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청의 사람들 (1)
“뭐? 터주신을 못 찾아왔다고?”
“예. 황태자가 방해를 해서…….”
그 말에 아버지와 함께 있던 키나의 얼굴이 볼만해졌다.
“거기서 황태자가 왜 나오는데?”
“키나 도련님, 흐릅니다, 흘러요!”
키나는 들고 있던 차가 넘치는 것도 모르고 눈을 부릅떴다. 교황청에서 신년 준비를 하던 키나는 얼굴에 핏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교황가는 황실과 사이가 매우 나쁘다. 귀족파의 우두머리 격인 그들이 황제와 사이가 좋을 리 만무하지만, 죽은 황비 건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귀족파도 귀족파대로, 황제의 입김이 닿는 모든 인물들은 물론, 황제의 군사력이 느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무튼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건들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뭐?
감히 터주신을 되찾아오려는 성직자들의 일에 황실이 끼어들어? 심지어 아이작에게 접근도 못하게 금의 사제들을 찍어눌러?
아니나 다를까, 귀족파의 차기 수장이 될 키나도 분노에 치를 떨었다.
“황태자…. 하다 하다 정원까지 내주는구나.”
그 말에 금의 사제들은 뜻을 알아주셨다는 듯 감격했다.
“맞습니다. 금을 싫어하는 건 알았지만 너무 치졸하지 않습니까!”
“역시 작은 주인님. 저희를 위해 화를 내주실 줄 알았…….”
“황태자 그놈이 에슈아의 환심을 사려고 정원까지 내줘?”
…예?
“누구는 정원이 없는 줄 아는 건가?!”
…도련님?!
“아이작 에슈아도 그깟 정원 때문에, 성직자들의 차기 수장인 내가 아니라 황태자랑 붙어먹어??”
금의 사제들은 본인들이 지금 뭘 들은 거냐는 듯 아득해졌다. 도련님?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닌 것 같은데요?
금의 소공작의 반응에, 사제들은 도와달라는 듯 금의 추기경을 보았다.
금의 추기경은 한숨을 쉬었다.
뭐, 키나의 말에는 문제의 소지가 좀 있긴 하지만, 차라리 아이작을 미워하는 편이 낫다.
오히려 그는 아이작과 황태자의 이야기에 몹시 불쾌해했다.
“의외군. 황실은 이미 노선을 바꾼 줄 알았는데.”
사제들은 추기경의 말에 안도하면서, 눈을 번들거렸다.
“설마… 아이작 에슈아를 성자로, 아니 교황으로 밀어주려는 건 아닐까요.”
“그럴 린 없다.”
“!”
금의 추기경은 황태자를 잘 알았다.
“황태자는 성직자를 몹시 싫어한다.”
아니, 싫어할 뿐인가?
황태자는 교황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는 놈이었다. 제 어미 사건 때, 성직자들에게 독기를 품던 그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게 어딜 봐서 사람 새끼인가, 짐승 새끼지.
“그 머리 좋은 놈이니,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그놈이 어떤 놈인가.
최연소 소드마스터에, 황실에서는 드래곤 피를 가장 진하게 받은 놈. 심지어 얼마 전엔 더러운 연못에 잠수까지 했다고 한다.
‘갑자기 그런 기행을 펼칠 리도 없고, 이번 정원 건까지…….’
뭐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물론 실제로는 해골왕 추종자가 해골왕에게 정원을 빌려주고, 해골왕이 던진 스켈레톤을 주우러 간 것뿐이지만 말이다.
곧 금의 추기경은 펜타곤이나, 최고신 건으로 걱정하는 사제들을 안심시켰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교황께서 나서실 것이다. 견습 졸업식 때 최고신의 힘을 일부 찾아오실 생각이시니.”
“그게 가능합니까? 그들이 그걸 내줄까요?”
“청에는 신의 가호가 없으니까.”
“!”
“신의 가호가 사라져 비전도 제대로 못 쓰는 놈들이다. 청의 신앙의 성도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고.”
금의 추기경의 입장에선 기준점에 한참 못 미친다는 의미겠지만, 사제들은 오히려 놀라는 눈치였다.
‘…비전을 못 쓰는데도 그 정도란 말인가?’
‘미친놈들.’
“어쨌거나 교황께선 청의 주신의 힘을 보관하고 있다. 청의 가주가 될 자라면, 그 힘과 바꾸자고 하면 바꿔주겠지.”
“그 자존심 빼면 시체인 놈들이 굴복하겠습니까?”
