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22화 (122/272)

제122화. 상황 파악을 하시죠? (2)

해골왕.

그 이름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해지는 존재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신이 최고였다.

경박하고, 피조물인 주제에 신에 대한 예의와 경애도 없고. 하지만 능력은 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아서 굴복시킬 수도 없다. 수를 쓰면 오히려 즐거워하며 파훼하는 놈이 바로 해골왕이었다.

허리가 꼿꼿하게 선 윗선에서는 해골왕이 얼마나 얄미운 존재일까. 그런데 그런 놈을 겨우 봉인해놨더니…….

그 새끼가 눈앞에서 처웃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뭐? 지금 나랑 계약하자고 했나?’

형법의 신은 혼란스러웠다.

마왕 놈이… 아니, 저걸 해골왕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지만.

아무튼 신한테? 마왕이? 계약을?

그는 천천히 아이작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아직 어린 인간 꼬마였다.

피부색 하며, 이목구비 특성 하며, 신성제국의 인간에… 응, 그러니까 성직자…….

…시발, 뭐?

마왕이 성직자?

형법의 신으로서는 정신이 아찔해질 수밖에 없다. 마력과 성력이 동시에 쓸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 일단 확인부터 하자.

“뭔데.”

형법의 신은 미간을 찌푸리는 아이작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신의 눈은 영혼의 본질을 가려낼 수 있다. 아무리 신성력이 가득해 눈을 가린다 한들, 그 안에 들어있는 영혼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저 썩어빠진 영혼이 다른 놈일 리 없지.

상황이 어찌 된 건지는 자세히 확인해 봐야겠지만, 어쨌든 저게 신들의 포박에서 벗어나 신성제국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평민……?’

아니, 귀족이다.

-네 이름은?

“이놈이 멘탈이 터지다 못해 기억이 날아갔나. 이삭이라고 몇 번을… 아 참, 지금은 아이작이지.”

-아니. 그 이름 말고. 풀 네임 말이다.

“…풀 네임? 아이작 에슈아?”

…오, 갓 댐. 신이시여.

형법의 신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응, 그래. 생각해보니 분명 해골왕의 뼈를 먹은 게 에슈아의 꼬맹이였던 것 같다.

그래. 분명 그리 전달받았어. 해골왕의 자폭 때문에 인계의 일에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잊었지만 말이다.

해골왕의 육신이긴 하지만, 그래 봐야 손가락뼈 하나였다. 애초에 인간은 그걸 먹으면 죽으니 알아서 할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그걸, 해골왕이 먹어?

‘장난해?’

마왕이 본인의 힘을 찾은 거잖아. 과거보다 힘이 더 세지는 거잖아!

‘그보다 에슈아라니!’

5대 가문?

진짜 환장하겠다.

‘5대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대륙의 메이저 신앙으로, 신계에서도 강력한 파벌을 가진 신들의 가문이었다. 하필 그중 하나에 속해 있다니!

그 표정에 해골왕은 낄낄 웃었다.

‘아마 지금 혼란 그 자체일 거다.’

그리고 신들도 파벌이 존재했다. 그런 만큼 지금 얽혀있는 목만 몇 개인지 계산하고 있겠지.

만약 해골왕이 여기 있다는 게 밝혀지면 몇 명이나 줄줄이 피를 보게 될 것인지. 꼬리는 자를 수 있는지. 최소 피해, 최대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하지만 생각할 시간 따위를 줄 것 같으냐. 저게 신계에 돌아가기 전에 해결 봐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백 프로 딴짓 생각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이 또다시 최고신의 포션을 스윽 내밀며 푸헿 웃었다.

“최고신이 보고 계시는 앞에서 날 죽일 거야?”

저 말처럼 진짜로 보고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는 알 수 없다. 알게 뭐냐!

원래 이런 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승리하는 거다!

“뭐, 나야 상관없어! 날 죽이려고 해도 최고신 때문에 금방은 안 죽을 거고. 그럼 난 다 불 거야. 니네가 봉인 실패한 거라고!”

-……!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 처리하는 건 좋지만, 그래서 후폭풍은 어떻게 책임질 건데?”

후폭풍?

“날 처리하고 일이 종료되면, 이제 책임을 논하겠지. 어찌 되었든 책임질 놈이 있어야 사건이 끝난다는 거, 너도 잘 알 거 아냐?”

형법의 신은 땀을 주룩 흘렸다.

그 말대로다.

