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청의 사람들 (2)
“다시는 안 그르겠습니다…….”
“좋아, 다시.”
“다시는 가족의 고통을 즐기지 않겠습니다… 아니, 근데 먼저 놀린 건 너잖…….”
“뭐라 했냐?”
“아뇨…. 즐믓했습니다.”
“쪼아.”
아이작은 만족한 얼굴로 딸랑이를 치웠다.
그러자 슈리는 죽겠다는 듯 벽을 짚었다. 아이작 이놈의 자식. 두 번 놀렸다간 목숨이 남아나지 않겠다!
하지만 뭐, 슈리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솔직히 자신이라도 결혼 이야기로 놀리면 빡칠…….
“감히 누가 형 노릇을 하래! 800년은 이르다, 낌슈리!”
그쪽이 문제였냐! 슈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키나를 가리키며 핏대를 세웠다.
“심지어 누가 교황의 손자 놈을 집안에 들이래! 뒤질려고!”
슈리는 뒷목을 잡았다.
“내가 데려온 거 아니거든!”
“슈리가 청의 가주한테 인사를 해도 된다고 했다.”
“데려온 거 맞잖아!”
시발! 억울하다! 언제 인사를 집에서 하라고 했나? 교황청에 있을 때 하라고 했지!
이 새끼들은 왜 자신만 괴롭히는 거지?!
물론 저택 사람들이나 에슈아를 방문한 귀족들은, 키나의 방문을 몹시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 키나 베리트가 청의 가주에게 인사를 하러 오다니?’
‘설마 교황 성하의 뜻이 그렇단 말인가?’
그 교황의 손자가 아이작 때문에 이곳까지 온 거냐며 술렁거렸지만, 정작 아이작은 키나가 못마땅한 듯했다.
그래서 사실 슈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키나가 베리트를 버리고 에슈아를 방문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슈가 될 텐데.
조금은 이용해도 좋은…….
“에슈아, 너는 베리트와 결혼을 해라! 나와 가족이 되는 거다!”
아…. 못마땅할 만하네.
그리고 난데없는 아이작의 맞선 소식 때문일까. 본 저택은 이미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아이작 도련님이 맞선이라니요!”
생각지도 못한 일에 가족들 모두가 장로들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은 안 됩니다!”
“아이작한테 결혼이라니!”
“맞습니다, 아이작은 안 됩니다!”
심지어 아이작을 미워하는 고엘까지 말도 안 된다는 듯 참전했다. 그래서 슈리는 의외라는 듯 아버지를 포함한 그들을 보았다.
‘…아이작 짜식. 그래도 수도에 있는 동안 가족들과 많이 친해졌구ㄴ…….’
“저런 놈을 장가 보냈다간 집안 망신입니다!”
“아이작의 인성으로는 안 돼요!”
“다른 집에 보냈다가 남의 집을 파탄 낼 겁니다.”
…아이작. 너 여러 의미로 걱정받고 있구나.
그리고 그런 가족들의 반응에 아이작은 굉장히 기가 찼다. 솔직히 인성으로 따지면 이 집 사람들이 더 문제가 크다고 보는데.
하지만 맞선 소식이 아이작에게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고작 어린 꼬마들에게 무슨 관심이 있겠으며, 무엇보다 신성 가문에서 정략결혼?
그럼 상대도 성직자란 거잖아?
미쳤나? 차라리 마도제국이나 드래곤이랑 사기 결혼을 하지.
[옛날에 주인님을 쫓아다니던 드래곤이 있지 않았나요?]
그건 나 죽이겠다고 쫓아온 거고.
그리고 가족들의 반응만 봐도 이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아이작은 11살이다. 결혼을 논하기엔 아직 어리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렇게 말한 건 눈살을 찌푸린 릴라이였다.
물론 인성 타령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들이 민감하게 구는 것에는 진짜 이유가 있었다.
‘평소보다 손님이 많다. 처음 보는 이들까지 있어.’