“해골왕의 재림은 예언되었고, 누구보다 해골왕을 없애고 싶어하는 놈들이다.”
“사명 때문인가요?”
그러자 금의 추기경이 실소를 흘렸다.
“지들 목숨줄이 달린 문제라.”
‘목숨줄……?’
“청이 신의 힘을 되찾으면 뭐, 더없이 강해지겠지만. 해골왕을 죽이지 않고선 되찾을 일도 없겠지. 그러니 제안을 받아들일 거다.”
그렇게 말한 추기경이 키나를 보았다.
“그러니 키나, 너도 원수들과 놀 생각 말고, 이걸 기회 삼아 계약한 신의 힘을 다듬… 키나?”
키나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있었다.
이놈은 또 어디에 갔냐는 듯 시녀를 쳐다보자, 시녀는 땀을 삐질 흘렸다.
“…그게, 도련님은 에슈아에 신년 인사를 하러 가신다고.”
금의 추기경은 신음을 흘렸다.
* * *
멜리사. 그놈이 어떤 녀석인가.
아이작이 과거 해골왕이던 시절. 지갑 훔치고, 다리 뜯기고, 그야말로 앙숙이라면 앙숙이었다.
그래, 잊을 수 없지. 역대 성녀 중에 제일 튼튼해서 무슨 짓을 해도 자신에게 집착하며 쫓아오던 녀석을 어찌 잊겠어.
그리고 그 녀석의 후손이 되고 나서도 겨우겨우 10년간 피해 다녔는데…….
-얼굴이 보고 싶구나.
멜리사의 편지에 샤브나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드디어 주인님을 죽이려고 보자는 겁니까……?”
해골왕의 충신인 샤브나크가 멜리사를 모를 리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장문으로 주인님께 도전장을 보내다니…….”
편지를 쥔 샤브나크의 몸에서 마기가 새어나올 것 같다.
아이작은 땀을 삐질 흘렸다.
“아니. 도전장은 아닐걸……·.”
도전장이라기보단, 조모의 애정 어린 편지라고 해야 하나. 릴라이에게 듣기론 아이작이 멜리사를 피하자, 멜리사는 시무룩했다고 한다.
-아이작, 너는 할머님이 싫은 거냐? 왜 만나주지 않는지 슬퍼하시더구나.
‘왜긴 왜야…. 해골왕이라서지.’
위스퍼는 깔깔 웃어댔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주인님, 성녀들하고 만나주지도 않으셨죠? 미로에 가두거나 버리셨잖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원래는 그래도 대결은 해주셨는데. 언제부터였더라…….]
아이작은 어째서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뭐, 어릴 때야 곤란했지만 이젠 신하고도 계약을 했다.’
성녀들이랑 만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힘도 얻고, 마침 청의 신에 대해서 좀 알아볼것도 있으니.’
그래,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다 뭐냐.”
에슈아 본가 앞이 좀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게 저택 앞에 몰려 있는 마차들의 수가 보통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작과 함께 온 릴라이, 고엘, 슈리도 굉장히 의아해했다.
“뭐야. 왜 이렇게 손님이 많아?”
“확인해 보니, 에슈아에 신년 인사를 하러 온 귀족들이라고 합니다.”
아실리의 말에, 고엘과 릴라이는 더더욱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리가. 아직 올 때가 아닌데?”
하물며 보이는 마차의 문장들이 심상치가 않다. 왜 저만한 이들이 여기에 있나 싶을 정도의 이들이 있었다.
“거기에 묘하게… 귀부인들이랑 영애들이 보이는 게… 무슨 맞선 현장 같은데?”
아이작의 말에 뜻밖에도 슈리가 얼어붙었다.
“마, 맞선?!”
동시에 슈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절망하듯 땅을 쳤다.
“내가,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뭔 소린가 싶었던 아이작은 슈리의 품에서 떨어진 편지를 주웠다. 이미 뜯어본 흔적이 있는 편지를 확인한 아이작이, 뭔가 눈치챈 듯 씨익 웃었다.
“뭐야, 낌슈리. 너 결혼하냐? 이거 맞선자 목록이잖아.”
아이작은 풉 웃으며 맞선자 목록을 휙휙 넘겼다.
“뭐, 우리 낌슈리가 그럴 나이긴 하지. 이제 16살이었나?”
그 정도면 원래 아이작이 살던 세계에서 고등학생 정도니, 약혼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할 것도 없다.
