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비전? 그게 뭐가 어려운데? (2)
[주인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위스퍼의 말에 아이작은 푸헿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할아버지는 가주가 되려면 청의 신의 인정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사실 조금 곤란했던 참이었다.
왜냐고?
‘청의 신들이 좀 고지식해? 날 인정시키는 게 쉽지 않을 거란 말이지.’
[빛의 신하고 친구라면서요? 대장신이 인정하면 다 인정하는 거죠, 뭐.]
‘그래, 빛의 신은 날 좋아하지. 그래도 ‘이 놈만큼은 안 돼.’ 같은 경우가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진 않는다는 거지.’
해골왕에게 가문을 맡긴다?
교리 파괴는 기본,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야. 니 종자들 피 터져나가는 꼴 보기 싫으면 내 말 들어.’ …따위로 나올 게 빤했다.
물론 아이작도 교황이 목적이니, 어지간하면 말썽 안 부리고 청의 신에게 맞춰줄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정을 받으려면 그 따분한 교리를 다 지켜가면서 착한 짓을 해야 인정을 해줄 거란 말야.’
[애초에 가주가 의도한 게 그 부분 아닐까요……?]
‘아, 난 싫어. 언제 여물 먹어가면서 기도를 하고 앉았어.’
마법 실력을 키워 신들을 때려눕힌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서로 좋게 좋게 풀리면 좋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비전의 부활이라.
반 도발 겸 숙부에게 외친 말이 가주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래, 비전을 부활시키면 청의 신도 인정 안 하실 수가 없겠지.
-아버지!
-선대도 평생을 바치셨던 일이다. 에슈아에겐 아픈 손가락이고. 뭐, 좋다. 비전을 부활시키면 그것도 가주 자격으로 인정하지.
-아버지!
-에슈아를 살리는 일인데, 그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느냐.
그래, 한마디로 비전 부활도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비전을 쓰려면 청의 교리를 숙지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럼 할아버지, 진마의 땅에는 안 가실 거예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뭐, 정작 가주가 손자의 재롱으로만 받아들인 게 문제긴 하다만.
‘하긴, 나라도 솔직히 안 믿겠다.’
비전 부활은 에슈아의 숙원이지만, 가주들이 몇 세대에 걸쳐서 실패한 일이었다. 어린 애가 부활시키겠다는 말을 선뜻 믿을 수 있을까?
가주로서는 할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비전을 부활시키겠다고 해준 마음만으로도 기쁜 것이리라.
‘뭐, 안 믿으면 믿게 해주면 그만이지만.’
자신이 비전을 쓸 수 있게 되면 노엘도 기세등등하게 굴지 못할 테지.
하물며 궁극적으로는 에슈아를 최강으로 만들어놓아야 이들이 자신의 패가 될 것이며, 교황을 누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아이작은 청의 신전으로 향했다.
“헉, 막내 도련님 오셨습니까!”
청의 기사들이 아이작을 보자마자 인사를 하고, 아이작은 기도실 중 제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직계가 쓰는 기도실은 기본적으로 철통 보안이었다.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한번 들어가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기도실에 들어가자마자 사제복을 툭 털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슈리가 있었으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며 입을 뻐끔거렸겠지만, 그딴 거 알 게 뭐냐.
“자, 그럼 신을 불러볼까.”
[헉, 설마 신께 기도를 드리시려고요?!]
아니? 미쳤냐.
신 따위한테 기도를 드리게?
[기도를 안 하면 신이 응답을 안 해주잖아요?]
푸헿, 그딴 거 안 해도 즉각 즉각 올 놈이 있지. 아이작은 양손을 마주하며 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재단에 푸른 불꽃이 불타올랐다. 신을 부른다는 신호였다. 신은 이렇게 성소에서 기도를 해야 불러낼 수 있었다.
슈리가 하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여물만 먹어가며 심신을 정갈하게 해서 불러내야 하는 바로 그거.
