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청의 사람들 (4)
“으악!”
아이작은 눈앞에 떨어지는 성검에 비명을 질렀다.
무서워서 지르는 비명은 아니었다.
이건 뼈에, 아니 영혼에, 아니 아무튼 몸에 새겨진 반사적 본능 같은 것이었다.
해골왕 시절, 제 덩치보다 큰 성검을 휘두르는 성녀들 때문에 생겨난 영혼의 비명이다.
그리고 아이작이 황급히 몸을 빼자 푸른 검선이 눈앞을 스치고,
후두둑!
아이작의 백금색 머리카락이 살짝 잘려나갔다.
아이작의 붉은 눈이 드물게 흔들렸다.
[주인님! 살아있으세요?!]
…살아는 있는데! 시바!
아이작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거기엔 곰인지, 호랑이인지,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이걸 피하다니. 역시 해골왕……!”
아이씨, 칭찬인데 칭찬 같지가 않다.
성녀 핏줄이라 30대 중반임에도 20대로 보이는 동안 외모는 둘째치더라도… 시발! 저놈 눈깔 돌아갔어!
에슈아, 이 새끼들은 왜 하나같이 멀쩡한 놈들이 없는데?
[업보입니다, 주인님…….]
닥쳐!
그럴 때 릴라이가 셋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칼리야 형님! 아이작입니다! 큰형님의 아들이요! 형님이 기대하시며 기다리던 바로 그 아이!”
그말에 냉혈한 인상의 셋째가 움찔했다.
“…얘가? 아이작이라고?”
옳지!
예쁜 릴라이! 잘했다!
역시 내 대부답다! 너는 내가 예뻐해줄…
“예! 더럽고 치졸한 해골왕의 대가리를 갈아버릴 아이입니다!”
그놈의 대가리!
네 대가리부터 갈아버린다!
그러나 셋째 칼리야 에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작을 보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해골왕인데. 냄새가 나는데.”
하하. 아니라곤 말 못하겠군.
“아이작이 해골왕의 육신을 먹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
“기억 나시죠? 해골왕이 아니라니까요!”
칼리야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작을 보았다. 그 반응에 아이작도 내심 안도했다.
휴, 그래도 말이 통하는 놈이라 다행…….
“해골왕인지, 배를 갈라서 확인해보자.”
시발!
말이 통하기는 개뿔이!
칼리야가 다시 검을 들자 릴라이도 드물게 화를 냈다.
“형님! 정신차리세요! 형님의 조카라니까요! 아무리 해골왕을 증오해도 이러시면 안돼죠!”
“아…….”
칼리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아이작에게 빠른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사랑하는 조카라는 걸 잊었다.”
그래! 미안하지? 미안해야지!
“배를 갈라 사악한 해골왕의 뼈를 꺼내주마.”
뭐인마?!
“형님! 배를 가르면 죽어요! 죽습니다!”
“괜찮아. 배 따위, 붙이면 그만… 우웨에에엑.”
검을 들려던 칼리야가 돌연 피를 토했다. 놀란 릴라이가 칼리야를 붙잡았다.
“형님!”
그리고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칼리야의 모습에 아이작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뭐야, 뭔데?
방금까지 힘을 자랑하던 검성이 왜 갑자기 병약한 환자가 되어서 골골거리는데?
차남 벤야민은 시녀를 부르면서 노엘을 노려보았다.
“노엘 저 새끼가 아이작한테 헛짓거리를 해서 이 무슨! 칼리야, 넌 빨리 방에 가서 쉬어라. 성력을 쓰니까 그렇잖아.”
그 말에 아이작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셋째는 불세출의 천재이나 공식 자리에 잘 안나온다고.
‘분명 시한부라고 했던가.’
가짜 해골왕의 저주에 걸린 이들 중, 목숨에 연관된 저주를 받은 자들은 보통 서른다섯을 못 넘는다고.
그쯤되자 아이작도 에슈아의 상황을 바로 인지했다.
‘노엘 놈이 설칠 만도 하구만. 본인만 유일하게 건강체라는 거야.’
위스퍼가 깔깔 웃었다.
[그럼 주인님이 에슈아의 저주를 풀어주면 저 시건방진 놈의 얼굴도 볼 만하겠네요.]
저놈 얼굴만 볼 만하겠냐?
가문사람들이며, 귀족들 전체가 기겁을 할 텐데.
