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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27화 (127/272)

제127화. 타락했어요 (2)

릴라이가 찾아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아이작의 어깨를 붙잡고 새하얗게 질려서 이렇게 외쳤지.

“아이작! 여자친구는 아직 이르다!”

…찌발. 얘는 또 뭐래냐.

하지만 릴라이는 심각한 얼굴로 조카의 어깨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그것보다 노예라니! 아직 관계는 네게 일ㄹ…….”

“릴라이 님! 지금 성인도 되지 않은 도련님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결국 유모 아실리까지 참전하자 아이작은 하하, 떠나가는 구름만 보았다.

하, 찌발. 망할 낌슈리. 이 새끼가 도대체 말을 어떻게 전달한 거야?

수도의 에슈아 공작저에 도착한 아이작은 핏대를 세우며 웃었다.

사실 아이작은 슈리에게 샤브나크에 대해 가문에 전달해 두라고 했다.

‘황궁에 들어가려면 신분은 꼭 해결해야 하거든.’

황궁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엄격한 검사를 받게 되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제국에 머물려면 적절한 신분을 만들어줘야지.

그리고 신분 위조? 에슈아 직계들이 받을 수 있는 개인 종자나 호위기사만 한 게 없다.

‘뭐, 적폐 찬스를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쓰겠어.’

아무튼 그래서 슈리한테 신분 위조를 부탁해놨는데.

“여자친구는 이르다! 하물며 누군지도 모르는데 가문에 들이겠다니! 이 결혼은 반대다!”

“…….”

이 찌발 놈들이???

아무래도 에슈아는 슈리의 말에 다른 의미로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실제로 아이작이 해골왕 스파이 잡으러 간다는 말에, 온갖 부적을 만들어주던 릴라이는 거의 맨발로 뛰쳐나왔다.

“할아버지께서도 노하셨다! 교황청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거냐!”

“…….”

아이작은 릴라이 옆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슈리를 흘겨보았다.

나중에 낌슈리 놈부터 조져야겠군.

하지만 일단은 오해를 푸는 게 중요하겠지.

“그런 게 아닙니다. 쭉부님.”

“뭐?”

“이제 견습도 끝났고, 견습 졸업식 이후엔 타지로 나갈 일도 생기지 않습니까. 임무나 수련을 위해서 제국 밖으로 나가는 일도 생기겠죠.”

“!”

“금의 펜타곤 때 잠깐 제국을 나가보긴 했으나, 거긴 국경 근처라 위험한 곳도 아니었고 고작 마실 나간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훨씬 더 넓고 위험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런 세상에 부합하는 실력을 지녔기에 호위로 삼고자 한 겁니다.”

아이작은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샤브나크를 가리켰다.

샤브나크를 본 릴라이와 아실리는 서로 당황했다.

“샤브라고 합니다.”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내려 묶은 머리, 맹금류를 보는 듯한 신비로운 금안. 하얀 피부에 웃음기가 전혀 없는 서늘한 얼굴.

릴라이와 아실리는 마치 연적을 보듯 샤브나크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이 아이작의!

아이작 도련님의!

‘여자친구!’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의 육체부터 영혼까지, 무엇하나 놓치지 않고 성심껏 보듬겠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샤브나크가 말하는 영혼이란 ‘해골왕’을 뜻하는 거니까.

그리고 에슈아의 혈육은 저주스러울지언정, 그 육신과 영혼을 모두 지키며 주군을 열심히 모시겠다는 의미지만.

…유, 육체?

…여, 영혼?

의미를 모르는 성직자들로서는 동공 지진을 일으킬 수밖에.

“이래 보이지만 봉사 능력에서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주인님의 영혼을 위해 밤낮으로 봉사할 생각입니다.”

영혼을 위해 봉사… 봉사?!

릴라이와 아실리는 더욱 경악했지만, 샤브나크는 눈을 번득였다.

-알았지? 특히 에슈아 놈들한텐 절대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그래, 주인님은 신성제국이 쫓는 해골왕! 주인님은 무려 본인의 위험을 감수하고 미천한 자신을 받아주신 것이었다.

성직자들과 함께 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 큰 은혜는 갚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인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성직자들은 모르는 기술(마법)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

“!!!”

성직자들은 모르는 기술…이라니?!

“아이자아아악!”

가족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아이작은 미간을 짚었다.

아니, 이 녀석아. 오해가 더 생겼잖아.

그러나 정작 샤브나크의 무표정한 얼굴엔 ‘이 정도면 되었겠지.’란 자부심마저 담겨있다.

아이작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내가 나서야겠군.’

아이작은 진지한 눈으로 외쳤다.

“쭉뿌님. 아이작은 아직 어립니다! 쑨수해서 아무것도 몰라여! 뿔순한 의도 따위 전혀 없습니다!”

“……?!”

…더 수상해!!

릴라이와 아실리의 표정이 볼만했다. 원래 돈에 관심 없다는 사람이 제일 돈 욕심이 많지 않나.

이건 마치 음흉한 어른이 ‘전 순수해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변명하는 눈빛!

물론 아이작은 아직 10살… 뭐, 곧 있으면 생일이니 이제 11살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두뇌가 어떻게 11살의 것인가.’

견습들의 과제 논문을 본 아카데미 교수들은 손을 떨며 놀라워했다. 자기 외엔 다 쓰레기 취급하는 그 흑의 추기경조차 아이작의 논문을 10분 동안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니, 말 다했지.

아무튼, 평범한 11살짜리와 다르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 관계에 대해 믿어도 되는 걸까?

‘최고신과 계약한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건만……!’

청의 가주도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고신을 가진 시점에서 아이작은 힘을 얻었지만, 더욱 위험해질 것이라고.