주역 신들은 그냥 해골왕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하하호호 끝낼 무리들이 아니었다. 반드시 징계가 논의되겠지. 심각해진다면 파벌의 죄로 번질 수도 있다.

거기도 어쨌거나 세력끼리 치고받고, 알력 다툼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넌 평생 위로 못 올라가. 하지만 나랑 계약하고 입 닥치고 있으면, 아무런 소동도 안 일어나고 좋단 거지.”

-네놈이 아무런 소동도 안 일으킬 리가 없잖아!

개소리 말라는 듯한 눈빛에, 아이작은 실망이라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에이. 친구야 나 몰라? 평생을 내 저주 때문에 고생했다고. 살아있는 몸을 가진 것 자체가 기적이야.”

-!

그러고 보니, 해골왕은 언젠가는 죽을 수 있는, 살아있는 육신을 바랐다. 남들은 죽음에서 초월할 수 있어서 좋지 않냐고 했지만, 본인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가슴을 치는 아이작의 눈에 광기가 돌았다.

“기껏 얻은 이 몸을 내가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감히 자신의 것을 빼앗아갈 것이냐는 눈빛이다.

“참! 경애심이 없으면 계약을 못 하지? 나 진짜 고마워하고 있어! 인간으로 만들어달라 했는데, 뻘짓해서 이 몸에 넣어준 건 존X 고마워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경애심은 있는 거다? 계약할 수 있는 거다?”

…그냥 저놈을 죽일까?

“아무튼, 난 이제 이 몸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는데? 인간이면 신들한테 X밥인 거 아는데, 설마 내가 ‘해골왕이 요기 있네!’ 하면서 설치겠어? 응? 그럴 리 없잖아. 착하게 인간으로 살아갈 거야.”

[와. 구라 보소.]

응, 구라 아냐.

[주인님이 얌전히 있을 리 없잖아요.]

얌전히 있을 건데?

얌전히 신들의 보물을 야금야금 뜯어먹고, 축내고, 안에서부터 내 걸로 만들고. 저 새끼들 걸 전부 빼먹으면서 얌전히 암살만 할 건데?

‘초월 계위에 도달하면 그냥 다 박살이야. 특히 나랑 계약서 쓴 장본인은 바로 죽여버릴 거야!’

아이작은 푸헿, 푸헤헤헤 웃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신계 동향을 야금야금 물어다 줄 놈이 필요하지.’

그런 의미에선 구면인 놈이 여러 가지로 좋다는 의미였다.

아이작이 가만히 있겠다는 말에, 형법의 신은 내적 갈등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계약이라니.

애초에 적의 신은 적가하고만 계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에슈아냐?

-아무리 그래도 안 된다. 법에 어긋난다.

칫, 꼰대 놈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아이작은 대놓고 썩은 표정을 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었다.

“야아, 잘 생각해. 나도 눈 뒤집히면 뭔 짓이든 다 할 수 있어. 자폭한 거, 기억 안 나?”

-…….

기억이 안 날 리가. 그것 때문에 아직도 뒷수습 중인 게 있어서 죽을 것 같은데.

‘저놈은 또라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에야, 그냥 원하는 걸 입에 물려주고 얌전하게 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형법의 신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필 에슈아와 계약이라.’

세계 평화와 자신들을 따르는 종자들의 멘붕.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답은 정해져 있다.

-진짜 가만히 있을 거냐?

“응. 최대한 그럴게.”

그래, 자신만 모르는 척하면 모두가 평화로워진다.

-좋다. 계약해주마. 보나 마나 다른 상급신에게 들키기 싫어서 나랑 계약하려는 거겠지만.

아이작은 대답 대신 웃었다.

뭐, 사실 저게 맞긴 하다.

성자가 되려면 상급신과의 계약이 필수인데, 다른 신들?

‘저놈처럼 날 보자마자 죽이려고 할 텐데. 계약을 해줄 리 없잖아?’

그리고 저놈?

‘본인의 모가지가 걸려 있는데 내 정체를 발설하는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냐?’

그렇게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었다. 그나마 신들 중에서는 말이 통하는 놈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럴 때였다.

-계약은 좋다만, 너도 너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뭐?”

-나는 그렇다 쳐도, 윗선에서 알면 진짜 난리 난다.

그들은 해골왕 하면, 진짜 싫어했다.

“너도나도 죽어. 그리고 나를 꼬셨다고 자만하지도 말고. 형벌의 신은 특히 조심해라.”

“아.”

