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청의 사람들 (5)
가주의 말에 모두가 침을 삼켰다.
에슈아의 가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제국의 공작 자리이기도 하지만, 5대 가문은 5대 신앙을 이끄는 가문이다.
그 우두머리인 추기경은 신앙을 믿는 모든 사제, 성기사들의 수장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일국의 병사보다 뛰어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에슈아의 가주 자리면 마를 퇴마하는 이들로서 대륙에서는 더욱 가치가 드높다.
가주의 입에서 후계의 단어가 나오자마자 눈빛이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장로들과 원로들은 드디어 결정하셨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드디어 마음을 잡으셨군요!”
본래라면 수년 전에 이미 승계되어야 했던 자리였다.
하지만 일라이는 ‘줄 만한 놈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승계를 미뤄왔다.
노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뭐, 대단한 양반이긴 하지만 슬슬 한계긴 했지.’
아무리 일라이가 역대 가주들 중 최강이라고 하지만, 나이가 있긴 하니 말이다. 슬슬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터.
그랬기에 노엘은 가주의 선언에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지금 이 집안에서 가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로와 장로들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지금 상태라면 사실상 차기 가주는 릴라이나 노엘이겠군.”
“칼리야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저 모양이니…….”
그들은 골골골골 죽어가는 칼리야를 보며 혀를 찼다.
뭐 애초에 칼리야는 가주 자리에 욕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릴라이와 노엘이 그나마 유력했지만, 릴라이는 갑자기 잘나가던 사제에서 성기사로 직업을 바꿨다.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고, 해골왕을 쫓겠다는 이유였다.
‘워낙 뛰어난 놈이라 괜찮을 것 같지만, 사제와 성기사는 차이가 너무 크니…….’
익히는 성법의 차이가 큰 것이다.
사제가 모든 성법을 익혀 성법의 극의를 추구한다면, 성기사는 절반의 성법만 익히고 나머지는 검에 매진한다.
10년을 성기사로 지내왔는데, 과연 추기경의 비전까지 완벽하게 익힐 수 있을까?
즉 승기는 노엘에게 있다는 뜻.
노엘은 웃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진작 이래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승계를 미루시니 밑의 것들이 자꾸 설치지 않습니까!”
“……!”
노엘의 웃음에 원로들은 분한 듯 미간을 좁혔다.
‘교황 핏줄로 만큼은 이어지지 않았음 했는데.’
‘사실 아이작이 딱이었거늘.’
‘아이작이 조금만 빨리 태어났어도.’
노엘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듯, 입을 가렸다.
“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괜찮죠. 제가 제대로 기강을 잡아두겠습니다.”
누구의 기강을 말하는 건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에슈아들은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다.
‘아이작, 저놈은 죽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엘의 지배자 같은 시선이 아이작을 향했다.
“뭐, 지금이라도 훌륭한 판단 감사드립…….”
그런데 그때였다.
“너 준다고 한적 없다.”
“…예?”
순간 정적이 흘렀다.
노엘은 당황한 얼굴로 가주를 보았다. 다른 이들도 의아한 듯 가주를 보았다.
“노엘에게 안 주신다니…….”
곧 뭔가 눈치챈 노엘의 날카로운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그럼 설마 릴라이에게 주겠다는 말씀입니까? 저 대도 못 잇는 놈한테요?!”
그말에 원로들이 선을 넘지 말라고 하려 했지만, 먼저 선수를 친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
“누구 숙부한테 자꾸 고자라고 지랄을 해, 개놈이!”
아이자아악!
모두가 경악한 듯이 아이작을 보았다.
“아무리 고자라도, 사람 앞에서 할 말이 따로 있지!”
정작 릴라이는 침묵한 채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아이작? 고마운데 그거 아니란다.
그리고 이 숙부 고자 아니라니까?
“앗, 죄송합니다. 숙부님이 모독 당해서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반성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엘 숙부놈님아. 자꾸 숙부님을 모독하면, 다음엔 너도 똑같이 만들어줄 겁니다.”
“…….”
아니, 이놈아. 존대로 바꾼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거든?
슈리는 덜덜 떨었고, 다른 이들도 입만 뻐금 거리면서 가주를 보았지만, 정작 가주는 전혀 개의치도 않는 얼굴이다.