확실히 신년엔 방계부터 여러 귀족들이 에슈아 본저에 방문한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감히 아무나 에슈아에 들어올 수 있다고 보는가?
다른 공작가랑 비교되긴 해도, 엄연히 제국을 지탱하는 5대 가문 중 하나였다. 손님들은 응당 방문 의사와 목적을 밝히고, 집안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게 무슨 말이다?
집안의 누군가가 ‘맞선 목적’의 방문을 허락했단 것이다.
그게 누구겠는가.
‘에슈아 남아한테 결혼은 대부분 출가를 의미한다.’
즉, 아이작을 에슈아에서 내보내고 싶어하는 이들의 소행!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바로 에슈아의 가주 자리를 노리는 또 다른 직계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바로 저택 안쪽으로 향했다.
“릴라이 님!”
마을만 한 크기의 건물들과 널찍한 청의 정원을 지나자, 본가 사람들만 이용 가능한 안채가 나왔다. 탑에서만 자랐던 아이작은 사실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장소였다.
마침내 안채에 들어선 릴라이가 거대한 문을 열자, 넓은 홀이 나왔다.
텅!
그는 문을 열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형님이 아이작을 다른 귀족 가문에 팔아치우려고 하셨습니까?!”
릴라이의 외침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총총 뒤따라온 아이작도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오.’
안에는 아이작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놈들이 다른 형제들인가.’
신년은 에슈아 직계들이 본가에 돌아오는 날. 실제로 안에는 어디에서 조금씩 본 듯한 얼굴들이 있었다.
위스퍼는 깔깔 웃어댔다.
[캬, 누가 성녀 핏줄이고 교황 핏줄인지 훤히 보이네요. 싹수없는 놈들.]
위스퍼의 말대로였다.
안에 있는 건 세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로, 총 다섯. 은발과 갈색 머리들이었다.
성녀 핏줄인 은발들이 개과의 늑대상들이라면, 교황 핏줄인 갈색 머리들은 고양이상.
하물며 누가 에슈아의 핏줄들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인물들이 빼어나다. 여자들은 천상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남자들도 키가 크고 몸이 길쭉한 게 마치 엘프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빼어난 이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아이작이다. 모두의 시선이 릴라이가 아닌, 아이작에게 쏠렸다.
마침 릴라이가 노려보고 있는 건 고엘과 닮은 남자. 비딱한 졸부 망나니 느낌의 고엘과 비교하면 유들유들해 보이지만, 살짝 경박하고 바람둥이처럼 생긴 인상.
노엘 에슈아.
에슈아의 넷째로, 아이작의 숙부다.
[저 새끼죠? 금의 펜타곤에서 마법사를 이용해 주인님과 따까리의 목숨을 노리던 놈이요.]
그래, 가주 자리를 가장 탐하고 있는 망나니 놈이지.
그리고 아마 나를 제일 싫어할 사람.
아니나 다를까, 릴라이의 눈이 험악해졌다.
“노엘 형님이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방문을 허락한 게. 맞선이라니, 제정신이십니까?”
그러자 노엘이 큭 비웃었다.
“뭐가 문제지? 다들 막내에게 관심 있다고 해서 부른 것뿐인데.”
릴라이는 기가 찬 듯했다.
“아이작은 아직 16살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무슨 문제냐? 막내는 무려 최고신과 계약한 에슈아 최고의 인재인데. 이미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으니, 배필을 붙여주고 싶었을 뿐이거늘.”
“뭐가 어째요?”
릴라이가 눈을 부릅뜨자, 노엘은 웃긴다는 듯 크게 웃어젖혔다.
“뭐야, 화났냐? 자식도 못 낳는 놈이, 조카를 데리고 소꿉놀이 하니까 그리 좋아?”
릴라이는 빡친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럴 때 차남인 벤야민도 안채로 들어오며 거들었다.
“노엘. 네 멋대로 일을 진행한 건 선을 넘었다.”