저놈이 법을 만들고 관장하는 ‘형법’의 신이라면, 처형을 도맡는 ‘형벌’의 신이 있었다.

그놈도 적가의 주신이었다.

‘그쪽은 진짜 피도 눈물도 없지.’

설득할 수도, 거래도 통할 대상이 아니다. 힘도 힘이고, 솔직히 아이작도 지금 마주하면 위험하긴 했다.

-그놈한테 안 들키게 나도 보호를 하겠지만, 주의하라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내가 너와 계약하면 난리가 나겠지만… 뭐, 그 몸이니까 그렇게 이상하진 않겠지.

그 말의 의미를 잘 아는 아이작이 기다렸다는 듯 히죽 웃었다.

“그래. 니놈들이 정성 들여 만든 몸이니까 내가 들어온 거 아냐.”

-뭐, 최고의 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자가 되란 법은 없지.

“뭐, 인마?”

저 새끼가 남의 계획에 대고 저주를 퍼붓나 싶었지만, 형법의 신은 이성적으로 답했다.

-네놈의 육신을 제일 공들여 만든 건 맞고, 최고 스펙인 것도 맞다만. 오히려 그래서 수명이 짧다는 의미다. 괜히 성자 후보가 여럿 있는 줄 아느냐? 비슷한 대체재가 바로 ‘성자 후보’들이다.

“!”

-그 뒤로 여러 신들이 각 가문에 축복을 보냈거든. 성자 후보들은 그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이들이지.

그렇기에 형법의 신은 마치 기고만장하지 말란 듯한 눈빛을 했다.

-성녀도 최강이지만, 실질적 지배자는 교황이 아닌가. 다른 성자 후보들도 막강한 만큼, 방심 안 하는 게 좋을걸.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다른 몸으로 옮겨줄 수 있는데. 그래, 적가의 아이는 어떠냐? 나랑 계약하려면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지.

물론 일부러 겁을 주는 것이다.

해골왕에게 그 몸을 포기하라고.

‘그래, 저 미친놈이라면 오히려 그 몸의 하자까지 강점으로 바꿔 위로 올라올 놈이지.’

사실은 해골왕이 저 몸에 있는 상황 자체가 곤란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꼬셔서…….

꼬셔서…….

“이 몸, 사실은 내 생각보다 더 좋은 거구나? 그치?”

-…….

시발. 꼬실 수 있을 리 없지.

아이작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이 몸이 나쁘면 굳이 바꾸라고 할 이유가 없잖아?”

형법의 신은 질색하듯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하여간, 잔머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 돌아가는 놈이다.

-하지만 내 말이 거짓은 아니다.

“그래, 강한 만큼 내구도에 문제가 있을 거고, 다른 성자 후보들이 그 대체재인 만큼 강한 것도 잘 알았어. 푸헿. 푸헤헿.”

젠장. 안 듣고 있군.

‘하지만 저놈에게 질질 끌려다닐 순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안 들키고 저놈을 저 몸에서 빼낼 방법을 생각해보는 수밖에.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이작을 빤히 보던 형법의 신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사기를 친 건 맞으니, 미안함을 담아 충고 하나는 해주지.

“충고?”

형법의 신은 측은하게 아이작을 보았다.

-그… 에슈아에는 너무 정을 주지 말아라.

“뭐? 준 적도 없지만, 그건 왜?”

형법의 신은 대답을 삼켰다.

뭐… 성자의 몸도 그렇고, 하필 해골왕이 에슈아에 있는 것도 신들한테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필 에슈아라니. 저 천재에게 거름을 부어주는 격이 아닌가.’

마치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복수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계약은 성사됐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작과 형법의 신을 가두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그러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제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나오셨다!”

특히 적의 사제들이 지금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다른 신이 개입하지 못하게 수를 쓰신 거야.”

형법의 신은 적을 위하시는 적의 수호신이었다. 쉽게 잡아가라고 해골왕의 마력을 없애주신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우리의 수호신.’

‘그래, 이제 잡아가기만 하면 되는…….’

…되는?

순간 아이작을 보는 적의 사제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

“어어어어?”

신과 계약한 사제는 몸에 흔적이 남는다.

계약의 문장이다.

그리고 형법의 신, 즉 적가의 수호신의 문장이 번쩍 들린 아이작의 손등에…….

…뭐?

저기, 뭐?

“신이시여?”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되다니요?!

“이 무슨!”

-힘내라.

적의 신은 대답 대신, 슥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