‘뭐, 사실 계약식 때가 아니면 사실 신을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긴 하지만.’
계약식 정도의 특별한 때가 아니면 신은 소환되지 않는다. 평소에도 신을 직접 소환할 수 있는 건 반신인 교황뿐.
즉 보통 신을 부른다는 건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그 권능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5, 6계위. 주교급이 되야 가능한 영역이다.
괜히 아이작이 형법의 신의 힘으로 노엘을 날렸을 때, 에슈아 사람들이 놀란 게 아니었다.
그리고 신과 소통하는 건, 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 깊은 신앙심을 요구하긴 하지만…….
“형법아, 좋은 말로 할 때 튀어와라?”
아이작이 계약한 신을 부르자, 푸른 불꽃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화륵!
그 광경에 위스퍼가 한마디 했다.
[형법의 신이 과연 응할까요? 아무리 계약했다 해도, 주인님은 신앙심도 뭣도 없는데…….]
계약했다고 신을 펑펑 불러낼 수 있으면 슈리가 고생을 안 했겠지.
게다가 청의 신이 신실해야 불러낼 수 있다면, 형법의 신은 규율을 지켜야 불러낼 수 있지 않나?
그러나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규율은 개뿔이.’
그런 거 없어도 불러내면 올 녀석이다.
[…빛의 신처럼 절친인가요?]
아냐, 형법이한테는 별거 안 했어.
그냥 시건방져서 때려눕혔을 뿐.
[아, 그러고 보니 형법의 신은 햇병아리 때 주인님을 토벌하러 왔던 놈이었죠?]
그래. 그때 고이 눕혀줬더니, 그 뒤로는 말 잘 듣더라. 대신 아무에게도 자기가 졌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면서 말이다.
‘엘리트 놈이니까 당연한 거지만.’
오히려 그래서 부려먹긴 좋았다.
자존심 강한 엘리트 놈이라서 치욕스러워 죽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건 다했다. 신계에 있을 때도 신들의 불륜 정보를 잘 빼돌려주고 말이다.
그래, 지금도 이렇게 부르면 쪼르르르 튀어오…….
[안 오는데요?]
이 시벌 놈이?
* * *
그 무렵.
[미치겠군.]
형법의 신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형법의 신은 신계에서도 이름 있는 상급신. 그런 그의 표정에, 그를 보필하는 하급신들이 걱정스러운 듯 술렁거렸다.
[주인님께서 요즘 한숨이 많이 느셨네요.]
[뭐. 그럴 만하지. 많은 신들이 행방불명되시고, 인계에서는 진마가 설치고 있으니까.]
[해골왕의 짓인가?]
[에이, 오래전에 봉인된 놈이 어떻게 신을 위협하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이죠. 해골왕이 요구한 대로 인간이 되었다면, 손쓸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대장신께서도 서둘러 봉인하신 게 아닙니까. 하물며 최고신의 힘을 훔치려 했었잖아요? 그 힘까지 가지게 되었으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게 되었을지.]
[에이, 해골왕도 이미 봉인하셨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형법의 신은 머리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망할! 그 해골왕, 봉인 안 됐다고!
하다하다 신들의 걸작이라는 성자의 몸을 얻은 채, 신성제국 안에 있다고!
심지어 위대한 최고신까지 그놈을 보필하고 있어 손도 못 댄다고!
‘신들이 그놈의 힘을 키워주고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형법의 신은 가슴만 쳤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는 해골왕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금의 신들은 몰라도, 그는 해골왕의 실력을 인정했다.
애초에 해골왕과 처음 대립하게 된 것도, 주세력인 금의 신들이 마족의 땅을 빼앗아가려고 시비를 걸어서 생긴 일이 아닌가. 그 뒤에 기껏 화해를 하나 했더니, 해골왕 하나 봉인하겠다고 사기나 치고.