-아직 최고신의 힘을 다루기엔 힘들겠지. 잘못하면 폭주해서 이단의 길로 샐 수도 있다. 그 힘을 다루게 하려면 철저하고 엄격하게 가르쳐야 한다.

최고신의 힘은 에슈아를 흥하게 할 수도 있지만, 망하게 할 수도 있는 최강의 힘! 이상한 쪽으로 타락하지 않게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 모습에 아이작은 벌레 보듯 질색했다.

‘누가 빌어먹을 청 아니랄까 봐. 이성 문제로도 난리군.’

뭐, 청은 절제를 통해서 신앙심을 증명하는 신앙이니 이해는 하지만.

‘릴라이 놈도 그래. 설마 저 얼굴로 동정… 아냐아냐. 가능성 있어. 청은 그러고도 남아!’

아이작의 눈빛이 측은해졌다.

“아무튼 네 개인 종자는 안 된다! 정체를 모르는 사람을 들일 순 없어!”

그런데 그때였다.

“뭐 어떠냐. 적의 후계자도 밟은 녀석이 호위라고 데려올 정도면, 실력이 좋단 거겠지.”

“!”

처음 보는 얼굴이 저택에서 나왔다.

파란 머리에 안경을 쓰고, 매우 영리하게 생겨서 사제보단 학자나 책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네가 아이작이냐? 생각만큼 못돼 처먹게 생기진 않았구나?”

아이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데 이 재수 없는 때끼는 보자마자…….’

그가 주머니에서 슥 뭔가를 꺼내려 하자, 슈리가 당황했다.

‘딸랑이는 안 돼!’

그때, 안경 쓴 청년이 말했다.

“릴라이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나는 네 둘째 숙부인 벤야민이다.”

딸랑이를 꺼내려던 아이작의 손이 우뚝 멈췄다.

…벤야민?

차남?

‘에슈아의 돈 관리자?!’

아이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곤 언제 딸랑이를 꺼냈냐는 듯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둘째 쭉부님. 아이작이 부족한 게 많아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한 게 너무 많아여.”

난생처음 보는 착한 아이 얼굴에, 슈리는 기겁하다 못해 주저앉을 뻔했다.

뭐야, 쟤 왜 저래. 미쳤나?!

하지만 정작 릴라이는 그 모습을 보며 크, 입을 틀어막았다.

“보십시오, 형님. 제 말대로 역시 착한 아이죠?”

허, 착한 아이라.

“…그래. 매일 나한테 연락해서 ‘아이작이 기특하게도 황금 똥을 7일째 쌌네.’ ‘아이작이 처음 숙부님이라고 불러줬네.’ 지랄하면서, 이렇게 착한 애는 없을 거라고 자랑질을 처하던 그거 말이지.”

심지어 황실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비싼 전서구를 그딴 식으로 낭비하던 그거.

아무튼 확정은 아니지만, 저게 아버지가 눈여겨보고 계시는 후계란 건데…….

“쭉뿌님이 에슈아의 재정을 총괄하시는 분 맞져?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얘, 진짜 가주 자리 맡겨도 되는 거냐?

벤야민은 수상하다는 듯 보았지만, 정작 아이작은 입꼬리가 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차나암! 너어는 내가 이제부터 아주 예뻐해주마.’

아주 노예로 만들어서 하나씩 재산을 빼돌리게 해주지.

곧 벤야민이 찝찝하다는 듯 조카를 보면서도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튼 호위라고 데려왔으니, 그 실력부터 확인해보면 될 일. 들어가라. 가주님이 부르신다.”

…할부지가?

* * *

“네겐 실망이구나.”

세페트 저택.

나이저는 아버지의 싸늘한 말에 이를 악물었다.

늘 여우처럼 웃는 아버지가 웃지 않는다는 건, 어지간히도 심각한 상황이란 의미다.

“형법의 신이 어떤 존재인지, 너는 벌써 잊은 모양이야.”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네가 소환한 신을 어떻게 아이작이 계약했다는 거지?”

“그건……!”

“네가 포기할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계약은 먼저 먼저 소환한 자한테 우선권이 있다.”

아니이! 그거야말로 제일 억울하다니까요!

“정말 아닙니다! 무려 1급신인데 제가 왜 포기를 하겠습니까!”

각 가문에는 가문신들의 서열표가 있었다. 그 최정점에 있는 신들을 왜 포기한단 말인가.

“갑자기 저들끼리 사라지더니, 신께서 그놈과 계약을 한 것입니다. 마치 그놈과 계약하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한 것처럼이요!”

적의 추기경은 관심을 가지듯 눈을 가늘게 떴다.

계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

뭐지?

그 정도쯤 되면, 필시 ‘영혼’이랑 연관이 있는 문제일텐데? 그만큼 특별한 영혼이라는 건가?

‘정말로 그게 성자라고?’

아이작 에슈아, 점점 더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였다. 아무래도 더 깊게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형법의 신이 없으면 예의 계획은 진행할 수 없다. 예의 보물도 찾을 수 없다.”

“!”

적은 수백 년 전부터 찾아오던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형법의 신이 있어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물건.

“교황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걸 에슈아 따위에게 빼앗길 순 없지.”

나이저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가, 그놈한테 가서 신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아니, 되찾지 않아도 된다. 장남이 곧 돌아올 테니.”

장남이라는 말에 나이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형벌의 신’을 가진 역대급 천재가 가문에 돌아온다니!

장담컨대 아이작도, 자신도 그놈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형법의 신은 녀석이 되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너는 대신 아이작과 친하게 지내 형법의 신께 정보를 빼내라.”

“치, 친하게… 지내라 하시면.”

“종이 되라고.”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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