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아, 최고라고요! (4)
<소환식>.
신을 소환하는 자리는 늘 화제가 된다.
루키가 태어나는 자리이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약한 신에 따라 나름의 등급이 결정되니까.
그야말로 한 해의 가장 큰 축제인 공양제의 대미를 장식할 만하다는 거다.
하지만 올해?
올해는 교황이 될 자들, 즉 성자 후보들이 신을 소환하는 자리였다. 고작 가을 축제라고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소환식장에 들어서는 선배 사제들이 술렁거릴 만했다.
“도대체 몇 년 만에 상급신을 보게 되는 거지?”
“마지막으로 본 게 4년 전에 적가의 차남이 뽑은 거였나?”
“쉿. 그쪽은 말하지 마.”
보통은 하급신과 계약했다. 즉 무난한 3, 4계위 성직자들이 배출되는 것이다.
뭐, 그간 예외가 있었다면…….
“역사적이었던 건 지금의 추기경들이셨지. 같은 동기라 한자리에서 상급신이 우르르 나왔잖아.”
“릴라이 경이 소환했던 상급신도 인상적이었는데.”
“인상적이면 뭘 해. 본인이 성기사가 되겠다고 해서 차버렸는데. 하여간 괴짜에 또라이라니까.”
“뭐… 그것도 아이작 에슈아랑 비교하면 정상인이지.”
“…….”
사제들은 일제히 숙연해졌다.
적의 펜타곤에서 날뛰던 변태 모습은 아직도 충격적이다.
“아, 아무튼 올해도 추기경 각하 때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거잖아!’
“아니? 올해는 더 대단하지.”
“최고신 나올 수도 있다고!”
“그래! 아이작 에슈아가 최고신을…….”
“……”
“……”
그러나 또 숙연해진 사제들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망할, 진짜 그놈이 최고신을 소환해도 되는 거냐?!’
‘이거 진짜 괜찮은 거냐? 어?!’
솔직히 사제들이 최고신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건, 최고신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과연 그딴 놈이 최고신을 뽑아도 되는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신이 없던 적의 펜타곤에서도 그 모양 그 꼴이었거늘. 그딴 놈이 최고신까지 소환해봐라…….
적의 견습들이 아니라, 선배들인 자신들이 두들겨 맞아 바닥을 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 에이. 설마 진짜 소환하겠어? 상급신을 소환하는 것도 힘든데.”
“맞아. 그리고 소환해도 문제야. 계약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
“애초에 그전에 죽을걸. 적이 아주 벼르고 있더라.”
“아.”
“소환장을 에슈아의 처형대로 삼을 생각이야. 힘을 써서 소환 순서까지 바꿨다더라.”
사제들은 질색했다.
“어유…. 하필 적이 상대라.”
“정직한 청은 뭐, 대응도 제대로 못 하겠구만.”
“뭐, 뚝심 있는 곳이니까.”
모두가 청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아이작 에슈아는 안타깝게 되었지만,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청은 적과 다르게 비겁한 짓은 안 하는…….
“돈이다. 순서 바꿔.”
안 하길, 개뿔이!
‘청! 당당하게 뇌물로 사주하고 있잖아!!’
의전사제들은 기겁하며 땀을 흘렸다. 흑의 추기경의 곁을 오가며 소환식 준비를 하던 그들이었다.
공양제 본부실에 있는 흑의 추기경에게 청의 일가가 들이닥친 것까진 좋은데-
‘뇌물이라니!’
어딜 봐도 금괴가 들어가 있는 보물함인데! 과일 상자로 위장하고 있지만, 어딜 봐도 밑에 돈이 한가득 깔려 있는데!
하지만 사람들이 기겁하거나 말거나, 정작 청의 가주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우리 애, 제일 첫 번째로 뽑게 해줘. 설마 추기경이 되어서 싫단 소린 안 하겠지?”
심지어 꼬장을 피운다. 의전사제들의 손이 떨릴 수밖에 없다.
‘그 청의 추기경께서 이 무슨…….’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작 흑의 추기경은 차를 홀짝 마시며 말했다.
“뭐, 상당한 뇌물이군요. 이 정도면 뭐.”
…추기경들,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건가?
“이 정도 뇌물이면 됐습니다. 고려해볼 만하군요.”
하지만 그때였다.
쾅!
“아니. 전혀 안 됐쯥니다!”
“아이작!”
화가 난 듯한 아이작이 본부실에 들이닥쳤다.
안에 있던 고엘은 저게 왜 여기에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슈리가 아이작을 등뒤에서 붙잡고 있는 걸 봐선 몰래 엿듣고 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청이 그러면 안 되죠!”
