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타락했어요 (3)
<청의 울타리>.
수도의 저택은 본 저택과 함께 에슈아 직계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장소였다.
그리고 사제가 되겠다고 본가를 가출해서 지금껏 교황청에서 짱박혀 있던 아이작으로서는 기대가 큰 장소이기도 했고 말이다.
왜냐고?
-넌 한 번도 안 가봤겠지만, 수도 저택 지하에는 비밀의 방이 있대.
세상에, 숨겨진 방이라니!
-만쉐! 보물의 방! 금덩어리의 방!
-…아니, 이 미친 새끼야. 천하의 에슈아인데 단순한 금고는 아니겠지. 아무튼 역대 에슈아도 열지 못한 방이라. 거길 열면 가주가 될 수 있을 거란 소문이 있어서 모든 에슈아는 기를 쓰고… 야, 듣고 있냐?!
슈리는 에슈아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 말했지만, 알게 뭐람!
‘돈!’
그래! 펜타곤도 끝났겠다. 이제 합숙도 끝나니, 출퇴근할 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에슈아의 숙명에 보탬을 주고자 더러운 본가 따위가 아닌, 수도 저택으로 기어들어 온 것이거늘!
“이놈이 벌써부터 못된 걸 배워 와? 청이 그러라고 가르쳤냐.”
이 때끼가 밥도 안 주고 사람을 세워두네!!
가주의 분노에 아이작은 핏대를 세웠다. 그 분노의 화살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아는 아이작이 눈을 부릅떴다.
“호위입니다, 할부지.”
그보다 이 인간은 공양제도 끝났는데, 왜 본가로 안 가고 여기에 있는 거야.
사실 <공양제>는 아이작의 독보적인 신 계약 때문에 화려하게 마무리되었다. 특히 적의 후계자만 계약할 수 있다는 형법의 신이 아이작과 계약한 게 큰 이슈가 된 모양이었다.
-다른 신앙의 신이 본인의 종자를 냅두고 택할 정도의 아이라니.
-그러고 보면 교황은 원래 5대 신앙의 신을 품는다고 하지 않소.
-그래요? 지금 교황가는 금가의 신만 품는 것 같던데…….
-금가의 신밖에 못 품는 게 아니고요……?
-어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데 최고신을 소환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인가요?
-허, 사실이겠어요? 그게 어떤 존재인데.
-아니, 공식적으로 발표하진 않았으나, 흑의 펜타곤의 순위가 바뀐 걸 보면 사실일지도요.
-오오!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죠.
지금도 그 소문은 구경꾼들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퍼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겨울 준비를 위해 귀족들이 영지로 흩어지는 만큼, 청의 가주도 본가에 가야 하는데.
“네놈이 수도에 짐을 푼다고 해서, 나도 풀었다.”
아니, 왜!
“최고신의 힘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필요 없어! 해지하고 재물신하고 계약할 거야!
[가능할까 싶지만요.]
닥쳐!
“이 할아비가 본가에 가지 않는다니, 모두가 서운해하며 말렸지만… 그래도 여기에 남았다.”
그럼 그냥 내려가면 됐잖아!
가주는 어째서인지 꿋꿋하게 일부러 수도에 남았다는 걸 강조했지만, 정작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칫, 할부지가 없을 때 샤브나크를 날치기로 통과시키려 했더니.’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지.
아니, 오히려 할아버지한테 통과 받으면 뭐라고 할 사람도 없어지려나?
“아무튼 견습을 통과하면 3품 개인 종자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이왕이면 제가 원하는 사람으로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주는 샤브나크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그런 가주의 눈이 정체를 살피듯 가늘어졌다.
마치 영혼까지 살펴보는 듯한 눈빛에 아이작조차도 잠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추기경들은 본래 마왕을 잡는 성직자들의 수장.
‘설마 십사육마란 걸 눈치챘나?’
물론 인간이 형법의 신을 이용한 인간화를 쉽게 눈치챌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청의 가주는 아이작도 인정할 정도로 몹시 강한 자였다. 그래서 기척을 눈치챘나 싶었지만-
“아직 어린놈이 뭔 결혼이냐.”
“눼?”
“호위면 실력이 좋아야지.”
그러자 샤브나크가 눈을 번득였다.