규율을 수호하는 형법의 신으로서 그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즉, 자신들도 원죄가 있기에, 형법의 신은 해골왕이 인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모른 척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모른 척이 아니라 아예 보호해 주고 있지. 신들한테 아주 뛰어난 성자라며 입에 발린 말까지 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게 자기뿐이란 게 문제지만.
그때였다.
-형법아, 좋은 말로 할 때 튀어와라.
익숙한 목소리에 형법의 신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오라가라야?
형법의 신은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10초 안에 안 튀어오면, 나도 내가 뭔 짓을 할지 모른다.
…젠장.
형법의 신은 부하들을 내쫓아내며 의식을 집중했다.
-뭐냐.
한편, 기도실에 있던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형법의 신이 응답하자, 타오르던 불꽃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푸른색의 불꽃이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신이 부름에 응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본론부터 말했다.
“시킨 대로 벌레는 확인해 봤냐?”
-그래, 너랑 계약하고 제일 먼저 확인해봤다.
형법의 신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했다.
-놀랍게도 벌레는 아직 움직이고 있다는군.
봉인이 잘못된 건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술법은 태고의 술법이라 신들도 건들 수 없는 술법이었다.
-누가 그 안에 있는지는 모른다. 네가 자폭했을 때 술법이 폭주하면서 피해를 입은 신들이 꽤 있거든.
의식을 잃고 지금도 자고 있는 신들이 많았다.
뭐, 다들 해골왕의 짓이라고 뭐라고 했지만, 형법의 신은 그게 해골왕의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뭔가가 있다.’
해골왕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누군가가.
-아무튼 누군지는 몰라도, 자고 있는 신들 중 하나…….
“빛의 신이 있을 거다.”
-…뭐?!
형법의 신은 기겁했다.
-누가 있다고?!
“청이 왜 약화되어 있겠어. 빛의 신이 거기 있을 거라니까.”
형법의 신은 뒷목을 잡았다.
아니, 빛의 신도 잠들어 있는 신 중 하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필 금의 신들이 밀어내려고 하는 청의 신이 거기에……?’
-신들이 그걸 몰랐다고? 빛의 신이면 주력신인데?
형법의 신이 당황한 기색이자, 아이작이 씨익 웃었다.
“실제로 너도 몰랐잖아. 애초에 벌레에 나만 가두려고 한 게 아닐 수도 있어.”
-!
형법의 신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아무튼… 상황은 알았다. 하지만 그건 고대 술식이라 신들조차 절대 못 푼다. 애초에 풀려고 만든 봉인이 아니야.
“됐으니까 봉인식만 알려줘. 나는 풀 수 있으니까.”
-……!
형법의 신은 침을 삼켰다.
확실히 해골왕이라면 태고의 술법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한 녀석이었다.
“뭐, 그전에 일단 본인하고 이야기부터 할 거지만. 그런 의미에서 부탁할 게 있는데.”
-뭐지?
“별건 아니고, 니들 영약 좀 내놔. 추기경급들한테 선물로 주는 거 있지?”
-…그건 왜?
“청이 워낙 신들한테 받은 게 없어서 그런 영약도 없더라고. 청의 신좀 불러내려는데, 애들이 워낙 비실비실해가지고. 청의 신도 못 불러내지 뭐냐.”
한마디로 물건을 뜯어내려고 불러냈단 의미다. 형법의 신은 괘씸하다는 듯 말했다.
-이 내가 다른 인간도 아니고, 너한테 줄 것 같으냐?
“내가 너 말고 누구랑 계약했는지 잊었나 보네.”
형법의 신은 침묵했다.
그래. 최고신과 계약했지…. 시발.
“알았으면 당장 보내.”
-그런 말에 내가 굴복할 것 같…….
“적의 사제들을 모조리 타락시킨다.”
-자, 잠깐……!
“10초 준다. 10, 3, 2, 1…….”
뚝.
아이작은 바로 신과의 교신을 끊었다.
어렴풋이 형법의 신이 벽에 머리를 박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