그 말에 의전사제들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성직자들이 그러면 안 되지.
‘아, 역시 성자 후보님. 차기 교황이 되실 분이라 어질고 현명하신…….’
“뇌물을 바칠 돈이 있으면 나한테 넘기라고오옭!!”
…아, 이 나라는 가망이 없어.
의전사제들이 이마를 짚을 때, 본부실에 붉은 사제들이 들이닥쳤다. 소식을 듣고 온 적의 주교들이었다.
“청께서 이러시면 되겠습니까.”
“설마 청이 이리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적의 주교들의 모습에 릴라이와 고엘이 경계했고, 일라이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마치 이것들은 뭐냐는 얼굴.
그러나 적의 주교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일은 중요했다.
“청의 우두머리께서 청의 교리를 파괴해서 되겠습니까?”
“교리를 파괴한 적 없는데.”
“예?”
“청은 작은 것들을 지키는 신앙. 이건 우리집에서 제일 작고 약한 것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와, 그걸 그렇게 해석한다고?
적의 주교들은 기가 찬듯 욕을 삼켰다.
‘청…!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졌지?’
‘이런 놈들이 아니었는데……!’
그때, 흑의 추기경이 깍지를 끼며 말했다. 짙은 보랏빛 머리에 복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려 눈만 보이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청의 이런 모습은 좋지만, 글쎄. 이미 적한테 받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일라이는 눈썹을 치켜떴다.
“너, 이 새끼. 적의 애송이가 신을 소환하면 어떤 일 벌어질지 몰라? 어린애 하나를 없앨 셈이냐?”
“글쎄요. 저 역시 아이작 에슈아가 이단이라고 봐서.”
“!”
황태자한테 아이작을 소개해주려 한 것도 그렇다. 적이 아이작을 처리하기 전에, 주군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던 것뿐이 아닌가.
그리고 그 모습에 적의 사제들은 미소를 지었다.
‘청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명확하구나.’
‘아이작 에슈아의 신앙심이 말도 안 되는 수치인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나이저가 상급신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는 큰 임팩트가 되지 않는다.’
왜냐고?
상급신을 소환해서 계약한 건, 장남과 차남 또한 전부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소환한 신으로 아이작까지 잡아 넣으면?
상대는 무려 청의 사람이었다. 이단을 잡는다는 적의 힘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단번에 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정도의 공이면 단숨에 성자에 가까워진다.’
모든 게 계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키나를 짓누르려면 사실 이 수밖에 없긴 하지.’
완벽하지 않은가. 백금발의 아이가 실제로는 이단이라니. 그리고 제국 안에서 제국을 위협하는 진짜 악마를 찾아내다니.
제국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실적이 될 것이었다.
그런 만큼, 적의 주교들이 일라이를 보며 포기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청은 소환하는 순서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이저 세페트가 간택을 받고 소환할 신은 적의 주력 신, ‘형법의 신’입니다.”
그 말에 청의 사람들은 내심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특히 릴라이와 고엘이 그랬다.
‘형법의 신이라고?’
‘이런, 미친. 생각보다 거물이잖아!’
일라이도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이름의 무게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형법의 신은 상급신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신이다.’
고엘도 예상치 못한 신에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러면 최고신 아니면 답이 없는데. 아이작이 정말 최고신을 진짜 뽑을 수 있나?’
아이작에게 도박을 걸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턱을 괸 채 코웃음을 쳤다.
“우리 애가 뽑을 수 있으니까, 순서 바꿔.”
적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 정해진 건 못 바꾼다니까…….”
“예, 이미 정해진 건 못 바꾸죠.”
흑의 추기경의 말에, 적은 이겼다는 듯 청을 보았다. 그래, 저것 봐라, 못 바꾼다고…….
“그러니 동시에 뽑으시죠.”
“?!”
예상치 못한 답에 적의 주교들이 흑의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아니!”
돈을 그렇게 처먹고 이러는 법이 어디에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흑의 추기경은 서늘하게 눈을 번득였다.
“왜. 못 하겠나? 먼저 뽑으면 그만인데, 네놈들은 버러지라서 설마 그것조차 어려운 건가?”
“크윽.”
“뭐 좋습니다. 청과 흑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적의 주교들이 두고 보자면서 나갔다. 뒤이어 모두가 나가고, 아이작이 아련하게 청의 가주를 보았다.
“할부지…….”
그 부름을 무엇이라 판단한 것일까. 청의 가주가 말했다.