“아이작, 앉아라.”
그게 다야?!
“그리고 말을 짧게 하는 버릇은 고쳐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곧 원로들이 미소를 지었다.
“가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릴라이도 기쁘게 가주 자리를 받아들일…….”
“아니. 릴라이도 아니다.”
뭐? 그것도 아니라고?!
“그러면 도대체 누구한테 가주 자리를…….”
곧 가주의 눈이 번득였다.
“오늘부로 후계자 권한을 윗항렬에게만 주는 건 폐지하겠다.”
…뭐라고?
“즉 후계 자리엔 손자와 손녀들까지도 포함한다.”
뭐가 어째?!
지금 윗항렬을 무시하고 햇병아리들한테도 자격을 주겠다고?
노엘이 다급히 일어났다.
“당연히 저희를 거쳐간다는 의미시겠죠? 저희를 거친 후에 그 다음을…….”
“아니지.”
“예?”
가주는 슬쩍 아이작을 보았다.
“그래,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아이작이 바로 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작이 스윽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역시 할아버지!
이렇게 해줘야지!
그도 그럴 게 할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하는 건 알았지만, 워낙 보수적인 자리인 만큼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계획은 릴라이가 다음 가주가 되고, 자신이 그의 양자가 되는 거였지만 불확실한 요소가 많았지.
하지만 이거라면 아주 이상적이다.
역시 최고신과 계약한 보람이 있었다!
[아니, 주인님이 계약한 거 아니잖아요.]
푸헿, 역시 다 이몸의 계획대로야!
[아니, 계획대로 아니잖아요!!]
하지만 가주의 말에 반발이 안 터져나올 리가 없었다.
“아버지! 저놈은 11살입니다! 제일 솜털이 어떻게 숙부들을 제치고!”
“못하란 법은 없지? 16살의 최연소 추기경도 있었거늘.”
노엘은 기가 찼다.
지금 그거랑 같은 취급을 하면 안돼지!
“그건 윗 항렬이 다 뒤져… 아니, 이을 사람이 없으니 그리된 것이잖습니까!”
무엇보다 아이작에게 가주 자리가 넘어가?
저 꼬맹이 놈한테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뭐가 문제지? 자격이 있는 자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건데.”
기회? 이게 정말 기회라고?
“9계위 비전을 쓰고, 청의 신께 먼저 인정 받으면 막내라도 가주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거다.”
그러자 노엘은 더욱 기가 차다는 듯 흘렸다.
“고작 11살 꼬맹이가 9계위에 오른다고요? 가주 자리를 무슨 20년 뒤에나 내놓을 생각 입니까?!”
“성녀도 11살의 성녀가 있었다. 추기경이라고 11살 때 못 될 것도 없지?”
“뭐라고요?!”
가주는 아이작을 보았다.
제 눈이 틀리지 않다면, 아이작은 성인이 되기 전에 분명 9계위에 도달할 것이다.
“이 나도, 5년은 더 해먹을 수 있겠지.”
아버지의 뜻을 눈치챈 노엘, 아니 어른들의 얼굴이 볼 만했다.
‘…이건 사실상 아이작을 가주로 올리겠단 말을 한 거잖아!’
노엘의 시선에 아이작은 언젠가처럼 히죽 웃었다.
거거 애 울겠네.
감질나니까 좀 더 해봐라.
* * *
“설마 가주께서 그렇게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
에슈아가 발칵 뒤집혔다.
“손주들이라면, 마침 나이도 스물에 가깝지 않습니까.”
“비전 전수 기간을 고려하면 좀 이른 듯해도 적당하지. 못해도 윗항렬에게 주면 되니까.”
“아, 그래서 5년이라는 시간을 굳이 거론하신 거로군.”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벤야민 만큼은 부정했다. 에슈아 제일의 두뇌인 그는 바로 가주의 의중을 파악한 것이다.
‘기회? 아니, 아버지는 사실상 아이작을 올리시겠다고 한거다.’
함께 있던 다른 어른들도 그 의중을 파악하셨을 터.
‘아버지는 아이작을 기다리시겠다는 의미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에슈아도 만만한 건 아니었다.
