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비전? 그게 뭐가 어려운데? (1)
비전.
이는 각 가문에 전해져오는 특별한 기술이다.
특히 5대 신앙의 비전쯤 되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강력했다.
적에겐 이단자를 멸살하는 ‘멸살의 비전’이.
금에겐 신을 소환하는 ‘절대지배의 비전’이.
각 비전마다 능력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각 신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전을 못 쓰고 있는 청은 반쪽짜리란 소리와 같았다.
-신에게 버려진 거죠.
-신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요.
-이빨 빠진 호랑이지.
다른 신앙들은 그렇게 비웃었다.
물론 가주인 일라이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비전을 못 쓴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7계위 마족부터는 사실상 후퇴를 해야 했기에 청으로서도 비전을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전의 이야기에 에슈아 본가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세상에, 얼마 전 가주가 후계자 선언을 한 것도 까무러칠 일이었는데. 지금 뭐라고?
“교황께서 그런 제안을 해왔다고요?”
“키나 공자가 그냥 놀러온 것이 아니었던 말인가!”
“사라진 가문의 비전이라니!”
원로들과 장로들이 눈이 뒤집혀서 일라이에게 소리쳤다.
“가주,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청의 오랜 숙원을 풀 기회입니다!”
청이 비전을 쓸 수 없게 된 건 정확히 150년 전, 해골왕이 신에게 퇴치당해 사라진 뒤부터였다.
하물며 그 직후엔 에슈아가 의문의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때 많은 성물을 도둑맞고, 청의 비전까지 소실되었다.
“신과 연결도 안 되고, 그나마 비전을 알고 계신 멜리사 님께서 복구를 하셨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았죠. 그때가 에슈아의 최고 암흑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교황이 다시 비전을 쓸 수 있게 도와준다니.
“정말 성지 탈환을 요구하신 건가요?”
“그 외의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원로와 장로들의 질문에 아이작은 움찔했다.
키나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작은 모를 수가 없었다. 교황이 제시한 교환 조건 중엔 성지 탈환 외에 ‘최고신 반납’의 선택지도 있다는 걸.
그리고 만약 이 사실을 집안 사람들이 알게 된다? 보지 않아도 빤했다.
[최고신을 교황에게 줘버리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최고신이 비전보다 잠재 가치가 높긴 하지.
하지만 세상엔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차라리 최고신을 교황에게 넘기고, 서로 윈윈하는게 낫다고 볼 이들도 있을 거다.’
그들 입장에선 아이작이 최고신을 다룰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엘쪽 사람들은 최고신을 가진 아이작을 방해 요소로 여겼다. 그들이라면 최고신을 넘겨버리고 비전을 찾아 아이작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가주는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성지 탈환. 그 외에 다른 교환 조건은 없었다.”
“!”
그 말에 아이작은 그래도 되냐는 듯, 가주를 힐끗 보았다.
그러나 가주는 눈빛으로 말했다.
-키나에게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너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해라.
가주는 알고 있는 것이다. 거래 조건에 최고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직 어린 아이작이 노엘 쪽에게 압박을 받을 것임을. 손자를 위험하게 만들 일라이가 아니었다.
곧 청의 사람들이 끙 혀를 찼다.
“확실히 진마들의 땅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물건을 가져오는 것뿐이라면 해볼 만합니다.”
“맞습니다. 당장 청의 모든 성직자들을 소집해서…….”
“아니, 나가 있는 놈들까지 불러올 것도 없다.”
“그럼 소수 정예로 저희가…….”
일어난 건 릴라이였다. 청의 기사 ‘범고래’들을 이끄는 그가 나서자, 가주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잘 아는 땅이다. 너희들까지 갈 것 없다.”
모두가 놀랐다.
“설마 아버지 혼자서 가신다고요?! 진마들의 땅에요?”
“물건 하나 가져오는 게 뭐가 어렵다고. 괜찮다.”
아니아니, 할아버지야. 안 괜찮아.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진마들의 힘은 누구보다 아이작이 잘 알았다.
‘뭐, 할아버지 정도라면 진마 여럿을 상대로도 끄떡없겠지만…….’
[그놈들이 정정당당하게 움직일 리 없죠?]
그래, 진마들은 아이작도 골머리를 썩던 놈들이었다.
‘시벌 놈들, 그 새끼들 찍어누르는 데 개고생했는데. 후…….’
물론 힘이 달려서 고생했다는 건 아니다. 힘이야 워낙 해골왕의 힘이 압도적이라 문제없었지만, 개같은 놈들이 하도 양아치라서.
‘아마 높은 확률로 할아버지가 죽을 거다.’
설령 살아남더라도 가주 자리에 계속 앉아있을 수 없는 후유증이 생길 수 있다.
물론 가주도 그걸 알 거다.
이게 거지 같은 거래라는 걸.
그럼에도 단번에 거절 안 한 건, 청의 미래를 보기 때문이겠지. 교황도 그걸 아니까 던진 거겠고.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작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최고신을 뺏으려는 것이든가.
[내부 분열을 일으켜서 청을 엉망으로 만들려고 하는 걸 수도 있죠.]
맞아, 바로 그거다.
교황은 그런 놈들이다.
‘뭐, 정 가겠다면 샤브나크를 딸려 보내겠지만…….’
교황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아이작은 대놓고 못 가게 하기 위해, 찬물을 끼얹었다.
“성지를 탈환한다고 해서, 교황 놈이 정말 비전을 주긴 한대요?”
