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상황 파악을 하시죠? (4)
“이게 뭐야앍!”
아이작은 자신의 손등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마치 손에 거대한 바퀴벌레가 까꿍 하고 인사한 걸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게 왜에에!”
아이작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찼지만, 정작 슈리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뭐야. 그거 최고신 문장 아냐? 계약한 거야?”
“아니!”
아이작은 부정하며 숨기려했지만, 그의 팔을 붙잡고 계약을 확인한 슈리의 얼굴은 더없이 밝아졌다.
아니, 밝아지다 못해 감격에 겨운 얼굴이다.
“이 자식, 역시 다 뜻이 있었구나!”
뭐, 인마?!
뜻? 무슨 뜻!
“사실은 최고신하고 몰래 계약하려고 한 거였어!”
아니! 이건 내 의도가 아닌데!
“역시 영악하고 치졸한 너답다! 믿고 있었다, 이 자식!”
뭐지? 칭찬 같은데 왜 기분이 나쁘지?
그 상황에 금의 사제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당황하다 못해 동공이 풀린 눈빛이다.
물론 최고신이 청의 손에 넘어간 것도 당황스럽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방금 아이작에게 귀한 터주신을 넘긴 직후였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통수를 친다고……?
재물신을 받자마자 낼름 최고신을 계약해버린다고……?
청 이 새끼들은 윤리 의식도 없는 새끼들인가……?
그 눈빛들에 아이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내 의지 아닌데.”
“아이작! 너 이 자식, 역시 넌 대단해!”
“아니라고, 낌슈리 이 띱때야!”
“그래! 난 네가 이렇게 악독한 놈일 거라고 믿고 있었지! 재물신까지 뜯어내다니!”
찌발!
그러나 아이작이 뭐라고 하든 금의 사제들은 넋을 잃은 채 아이작의 손등을 보고 있었다.
‘눈속임…은 아니다.’
차라리 계약한 척한 거면 좋겠는데, 저건 진짜 계약 증표였다. 그래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이중으로 계약했다고?’
미친. 그게 가능해?
그것도 견습이?
하물며 최고신을?!
그들로서는 정신이 아찔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저 새끼가 재물신만 쏙 빼먹고 밑장 빼기를 했다, 이거지.
‘청 이 새끼들. 적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금도 농락할 생각이었어!’
그래, 지금도 금을 엿 먹이고 좋아서 실실거리고 있을…….
“으아악! 계약 파기이이!”
“……?”
정작 아이작은 자신의 손목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붙들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찌발, 이건 반칙이야! 아 계약 파기이이이! 헬프으으!”
시바, 뭔 경우지 이건?
심지어 슈리의 옆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놈이 이쪽으로 굴러와서는…….
“아씨! 빨리 계약 파기 방법이나 알려줘! 재수 없는 때끼들아!”
추기경의 멱살을 잡을 듯 협박을 하는데? 금의 사제들로서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 거래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뭐?”
“내가 한 거 아니야아앍!”
아니긴 뭐냐가 아니냐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금의 추기경이 쯧,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손을 이리 내봐라.”
“각하!”
“네 본의가 아닌 건 알았으니, 계약을 파기해주겠다.”
“각하! 지금 이딴 놈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성직자가 안 믿으면 어쩔 거냐.”
“!”
“그리고 청은 그런 놈들이 아니다. 사람을 속이는 건 비열한 적가뿐이다.”
“각하!”
그래, 차라리 본인이 의도한 게 아닌 쪽이 낫다. 꼬맹이의 술수에 넘어갔다는 쪽이 훨씬 열 받지 않는가.
그리고 최고신을 다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금의 추기경은 한 손으로 아이작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소매를 털며 성법을 발동했다.
“신들과의 계약 파기는 남이 강제로 할 순 없다. 하지만 네가 정녕 파기하고픈 마음만 있다면,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 쉽게 파기되지.”
신에게 신앙심을 가지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우릴 속일 마음이 없었던 거라면, 도와주마.”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신과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파기된다.”
“알았쯤.”
금의 추기경과 아이작은 한마음이 되어 최고신과의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다.
“자, 그럼-”
“눼. 마음 먹어써여!”
아이작의 말에, 금의 추기경은 계약 파기 성법을 발동했다.
-<인연 소각>.
금빛의 성법이 아이작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신과의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의식에 맞춰서 성법이 계약 증표를 지우는…….
“…….”
“…….”
금의 추기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계약 파기 성법을 썼는데, 손등의 계약 증표가 너무나 멀쩡하다.
“……?”
뭔가 잘못됐나?
금의 추기경은 미간을 좁히며 딱딱하게 말했다.
“딴생각하지 말고. 집중해라. 집중해서 신과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생각해. 그러기만 하면 된다.”
“아씨 집중했는데. 알았써여.”
“그럼 다시.”
“눼.”
다시 금빛의 성법이 아이작을 감쌌다. 그리고 ‘인연 파기’ 성법에 따라 계약의 증표가……
“……”
“……”
왜 안 지워지지?