“걱정 마십시오. 실력에는 자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듣다 못한 릴라이가 혀를 찼다.
“자신감은 마음에 든다만, 아이작은 이 숙부랑 해골왕을 잡으러 가기로 했다. 아이작도 이 숙부의 호위를 더 좋아할……”
“아녀. 이제 필요 없쪄요. 샤브가 더 좋아요.”
“?!”
릴라이가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자, 아실리가 나섰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훈련받은 청의 기사를 이길 순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아니. 에슈아 사람보다 이 누나가 좋아.”
이번엔 아실리조차도 쾅 충격을 받은 듯했다. 오직 슈리만이 ‘봐봐, 여자친구라니까.’ 하고 도끼눈을 할 뿐.
결국 릴라이와 아실리의 눈빛이 희번덕거리며 반짝였다.
“가주님. 제가 실력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니, 내가 하지.”
곧 릴라이가 분노한 눈으로 검을 빼 들고 다가오자, 샤브나크가 손을 우득거리며 사념을 보냈다.
[주인님. 죽여도 됩니까?]
‘…안 된다.’
샤브나크는 순수 진마가 아닌 만큼, 진마에 비해 약점이 있긴 했지만, 최강 9계위 마족이었다.
‘잘못하면 쟤들 다 죽어…….’
아니, 생각해보면 여긴 성직자 저택이었다. 샤브나크도 마력을 쓰지 않고 순수한 격투기만으로 상대할 테니, 괜찮으려나?
‘음, 아니지.’
오히려 저만한 이들이 겨뤄줘야 샤브나크의 실력을 단번에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저놈이 에슈아 사람보다 좋다고 할 정도니, 실력이 쓸 만한 거겠지. 실력 테스트에서 이기면 바로 우리 가문 사람으로 받아들이마. 1품 기사의 자격을 주지.”
그 말에 가만히 있던 벤야민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아버지! 1품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최소 10년은 공적을 쌓아야 받는 상급 기사의 작위가 아닙니까!”
“뭐, 공양제에서 에슈아의 이름을 드높이고, 세페트에게 크게 한 방 먹인 것에 대한 보상이다.”
“10살짜리의 보상으로는 너무 과합니다만!”
“뭐, 릴라이의 작위를 빼앗아주면 된다.”
“아버지?!”
가주의 말에 아이작도 입꼬리를 올렸다.
크, 역시 할부지, 말이 통해!
좋아! 술술 풀리는구나!
심지어 1품 기사라니!
따까리인 3품이랑 비교하면 대장급이니, 말도 안 되는 신분 상승이었다. 릴라이와 아실리와 동급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제국에서도 움직이기 쉬워지는 만큼, 신들을 엿 먹이기도 편해진다.
‘좋다. 싸워라, 샤브나크! 멋지게 이기는 거야! 에슈아 놈들 등에 빨대를 꽂는 거야!’
[예.]
“조카를 빼앗아가게 둘 것 같으냐.”
릴라이가 잘됐다는 듯, 눈을 번득이며 팔을 걷어붙일 때였다.
“누가 니들이 하랬냐?”
“…예?”
가주가 목을 우득거렸다.
“내가 한다.”
“…….”
그 말에 모두가 제 귀를 의심하듯, 비명을 질렀다.
“예?!”
“아버지께서요?!”
이에 당황한 건 아이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할배에!’
할배가 직접 나서는 건 좀 사기지!
샤브나크도 좀 긴장한 눈치였다.
릴라이나 아실리라면 몰라도, 추기경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추기경에게 추격을 받았던 샤브나크가 아닌가.
물론 지금은 힘을 회복했고, 직접 부딪쳤던 건 백과 적의 추기경 쪽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청의 추기경은 무식하게 강했다. 괜히 금가만 아니었으면 교황이 되고도 남았을 거란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상대라면, 샤브나크도 온 힘을 다 쓰게 될지도 모른다. 자칫 샤브나크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마력을 배제한 상태로 할부지랑 붙을 수 있을까?’
역시 이건 막는 편이 낫다.
“할부지, 3품 기사여도 되니까, 테스트 상대는 숙부님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만!”
“허, 고작 추기경 하나 상대하지 못해서야 어디 손주 놈의 호위를 할 수 있겠느냐.”
