 신석을 들고 기운을 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신석에 뜬 이름에 환호를 하거나 아쉬워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날을 위해 신들의 문장과 이름을 공부하는 만큼, 뽑은 신의 서열이 바로 분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석을 들고 있는 아이작은 도통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 금의 신이라 이거지이?’
캬, 이름 없는 하급신이라기에 고생길이 훤할 줄 알았는데. 금의 신이라니!
‘역시 재물의 신인가? 그런 건가?’
이거,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는 건가?
아니. 솔직히 이렇게 된 이상, 재물의 신이 아니어도 된다.
금의 신이면 그 어떤 놈이라도 훌륭했다. 금에 속한 신들은 풍요의 신 등. 전부 부유한 신들이었으니까.
‘그래, 금 쪽에서는 망할 최고신만 아니면 돼.’
뽑기만 한다면야 위상이 달라지겠지만 뭐, 됐다. 여러 의미로 사고를 많이 쳐서 그쪽은 좀 골치 아프니까.
그럴 때였다.
“뭐야, 너 아직도 안 뽑았냐?”
“청도 이제 끝이구나.”
적가를 따르는 이들의 비웃음에 청의 팀이 이를 갈았다.
금의 추기경은 눈을 감고 뭔가 주문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자 서둘러.”
그 말에 슈리는 긴장된 얼굴로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은 구슬을 들고 성력을 실었다.
‘재물의 신! 재물의 신!’
재물의 신이면 상급신에 조금 못 미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재물! 째물!’
그리고 신 뽑기는 사제의 간절한 기도로 신이 소환되는 구조다. 특정 신을 부르면 더 쉽게 부름에 응답한다.
동시에 아이작의 구슬에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보이는 문장과 이름에 아이작이 흠칫 놀랐다.
[잠깐. 이거, 최고신의 문장 아닙니까?]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문장이 찬란하게 빛났지만, 정작 아이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안 돼! 필요없어!
‘무조건 재물신, 재물신, 재물신!’
아이작의 기도에 응답한 것일까. 문장이 바뀌기 시작하자, 아이작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그래! 옳지! 그렇지!
왔구나!
‘금의 재물의 신!’
그 광경에 사제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확정된 문장의 표기에, 아이작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좋아! 째물신…….”
그런데 그때였다.
마치 비키라는 듯, 재물의 신을 밀어내며 문장이 바뀌었다.
‘어?’
그 바뀐 문양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최고신이군요.]
…예?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