그쯤 되자 금의 사제들의 얼굴도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다시.”
살벌해지는 추기경의 목소리에 금의 사제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다시.”
“다시.”
그렇게 금색의 빛이 펑펑펑, 서른 번쯤 터져나왔을 때. 금의 사제들은 추기경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작은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계약 파기 안 되는데여.”
그쯤 되자, 아이작을 보는 금의 추기경의 얼굴이 볼만했다.
…이 새끼. 지금 우롱하는 건가?
파기할 생각 없는 거지, 이거?
추기경으로서는 빡칠 만도 했다.
슈리는 크으, 역시 저 양아치 꼬맹이가 그럼 그렇다는 듯 뿌듯해했고, 금의 사제들은 핏대를 세웠다.
“지금 각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그 성법은 본인이 계약을 파기할 마음이 없으면 발동하지 않는다!”
“계약을 파기할 생각도 없었구나!”
하지만 아이작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미친 듯이 마음먹었다고!
계약 파기하겠다고, 최고신 꺼지라고 수천 번은 외쳤거늘! 오히려 계약이 파기 안 되니 억울한 건 자신이라고옭!
왜 파기 안 되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이거 내 의지가 아니야! 신이 막은 거야!”
“신은 그 정도로 인간에게 애착을 품지 않으신다. 계약이라면 몰라도 계약 파기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
아오옭! 억울해!
‘최고신 이 때끼! 이 자식은 뭔데 멋대로 계약을 하고, 심지어 파기도 못 하게 해!’
그러나 슈리는 기쁜 듯 만세를 외쳤고, 위스퍼도 포기하라는 투였다.
[뭐, 오히려 주인님께는 좋은 거 아닙니까? 원래 용량이 안 되어서 둘 이상은 계약이 힘들잖습니까. 교황도 아닌데 상급신을 두 명이나 계약하다니, 이 정도면 오히려 퍼주기…….]
‘안 좋아아아아!’
결국 그쯤 되자, 금의 추기경은 핏대를 세우며 다가왔다.
“준 걸 도로 내놔라.”
“!”
아이작에게 우롱당한 걸 깨달은 금의 추기경은 터주신을 회수해가려고 했다.
“신성한 거래를 모욕하다니.”
“아니! 내 의지로 계약한 게 아니라니까?”
“그게 고의든 아니든, 어쨌든 계약 불이행이다. 내 말이 틀리나?”
그 말에 아이작은 눈을 또르륵 굴렸다.
어… 계약 불이행은 맞지. 응, 맞네.
“정녕 실수면 건네준 터주신을 내놔라. 그게 도리다.”
심지어 부득불 터주신을 회수해가려는 걸 보면, 진짜 귀한 물건인가 보다. 분명 최고신이라는 말에, 그래도 체급이 맞는 것으로 가져온 것이겠지.
호구라서가 아니라,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것이다. 최고 가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슈리도 금의 추기경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 끄덕거렸다.
사실 상황상 돌려주는 게 도리긴 하다.
‘터주신이 아깝긴 하지만, 최고신하고 비교하면 뭐.’
“그래, 아이작. 더 좋은 걸 얻었다 생각하면…….”
그러나 눈알을 또르륵 또르르륽 굴리던 아이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쓥니다!”
그렇게 냅다 도주했다.
그가 터주신을 들고 튀자, 서있는 사제들의 표정이 볼만했다.
어… 그러니까 이거 먹튀… 먹튀?!
“…저 미친놈이?!”
* * *
“이중 계약이라니!”
뜻밖의 소식에 견습들은 난리가 났다.
“이런 미친…….”
“두 명이랑 계약하는 게 가능한 거야?”
펜타곤의 결과를 앞두고 연회장에 모인 견습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혼란과 경악,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아니, 믿을 수 없어 한다는 말이 더 맞겠지만.
“유일하게 키나가 쌍둥이 신과 계약해서 두 명이잖아. 하지만 아이작은 아예 신앙이 다른 신으로 둘인 거잖아!”
“심지어 하나는 최고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다들 놀랐지만, 그들이 이렇게 술렁거릴 만한 이유는 또 있었다.
“야, 이렇게 되면 흑의 펜타곤 순위는 어찌 되는 거야?”
원래는 격이 제일 높은 쌍둥이 신과 계약한 키나에게 1위를 줘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흑의 추기경은 가차 없이 공동 1위… 아니, 사실상 공동 2위로, 1위를 없애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고신도 아닌데, 상급신들끼리 우열은 무슨 우열?
-하, 하지만 각하. 흑의 펜타곤의 우승 기준은 가장 좋은 신을 뽑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가장 좋은 신? 그 꼬맹이들이 그렇게 잘났나?
-예, 예?
-고작 상급신들 간에 우열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대로면 항의가…….
-착각 말라 해라. 신앙에 우열은 없다. 코흘리개들이라 그런지 주제도, 도리도 모르는군.
-…그럼 우승 상품은요?
-공동 2위 따위에 뭘 주나?
-…….