노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어이고, 능력이 안 돼서 가주 자리도 못 잇는 머저리 차남도 같이 있으셨어?”
“이 씹새끼가?”
릴라이와 벤야민을 사이좋게 긁는 넷째의 모습에, 아이작은 혀를 끌끌 찼다.
이야, 이거 나한테 인성이 나쁘다고 뭐라 할 게 아닌데? 진짜 싹퉁바가지가 여기 있었네.
에슈아에 뭐 저딴 놈이 있나 싶었지만, 딱 봐도 보였다.
‘성녀랑 교황 핏줄끼리 사이가 더럽게 안 좋군.’
위스퍼 또한 콩가루 집안이라면서 혀를 찼다.
[애초에 성녀 가문에 교황 핏줄이 왜 섞인 걸까요?]
‘에슈아의 심연이다. 깊게 알려고 하지 마라.’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교황이 껴넣은 거겠지. 에슈아를 먹어 치우려고 말이다.
‘에슈아의 가치가 그만큼 대단하긴 하지.’
실제로 저 넷째가 가주 자리를 몹시 탐내는 것 같다. 오죽하면 조카를 죽이려고 하고, 데릴사위로 내보내면서까지 집에서 내쫓으려고 할까?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 될 거 같은가?
‘가주 자리. 내 꺼야, 찌발.’
할부지가 얼마나 나 예뻐하는데. 내가 얼마나 착하게 구는데.
[…주인님. 양심 어디에?]
왜! 솔직히 저 패륜아보다는 해골왕이 낫지 않냐?
[아니 둘 다 똑같은…….]
아, 왜! 그래도 쟤보단 원수 놈한테 집안을 뺏기는 게 낫지!
[정말 나은 겁니까……?!]
그때, 넷째 노엘이 아이작을 보았다.
그는 언제 형제들의 신경을 긁었냐는 듯, 아이작을 향해 팔을 뻗으며 다가왔다.
“네가 아이작이구나! 우리 처음 보지?”
형제의 시선이 아이작에게 쏠리자, 릴라이와 벤야민이 움찔했다.
저 미친 새끼가, 뭔 속셈으로 아이작한테 친한 척을 해?
안 그래도 청의 가주가 유력한 가주 후보로 점찍고 있는 것 같단 소문이 돌고 있는 참이었다. 아이작을 예쁘게 볼 리도 없건만.
아이작에게 반갑게 다가간 노엘이 씨익 웃었다.
“이야, 반갑다. 반가운데… 너 정말 큰 형님하고 하나도 안 닮았구나?”
“!”
“너, 에슈아 핏줄인 건 맞고?”
그 말에 다들 움찔했다.
성녀는 에슈아에서 배출되지만, 가끔 외부에서 태어날 때가 있다. 그 경우 성녀의 피와 힘을 가진 에슈아 직계와 맺어주고 성녀로서 각성시켜줬다. 이번 대의 성녀였던 아이작의 모친이 바로 그 경우였고 말이다.
그런 경우 에슈아 출신이 아니기에 외부인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저리 나온다고?
‘부모를 여읜 아이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다니.’
그러나 정작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아, 숙부님이 노엘 숙부님이세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부정한 아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도 없거늘. 아이작이 태연하게 웃자, 노엘이 이것 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맹랑한 꼬마인…….”
“베리트 별장에 있다가 할아버지한테 처맞았다더니. 살 만한가 봐요? 입이 아직도 살아있으시네?”
“?!”
아이작의 서늘한 미소에 모두가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아이자악!’
숙부한테 지금 무슨 말버릇……!
슈리가, 아니 그 안에 있던 다른 모든 에슈아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엘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질 만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그러나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눈을 번득였다. 그는 자신의 것을 노리는 상대에게 곱게 나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것도 교황의 핏줄? 말 다했지.
“주둥이가 살아 있는 걸 보니, 아직 덜 처맞은 거냐고 물었는데, 새끼야?”
딸랑이로 처맞아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