‘아, 생각해보니 저주를 풀어주면 교황 자리도 더 쉽게 얻겠네.’
저주를 받은 지금도 교황가와 맞먹는데, 저주가 풀리면 얼마나 큰 전력이 될까. 게다가 모든 에슈아를 자신의 딱가… 아니, 추가 아군으로 삼을 수도 있다.
동시에 차남 벤야민이 아이작을 토닥였다.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숙부들이라 긴장했을 텐데 놀라게 했구나, 미안하다. 동생들의 실수는 대신 사과하마.”
응 우리 차남은 안 미안해해도 돼. 대신 보상금만 두둑하게 챙겨주면 된단다.
하지만 벤야민은 내심 놀란 눈치였다.
“그래도 노엘을 날리다니 놀랍구나. 설마 신의 힘을 벌써 그렇게 잘 다룰 줄은 몰랐는데.”
그도 그럴 게, 보통 3품 사제들은 신과 계약했어도 계약한 신과 연관된 성법을 익힐 수 있을 뿐. 직접 신의 힘을 쓰진 못한다.
이미 보통의 자질이 아니란 것이다.
“역시 아버지가 인정할 만해. 에슈아를 이끌어갈 수 있겠어.”
그말에 아이작이 크으, 기다렸다는 듯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지! 잘한다! 어서 이 사실을 할아버지한테 알려!
차남은 유산을 전부 나한테로 돌려놓고!
하지만 정작 노엘은 울컥한 듯했다.
“저놈이 에슈아를 이끌어갈 인재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노엘이 아이작을 깎아내리기 위해 운을 떼자마자 벤야민이 바로 꺼지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넌 닥쳐라. 자식뻘한테 쳐발린 놈이 어디서 그 주둥이를 놀리느냐? 부끄럽지도 않냐?”
“큭……!”
캬, 차남. 고지식한 선비처럼 생겨서 성깔은 할아버지랑 똑같구나.
결국 아이작을 노려보던 노엘은 무슨 꿍꿍이인지 돌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 너. 해골왕의 육신을 먹었다더니 이상한 사술을 배운 모양이더구나.”
“이상한 사술이라니?”
모두의 관심에 노엘은 큭 웃었다. 마치 아이작을 후계자 자리에서 내쫓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제가 괜히 피를 흘렸겠습니까? 아이작 너, 소문이 안 좋더니 설마 숙부까지 죽이려고 했느냐? 성직자가 무슨 저주 공격을…….”
노엘의 말에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먼저 선수를 쳤다.
“아 그러고보니, 뭔가 하긴 했네요.”
“……!”
아이작의 말에 노엘은 역시 어린애라면서 말을 이었다.
“보세요. 아이작이 이상한 사술을……!”
“워낙 해골왕에게 노려지고 있는 에슈아가 아닙니까. 그래서 평소에 ‘반사’ 성법을 걸어놓고 다니는데, 그게 발동을 해버렸네요?”
“뭐……?”
노엘의 얼굴이 굳고, 에슈아 사람들의 시선이 노엘에게 향했다. 그 묘한 시선이 노엘에게 유쾌할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이 큭큭 웃었다.
“반사성법이라 날아온 공격을 되돌린 것 밖에 없는데, 숙부님이 하필 피를 흘리시다니.”
“……!”
“숙부님, 설마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어요?”
“……!”
주변이 술렁거렸다.
“설마 네가 저주를 건 거냐?”
“뭐라고?”
주변의 반응에 노엘은 당황했다.
하지만 노엘을 보는 아이작의 붉은 눈이 사악하다.
그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피를 흘리시는 걸 보니, 꽤 위험한 저주라도 쓰셨나봐요. 설마 마법에 손을 대신 건 아니죠?”
…저 빌어먹을 놈이??
노엘의 눈빛에 아이작이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보아하니 나를 후계 자리에서 내쫓고 싶은 모양인데, 넌 아직 이르단다.
이쪽은 한두 해 묵은 뼈다귀가 아니거든.
무엇보다 아이작은 일부러 노엘을 도발하는 것이었다.
저놈이 자신을 공격하려 해야, 이쪽도 오히려 명분이 서서 처리를 해버리지.
‘자, 들어와라. 내가 판 함정으로.’
<생존을 방해하는 자>는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내것을 건드리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그런 아이작의 눈빛에 움찔하던 노엘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상대 할 가치가 없다며 돌아섰다.