“캬, 낌슈리. 째지겠네. 색시 얻었다고 입이 째지겠어.”
그러자 슈리가 땅을 치며 울려고 했다.
“이 바보야! 에슈아 남자들한테 결혼은 곧 팔려 간다는 의미야!”
…뭐, 인마?
슈리는 자신도 이걸 못 피해간다는 듯 땅을 쳤다.
“에슈아에서는 여아들이 귀한 거, 너도 알잖아!”
뭐, 그렇지.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아들이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남아들은 본인이 쓰지 못할 뿐이지, 핏속에 성녀의 힘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즉, 남아라도 자식을 낳으면 성녀가 나온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애초에 신체 능력 자체가 일반인과 달랐다.
[뭐, 에슈아가는 전통적으로 성녀 핏줄 때문에 인물들이 빼어나니까요. 후손에서 이득을 본다고 하는군요.]
쉽게 말해 능력적으로나 외모적으로나 뛰어나기에, 그들을 가지고 후손이 필요한 집안과 거래를 했다. 여아를 낳으면 에슈아에 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게 에슈아 남아들의 숙명이었다.
“뭐, 그래. 나쁘지 않지. 좋긴 한데… 그래도 난 싫다!”
“왜, 너도 토끼 같은 자식 본다 생각해. 너도 네 부모님처럼 알콩달콩…은 잠깐. 그러고 보니 네 어머니는 본 적이 없네. 숙모님은? 10년 동안 고엘만 본 것 같은데.”
“…도망가셨다.”
“아…. 미안.”
뭔가 여기도 심연이 있는 것 같네.
아무튼 에슈아 남아들은 16세 때 맞선자 목록을 받고, 이후로도 능력을 선보이지 못하면 18세 때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결혼하게 된다.
상대 가문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집을 떠나게 된다고 했다.
곧 릴라이가 좌절하고 있는 슈리를 토닥였다.
“괜찮다, 슈리. 이건 의례적인 거란다. 나도 거절했는걸.”
그 말에 아이작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고 보니 쭉부님은 왜 결혼 안 하셨어요?”
“나, 나는 해골왕을 잡아야 해서…….”
그 말에 고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해골왕은 무슨. 대를 못 이으니까 필요가 없는 거지.”
“푸헉…! 형님!!”
“왜. 아이작도 알아야 하지 않느냐. 네 숙부는 해골왕 저주 때문에 결혼 못 할 하자가 생겼단다.”
처음으로 알게 된 숙부의 비밀에, 아이작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시발, 뭐라고?
우리 애가 고자였어?
그 표정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릴라이가 땀을 삐질 흘렸다.
“아니 아이작?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오해 말거라. 이 숙부는 그… 기능에 아무런 문제 없단다. 단지 해골왕의 저주가 생명을 죽여서…….”
아, 불쌍한 릴라이. 세우지도 못하다니.
“…저기, 아이작. 듣고 있는 거냐? 그거 아니라니까?”
“찌발. 해골왕 이 새끼! 반드시 원수를 갚는다!”
“아니라고!”
“반드시 죽인다!”
“아이작!”
탄식하며 집안으로 가던 릴라이가 손님들의 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이건 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 애초에 슈리 맞선 대상이면 내가 못 들었을 리 없는데.”
아이작은 절망하는 슈리의 등을 토닥였다.
“캬, 이 많은 영애들이 널 보러 온 거다. 낌슈리!”
“우이씨, 지금 네 약혼 아니라고 이러는 거지!”
그런데 그럴 때였다.
“이 배신자!”
어딘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백발 소년의 모습에, 에슈아가 사람들의 눈에 흥미가 돋았다.
“뭐야, 키나가 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키나는 다른 사람들은 눈에도 안 들어온다는 듯, 아이작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수련해 주겠다는 놈이, 결혼을 해서 도망가려 해??”
“어엉? 뭔 소리야. 저거 슈리 맞선 대상이야.”
“너야말로 뭔 소리야! 이미 다 확인했어! 전부 네 약혼자랍시고 온 거다! 최고신과 계약한 에슈아의 막내를 꼭 달라며!”
뭐라고?!
아이작이 삐질 땀을 흘렀다.
아니, 이건 내 계산에 없었는데.
그러자 슈리는 신이 난 듯 푸핫 웃었다.
“내 맞선이 아니라, 네 맞선이었구나! 좋다, 신부는 내가 골라주마!”
이 미친놈이, 뒤질려고.
아이작은 딸랑이를 스윽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