이 인간.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사실은 상품을 주기 싫어서 2위로 쑤셔 박은 거 아냐?
아무튼, 그래서 1위는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최고신이 나와버렸네.
아니나 다를까, 그때였다.
“떠들지 말고 앉아라.”
“!”
연회장에 문을 열고 가면을 쓴 흑의 사제들이 들이닥쳤다.
흑의 신앙은 소속된 성직자들 전원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만큼, 얼굴을 아는 자들이 거의 없다. 심지어 피부의 노출을 피하듯 온몸을 꽁꽁 묶은 듯한 사제복에 검은 장갑까지.
‘고문 기술자인가……?’
소름 돋는다면 소름 돋고, 음침하다면 음침하다.
그 기묘한 긴장감 속에서 흑의 사제들이 말했다.
“순위 변동이 있었다.”
“!”
그 말에 견습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토론 결과, 흑의 펜타곤의 1등은 아이작 에슈아가 되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환호와 경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면 아이작을 싫어하는 이들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흑의 사제가 말했다.
“아이작 에슈아는 후에 추기경의 집무실로 가서 보상품을 받아가도록.”
“와아!”
청의 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거면 펜타곤 최초로 청이 우승을 차지할 수도 있어!”
항상 무시받았던 청으로서는 가슴이 벅찰 수밖에 없다. 하물며 최고의 기록으로! 아이작이 최고신이라는 업적을 남겨가면서!
그래, 그런데……!
“그 아이작은 어디에 있냐?”
아이작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아이작이 없다. 청의 팀은 슈리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슈리. 아이작은?”
“…알 게 뭐냐.”
슈리는 골이 아프다는 듯 한숨만 쉬었다.
아이작 그놈, 터주신을 먹튀하고 나서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금의 사제들이 아이작을 찾는 건 봤는데.’
“뭐, 그래도 청이 펜타곤 우승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아이작도 이걸 들으면 좋아할 거야. 최종 결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흑의 사제들은 아직 흥분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이걸로 지난 1년에 걸친 펜타곤 평가는 모두 끝났다. 제군들은 이제 견습 기간 동안 익힌 기본기를 토대로, 본격적으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선배 사제들과 호흡을 맞추게 되겠지.”
그 말에 견습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으아…. 그 유명한 텃세 밭의 시작인가.’
‘신고식도 장난 아니라던데.’
물론 선배들이라면 이미 펜타곤에서 주교들을 보긴 했으나, 본래 아버지뻘보다 바로 한두 살 위가 더 무서운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문 근처 복도에 젊은 사제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기껏해야 십 대 후반인 견습들과 달리, 이십 대부터 삼십 대까지. 척 봐도 관록이 있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2품 사제들이었다.
“견습 졸업식은 2월의 신년 연회 때다. 1월에는 신년감사절 휴가로 모두 집에 돌아갈 테니, 그전에 선배들과 교류를 만들며 친해질 수 있으면 좋고.”
…친해져? 친해지라고?
이제부터 아주 굴려주겠다는 얼굴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데?
‘하필이면 2품 사제들의 총괄장까지 있잖아.’
‘총괄장은 에이스 아냐? 왜 여기에 왔어?’
‘뭐, 아이작한테 관심이 있다는 증거겠지.’
뭐, 아무래도 좋다.
저 2품 사제들의 대장인 총괄장 파벌은 세력도 세고, 잘못 얽히면 졸업식 이후에도 피곤해진다. 오히려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이작이 쓸데없는 짓을 안 하도록 해야지.’
괜히 졸업하기도 전부터 찍혀서 좋을 건 없지.
뭐. 아이작 본인도 생각이 있으면 괜한 짓은 안 하겠지만…….
“아, 이 시커먼 때끼들은 뭐야!”
“!”
금의 사제들에게 쫓기는 듯한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을 잡아라!”
“터주신을 내놔!”
그리고 그 모습에 슈리가 황급히 일어났다.
“아이작! 빨리 이리 와! 선배들이 있잖아! 총괄장 앞에서 사고 치지 말고 오라고!”
총괄장은 멀리서 보이는 그림자에 쯧, 혀를 찼다.
“저 아이가 그 유명한 아이작 에슈아인가.”
“소문대로 품위라곤 느껴지지 않는 망아지로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아이작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에슈아! 졸업에 대해 설명 중이니까, 빨리 자리로 돌아가라!”
그들은 아이작에게 길을 안내했지만, 아이작은 되레 눈을 번득였다.
“하씨, 바빠 죽겠는데! 왜 길막이야!”
아이작은 도약 성법을 다리에 걸었다. 그리고 높이 점프하여 선배 사제의 머리를 발판 삼아…….
…뭐?
뭘 발판 삼아?
콰직!
하필 선배들 중에서도 총괄장의 얼굴을 밟았다.
…그래. 아주 시원하게.
…시원하게?
“미안! 븅딱 때끼야! 내 발판이나 되라!”
“?!”
그 광경을 보는 슈리와 청의 팀의 동공이 풀렸다.
…시발, X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