“아무리 너희가 설쳐도 가주는 나야. 뭐, 아이작 네가 10년만 빨리 태어났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말이다.”
“노엘!”
“내가 가주가 되면 너희는 전원 추방이야!”
그 모습에 벤야민은 혀를 찼다.
“큰 형님만 계셨어도 저놈이 저리 안 설쳤을텐데.”
장남이라면 아이작의 재능을 눈치채고 가주 자리를 받아 아이작에게 승계해줬을 것이다.
“그래도 걱정이구나. 노엘이 제일 가주에 가까운건 사실이니.”
“에이 설마요. 큰형님 가족의 사고도 노엘 형님의 짓일지 모르는데요.”
릴라이의 말에 아이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놈이 부모의 행방불명이랑 연관이 있다고?’
하지만 놀라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뭐, 큰형님의 첫째 아이가 죽은 건도 그렇고. 교황가 쪽이 영 수상하긴 하지.”
‘첫째 아이?’
아이작은 흥미로운 듯 보았다.
설마 이 몸, 형이나 누나가 있었던 건가?
곧 벤야민이 아이작에게 말했다.
“아무튼 고엘은 몰라도 노엘 쪽은 조심해라. 장로들도 널 좋게 보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쪽 편이 많고. 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나이가 어리니…….”
“아이작이 해골왕을 잡으면 해결될 일입니다!”
그러자 벤야민이 질색하듯 릴라이를 보았다.
“릴라이. 언제까지 그딴 소리를 할거냐.”
그말에 아이작은 크으, 감격한 듯 차남을 보았다.
아이작은 차남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에슈아의 재정을 관리하는 놈이라서 좋은 것도 있지만, 솔직히 이놈이 에슈아에서 제일 머리가 좋고 정상적인 것 같다.
그랬기에 아이작은 벤야민에게 친한 척을 했다.
“그쵸? 역시 해골왕을 잡는 건 너무 구시대 사고방식이죠? 저도 동의해요. 그러니 무의미한 해골왕 잡이는 그만 포기하고 같이 건설적인…….”
그러자 벤야민이 릴라이를 나무라며 눈을 번득였다.
“해골왕은 생포가 아니라 쳐죽여야지! 아이작을 위해서라도 해골왕은 사지를 능멸해서 죽여야지!”
…찌발. 나 이 집에서 내보내줘.
* * *
“니들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이냐?”
청의 가주는 자리에 모인 가족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가주의 소환에 직계들 모두 엄숙한 분위기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평소와 다르다.
마치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낯빛들이다.
“넷째는 왜 팔이 부러져 있고.”
그 말에 다른 에슈아 직계들이 침묵하며 아이작만 보았다.
‘그 숙부를 종이짝처럼 날려…….’
‘숙부한테 주, 주둥이…….’
아이작에 대해 들은게 없는 친척 형제들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저거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 아닌가!
그래서 솔직히 두렵다.
이상한 놈이 에슈아에 들어왔다. 그러니 최대한 얽히지 말자.
그리고 이 일은 가주한테는 비밀로 하는 편이 낫겠지.
‘아시면 경을 치실…….’
하지만 가주의 고개는 자석처럼 바로 아이작을 향했다.
“아이작, 또 사고 쳤냐?”
…또?
또???
설마 지금 ‘또’라고 한건가? 할아버지가?
아니 그 전에, 너무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이 아니신가?!
‘저놈,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산 거야?’
각자 한 자리를 맡아 공적을 쌓고 있던 사촌들이었다.
아이작이 무려 상급신 둘과 계약했다는 말이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아직 어리니 신경을 안 쓰고 있었건만.
“아이작이 노엘의 팔을 부러트렸습니다.”
노엘의 편인 장로의 말에 에슈아 사람들이 혀를 찼다.
또 그걸 고자질을 하다니, 치사하다.
‘가주께서 그걸 듣고 가만히 있을리가 없거늘…….’
“뭐야, 팔이라고? 그럼 됐다.”
…됐다고?!
지금 팔을 부러트렸는데 됐다고 한 거야?!
에슈아 직계들은 물론, 은근 노엘의 편을 들어주길 바랐던 장로들의 동공이 떨렸다.
그러나 가주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너희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심지어 그냥 넘어가?!
‘뭔데. 뭐길래 팔을 부러트린 정도라면 다행이라는 얼굴인데?!’
도대체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는 표정들이었지만, 청의 가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후계자를 정하려고 한다.”
“……!”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