아니, 보통은 추기경을 상대할 일이 없는데요?!
그러나 그 순간, 청의 가주가 사라졌다.
가주는 순식간에 샤브나크의 뒤를 잡았다.
‘!’
쾅!
가차 없는 손날에 에슈아 일가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아이작이 실력이 좋다며 데려왔다지만, 그래봐야 인간의 범주였다.
하지만 청의 가주는 반신의 경지에 오른 성녀나 교황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자!
상대 운이 너무 나쁘다.
‘이걸로 끝…….’
그러나 곧 그들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에게 뒤를 잡힌 줄 알았던 샤브나크가 가주의 일격을 피해낸 것이다.
“!”
아니, 피해낸 정도가 아니다.
‘막았어?’
가주의 공격을 막아낸 샤브나크가 역공을 날렸다.
쾅!
가주의 손날은 권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진심이 들어갔다는 의미다. 마침내 가주의 권에서 화려한 성법진이 생겨났다.
쿵!
성법진과 함께 일격은 점점 거칠어져, 저택이 뒤흔들리고 기둥이 박살 났다.
그 광경에 아이작은 골이 아픈 듯 미간을 움켜쥐었다.
‘할배에에! 이쯤 되면 그냥 샤브나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거 아니냐고!’
이미 실력 테스트의 단계가 아니잖아!
그러나 정작 샤브나크를 상대하고 있는 가주는 의외로 놀라고 있었다.
‘왜 이만한 녀석이 저 망아지 놈한테?’
백 프로의 힘을 내지 않고 있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몇 번 주먹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손자 놈한테 너무 아까운데?’
원래는 손자에게 붙은 벌레를 쫓아낼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최고신과 계약한 아이작은 여러 의미로 노려지고 있었다.
잘 보이려는 자, 시기하는 자, 이용하려는 자, 없애려는 자. 저 여자도 그들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까부터 이상하리만치 힘을 숨기고 있어, 일부러 계속 급소만 슬쩍 노리고 있지만… 뭔가 수상하다.
‘마족……?’
마력을 느낀 건 아니나, 워낙 마족과 오래 싸워온 가주인 만큼 귀신 같은 감이 있는 것이다. 마족 따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순간 가주의 눈이 번득였다.
“!”
동시에 가주가 뿜는 성력의 성질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콰지직!
갑자기 돌변한 그 살벌한 성법에, 순간 아이작이 움찔했다. 남들은 모르지만, 저건 분명 마족을 퇴마하는 구마(驅魔)성법!
샤브나크도 움찔했다.
구마성법, 그것도 퇴마의 정점을 찍은 청의 최고 사제가 쓰는 거라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혼백조차 남아나지 못한다.
이는 상급 마족들조차 아이처럼 울 정도로 괴로워하는 술법. 물론 샤브나크 정도면 마력으로 얼마든지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된다.’
주군에게 의심이 돌아갈 짓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됐다.
설령 고통에 정신이 붕괴되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낄 지경이 될지언정, 주군의 안위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곧 샤브나크가 몸에 힘을 풀었다. 혹시라도 무의식중에 마력을 쓰지 않기 위해 완전히 힘을 끊은 것이다.
이에 위스퍼는 본인이 다 아파죽겠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주인님! 저거 진짜 뒤져요!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응, 괜찮아.’
마침내 쏟아지는 구마성법에, 에슈아 일가가 새하얗게 질렸다.
“아버지!”
“갑자기 구마성법이라니, 왜!”
“저건 마족이다. 쫓아내라.”
“예?!”
모두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아이작이 데려온 게 마족이라니, 이 무슨!
“기운도 전혀 못 느꼈는데요!”
“이 미숙한 놈들. 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조사하면… 음?”
그런데 구마성법을 맞은 샤브나크의 모습이 이상했다. 마족이라면 응당 괴로워해야 할 퇴마성법에 괴로워하기는커녕…….
번쩍!
구마성법의 성력에 오히려 힘이라도 받은 듯 샤브나크의 팔뚝에 핏줄이 돋았다.
그리고 그대로 가주에게 공격을…….
뭐? 공격?!
그 순간. 큰 굉음과 함께 저택이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