“아이자악!”
교황을 상놈 취급하는 듯한 호칭에 릴라이는 기겁했지만, 정작 아이작은 심드렁했다.
“애초에 교황이 왜 청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데요?”
결국 노엘이 눈을 부릅뜨며 한마디 했다.
“아이작, 조금 실적을 쌓았다고 보이는 게 없나 보구나. 네 언동 모두가 에슈아를 먹칠하는 행동이다. 쫓겨나기 싫으면 언동을 똑바로 해라.”
나대지 말라는 눈빛에 가주가 눈썹을 치켜떴다.
“왜. 나도 교황 놈이라고 하는데. 그럼 나도 이 집에서 나갈까?”
“아버지!”
“…가주님!”
“쓸데없는 논쟁을 할 거면 나가라.”
“…….”
“어쨌거나 궁금해하니 알려주마. 몇 세기 전에, 빛의 신께서 인계를 향해 날리셨던 힘이 있다. 그걸 교황이 보관하고 있는 거다.”
아이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신이 뭐 얼마나 대단한 힘을 날렸길래, 그딴 걸 비전이라고…….
“신께서는 그 힘으로 인계에 있던 해골왕의 머리를 부수셨다고 전해지지.”
…아.
순간 아이작은 뭔가 떠오른 듯 땀을 삐질 흘렸다.
아… 설마, 그때 그건가.
[아, 기억나네요. 빛의 신이 빡쳐서… 주인님한테 다짜고짜 전력의 힘을 날린 적이 있었죠.]
아… 그래서 한동안 머리가 번쩍번쩍 거렸었나?
[근데 왜 공격한 겁니까?]
‘녀석이 아끼는 신기를 훔쳐 갖고 놀다가 잃어버렸거든.’
[살아계신 게 용하네요]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쨌든 그 정도의 힘이면 청도 비전을 쓸 수 있겠네요.]
왜냐고?
빛의 신이 드물게 눈이 돌아가서 날렸던 그 힘이, 바로 청의 비전일 테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이작은 더 기가 찼다.
‘그 일이 도대체 몇백 년 전인데, 그게 아직까지 온전하겠어?’
무엇보다, 장난하나?!
‘그 힘은 대부분 내가 소멸시켰다고!’
어떻게 자신이 살아 있겠나!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비전은 쓸 수 있겠지만 몇 번 쓰면 끝날 힘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소모품!
맛보기로 한두 번 쓰면 쫑날 정도의 힘!
“그 힘만 돌려받으면, 에슈아도 옛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냐. 얘들아!
그거 아냐!
하지만 차마 ‘쩌기요. 제가 해골왕이라서 아는데요. 그거 한두 번 쓰면 끝나요.’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아이작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가 진마들의 땅에 갈 정도인지.”
그러자 노엘은 같잖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마치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러자 차남이 바로 끼어들었다.
“외람되지만, 저도 아이작이랑 같은 의견입니다.”
“형님!”
“이 타이밍에 그런 제안? 너무 속내가 보입니다. 그놈들이라면 아버지가 혼자라도 가실 걸 알 겁니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후계 승계는 앞당겨지겠죠. 놈들은 본인들의 입맛에 맞는 후계자를 올리려는 겁니다.”
그게 누구겠는가.
노엘이지.
벤야민은 그 말은 삼켰지만, 냉정하게 말했다.
“진마들은 너무 강합니다.”
“저도 교황의 제안은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작의 말에 노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비전을 쓸 수 있다는데 기회를 버리자는 의미냐?”
“불확실한 일에 목숨을 걸 정도는 정도는 아니란 거죠.”
노엘은 같잖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비전을 쓰지도 못하는 놈이 목소리는 크구…….”
“쓰면 어떻게 할 건데요?”
“뭐?”
노엘은 순간 당황해서 아이작을 보았다. 저 어린놈이 뭔 헛소리를 하나 했지만, 아이작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제가 비전을 쓰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네가 그걸 쓴다고?”
“네. 제가요.”
그래서 노엘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지, 저 확신은? 수백 년간 아무도 쓰지 못했던 비전을 저놈이 어떻게 쓴다고?
하지만 아이작은 큭 웃었다.
‘그래. 결국 비전만 쓸 수 있으면, 교황의 제안도 개무시할 수 있단 거지.’
[그러고 보니 주인님. 10년 전에 성녀보물고에서 비전 같은 걸 들고 나오셨죠?]
그래, 그랬지.
왜 위험한 성녀보물고 같은 곳에 그 비전이 숨겨져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구에게서 지켜내려 했던 것도 아닐 거고.’
아무튼 거기에 적힌 내용은 이미 다 머리에 넣어놨다.
‘단지 필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쓰지를 못했을 뿐.’
그 필수 조건이 뭐냐고?
바로 청의 신의 힘이다.
‘뭐, 그건 청의 신의 봉인을 풀어주면 그만이지.’
지난 10년 동안은 어차피 청의 신을 조우할 수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교황의 콧대를 꺾어주마.
그랬기에 아이작은 노엘을 보며 눈을 번득이며 웃을 수 있었다.
“비전을 쓸 수 있으면, 숙부님은 가주 자리를 포기하실래요?”
“……!”
저놈이?
“비전을 부활시키면 청의 신도 가주로 인정하시겠죠.”
위스퍼가 한마디 했다.
[…이건 빛의 신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
걔도 날 좋아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