일단 가주의 의중을 눈치챈 교황 핏줄 쪽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고, 손주 항렬까지 내려오면 다들 쟁쟁했다.
성녀가 가주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 더더욱.
‘뭐, 나로서는 아이작이 제일 기대되긴 하지만.’
그러나 벤야민은 딱히 티를 내지 않았다.
가주의 의중을 해석해줘서 재능 있는 아이작이 오만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아직 어리다.’
물론 실제로는 벤야민보다 수백 배나 연상이자 꼰대지만 말이다.
‘암. 재능 있는 아이가 길을 잘못 들면 안돼.’
이미 잘못 들다 못해, 헤어나올 길도 없는 해골 마왕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청의 신에게 인정받는 게 가주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그말에 위스퍼가 주인님, 이제 큰일이라며 쯧쯧 혀를 찼다.
[저 말대로라면 주인님은 글러먹었네요.]
‘내가 왜?’
[그야 청의 신들은 신실이 바른 자에게만 답해주는데… 에슈아 사람이면 몰라도 주인님은…….]
‘내가 왜. 뭐 어때서?’
[어휴. 아무튼 청의 신께 인정 받으려면 청의 교리에 충실하셔야 할테니, 주인님도 신께 기도를 드려야 할 거고… 가주가 머리 좀 썼습니다.]
하지만 그말에 아이작이 푸헿 웃었다.
‘뭐하러 교리를 익혀?’
[예?]
청의 신의 인정?
그거야 김슈리가 청의 주신과 계약하지 않았는가!
‘빛의 신을 불러내서 굴복시키면 그깟 가주 자리!’
[빛의 신이 잘도 인정해주겠네요…….]
에슈아가 멸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가주로 인정하라고 하면 돼!
[…그거 협박아닙니까?]
‘빛의 신은 착해서 부탁 하나쯤은 괜찮아.’
[아무리 생각해도 협박인데요?!]
뭐, 빛의 신한테는 받아내야 하는 빚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가주가 되려면 ‘청의 신’에게 인정만 받으면 되는 거지?”
“……!”
처음 듣는 목소리에 아이작의 고개가 무섭게 끼긱 돌아갔다.
거기엔 은발의 성인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모습에 어째서인지 슈리가 움찔했다.
“네가 아이작이냐? 슈리를 가르쳤다는.”
“……?”
“반갑다, 네 사촌형인 조세프다. 슈리도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다?”
“…….”
아이작은 시선을 피하는 슈리의 반응에 띠껍다는 듯 그를 보았다.
뭐야, 이 새끼는.
뭔데 낌슈리가 이런 반응이야?
그러고 보니 이 새끼만 없었네. 노엘을 날려버릴 때.
“할아버지가 후계 권한을 우리한테까지 주시니 얼마나 기쁜 줄 몰라. 그치, 슈리.”
…이 새끼 봐라?
뭔가 꺼림칙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조세프가 슈리에게 볼일이 있다는 듯 어깨동무를 했다.
“슈리, 너 빛의 신이랑 계약했댔지? 네 신 좀 불러봐라. 청의 신께 인정 좀 받아야겠다.”
“뭐? 하지만 할아버지가 말하신 건…….”
“설마 꼼수라고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굴러들어온 돌이면 알아서 에슈아에 도움이 되야지.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잘됐네, 갈색 머리로 에슈아의 가주 자리까지 노릴 수 있게 되어서.”
슈리가 움찔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아이작이 후,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 어디서 굴러먹고 온 줄도 모르겠는 놈이 방해를 하네.
그런 아이작의 낌새에 조세프와 함께 있던 슈리가 움찔했다.
그도 그럴게 아이작이 품안에서 딸랑이를… 안 돼. 그만둬! 딸랑이는 그만!
그 모습에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응. 걱정마, 나도 철 들었어. 이제 딸랑이는 그만 써야지.’
그는 딸랑이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그건 다름 흉악하게 생긴 말 채찍.
“하 내가 참으려 했는데.”
청 새끼들, 내가 조련시켜주지.
“정신이 바짝들게 두들겨 패주마.”
슈리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딸랑이가 낫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