“걱정 마라. 소환 못 해도 된다.”
“!”
슈리는 놀란 듯 가주를 보았다.
릴라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저쪽에서 어떤 신을 소환한다 한들, 이쪽은 그 신을 쳐부순다는 각오까지 하고 있단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아이작은 청의 가주의 발치에 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뇌물로 가져온 박스, 예비용으로 하나 더 있짢아요. 그거, 저 주세요.”
“…….”
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미친놈이!
* * *
“야!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의복을 차려 입은 견습들이 소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슈리는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형법의 신이라니, 생각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
그러나 보물함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작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아니, 오히려 잘 됐어.”
“뭐?”
애초에 아이작은 소환식의 순서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왜냐고?
어차피 소환식에 참가할 생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금하고 거래해서 소환식을 쨀 생각이었거든.”
“뭐?!”
그게 뭔 소리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아이작은 최고신을 상징하는 물품들을 내밀어보이며 큭큭 웃었다.
“어차피 금의 사제들이 이 물건들에 술법을 걸어둔 것 같고. 그걸 이용해서 난 드러눕고, 금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이었거든.”
슈리는 아이작이 내민 물품을 보며 땀을 삐질 흘렸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이놈은 걸려 있는 술법까지 눈치챌 수 있단 말인가?
‘이놈은 도대체…….’
하지만 소환식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말은 좀 충격이었다.
“왜?”
왜긴 왜야.
‘아무리 그래도 신을 소환해?’
그 개같은 놈들이 자신의 영혼을 알아볼 것이 아닌가. 하급, 중급신이면 몰라도, 상급신은 거의 백 프로였다.
‘아마 한 방일걸.’
그리고 보통의 견습들이랑 하면 몰라도, 나이저나 키나가 있다? 거의 무조건 상급신이 소환될 텐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뭐, 신은 계약할 때만 등장하니까. 그때만 피하면 사실 상관없거든.’
그래서 꾀병을 부리고, ‘본 소환식’에서 실패한 아이들이 소환하는 ‘추가 소환식’에 참여해서 따로 신을 소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뭐, 최고신으로 찍어누른다는 방법도 있지만.’
불확실한 건 피하는게 좋으니까.
‘하지만 형법의 신이라고?’
아이작의 입꼬리가 귓가에까지 올라갔다. 그놈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지! 푸헿!
오히려 이건 참가해야 한다.
[…드디어 자살하실 생각이 드신 겁니까? 커헉!]
어차피 성자가 되려면 한번쯤 다른 세력들을 찍어누를 필요성이 있었다.
게다가 청을 계속 조지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 않나.
‘오히려 잘 됐다.’
[하지만 형법의 신은 굉장히 강한 신 아닙니까?]
‘너 그놈이 누군지 몰라?’
[예…. 뭐, 주인님이 펜타곤에서 대가리를 날려버린 석상 주인이죠. 그 꼰대 신이요.]
뭐, 위스퍼는 잘 모를 만도 했다. 신계에 있을 땐 위스퍼를 거의 잠재워놓았으니까.
‘괜찮아, 그놈은.’
[…예??]
그리고 의복을 차려입은 사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키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고, 나이저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만 소환하면 저놈도 끝난다.’
그리고 이 중에서는 제일 먼저 소환한다.
그 순간, 나이저가 가장 먼저 신을 소환했다.
번쩍!
강력한 붉은 빛이 소환식장을 뒤덮었다. 그 광경에 모두가 감탄을 했다.
“오오 주신!”
“형법의 신이다!”
나이저는 입꼬리를 올렸다.
“됐다, 성공……!”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붉은 빛을 집어 삼키듯, 비교도 안 되는 빛이 떨어졌다.
쾅!
그 빛은 아이작의 몸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강력한 빛에 소환식장이 크게 술렁거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이었기 때문이다.
나이저는 당황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저게 진짜로 최고신을 소환했어?’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냐. 소환만으로는 아직 끝난 게 아냐.’
계약을 먼저 해야 한다.
무려 저만한 신이었다. 소환을 끝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소환을 끝내기 전에 이쪽이 먼저 계약을!
그리고 나이저는 일렁이는 붉은 빛을 향해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 아이의 영혼을 살펴봐 주십시오. 법에 어긋난 존재입니다.’
동시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떤 아이가 성자를 자처하느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위스퍼가 경기를 일으켰다.
[으아악! 진짜 나왔어요!]
그러나 아이작은 픽 웃었다.
‘응 괜찮아. 쟤 내 친구야.’
[…친구요?]
X 되게 해주마. 푸헿!
[…친구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