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비전? 그게 뭐가 어려운데? (3)
“낌슈리. 이거 먹어라.”
아이작은 방긋 웃으면서 약을 내밀었다.
작은 병에 든 액체에 슈리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독이냐?”
“그럴 리가.”
아이작은 반짝반짝 웃으면서 병을 슈리에게 꼭 쥐여 주었다.
“이거 먹고 힘내라고.”
그러자 슈리의 표정은 더욱 얼어붙는 것이었다.
“…나,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아니? 기특한데? 빛의 신이랑 계약까지 했잖아.”
그래, 어떤 의미에선 네놈이 나를 가주로 만들어주는 셈이지.
왜냐고?
만약 이놈이 빛의 신과 계약을 안 했어 봐라. 청의 신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여물을 먹고, 기도를 하며, 신들을 소환하려고 알랑방귀를 뀌고 있어야 했을 거다.
얼마나 슈리가 예뻐 보일까.
하지만 정작 활짝 웃는 아이작의 모습에 슈리는 오히려 무섭고 찝찝할 수밖에 없다.
1년 사이에 쑥쑥 자라고 있는 키하며, 에슈아 남자들 중에서도 제일 잘난 얼굴이라 웃는 모습도 천사 같긴 한데…….
뭐지?
왜 이 새끼는 웃는 게 더 무섭지?
결국 슈리는 이렇게 노려볼 수밖에 없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면, 설마 너냐?! 너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님 이제부터 잘못할 예정이냐?!”
아이작은 대답 대신 방긋 웃었다.
응, 그래. 원한다면 해줘야지.
그리고 딸랑이를 들었다.
빠각!!!
딸랑이가 슈리의 얼굴을 스쳐 기도실의 문에 콰직 꽂혔다. 문밖에서 엿듣던 누군가가 부리나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슈리 역시 새하얗게 질린 채 수긍하듯 웃었다.
“하하…. 그, 그래. 사심은 없나 보구나.”
시발, 저 성질머리는 왜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는 건지!
그러나 위스퍼는 헛웃음을 흘리며 문밖을 보았다.
[청의 사제 같은데, 누구였을까요?]
‘할아버지 아니면, 노엘 쪽이겠지.’
하지만 할아버지 쪽 사람이라면 굳이 기도실까지 미행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노엘 쪽일 것이다.
‘내가 정말 비전을 쓰면 곤란하니까, 살피러 온 걸 거다.’
하다못해 아이작이 혼자 기도실에 왔으면 또 모른다. 그런데 슈리까지 데리고 왔다?
‘슈리와 밀회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노엘의 입장에선 아이작의 편이 많아지는 걸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가문 사람들을 하나씩 포섭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도 형법의 신이 정말 물건을 보내올 줄은 몰랐는데요.]
무려 신이 직접 신수를 보내 영약을 주었다.
[하루밖에 안 걸린 걸 감안하면 엄청 초고속이었던 거 아닙니까?]
‘아니. 하루나 걸렸어. 그러니까 물건을 가져온 신수는 타락시킬 거야.’
부하 놈을 뒤룩뒤룩 살찌워서 돌려보내 주마.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법의 신은 나쁜 놈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계약할 생각을 한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랑 손잡는 게 그놈한테도 나쁜 건 아니거든.’
[나쁜 게 아니라고요……?!]
진심이냐는 듯한 말에 아이작은 큭 웃었다.
‘내가 보기에 빛의 신이 갇힌 건 우연이 아냐. 분명 배후가 있다.’
[배후요?]
‘난 그게 높은 확률로 금의 신들이라고 본다.’
금의 신들은 현재 신계의 권력을 잡은 주요 세력. 아랫놈들은 괜찮은데 우두머리가 문제였다.
그리고 적의 신들도 그들의 말에 따르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불만이 많겠지.
‘금의 신들은 적의 신들을 죽였거든.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적의 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언제든지 본인들이 주력이 되고 싶어 했다.
[어유, 개판이네요. 괜히 적가랑 금가 사이가 나쁜 게 아니군요? 본능적으로 신들의 영향을 받은 건가?]
그래, 그런 거다.
애초에 해골왕의 봉인이 잘못되어 청의 신이 갇혔다? 이거, 파벌 싸움 심한 신들의 귀에 들어가면 엄청난 먹잇감이 될걸?
괜히 아이작이 싸움에 부채질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 그럼 적이 주인님이랑 손잡아서 쿠데타에 성공한다면, 형법의 신도 오히려 권력을 잡을 수 있겠네요.]
그쯤 되자, 위스퍼는 의아한 게 생기는 모양이었다.
[잠깐, 최고신도 금의 신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금의 신과 한패 아닙니까?]
‘서로 사이가 안 좋을걸?’
[같은 소속인데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해골왕의 눈썰미는 굉장히 좋았다.
‘내가 괜히 스켈레톤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줄 아냐? 마족들 사이에선 관계를 못 읽으면 바로 죽는다고.’
[그런것치곤 주인님… 최고신을 몹시 싫어하셨잖아요.]
지금은 수그러들었지만, 계약 안 한다고 튕기던 걸 기억 못 하시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아이작이 한숨을 쉬었다.
최고신이라.
‘그 여신, 내가 보물을 훔치러 갔을 때 딱 한 번 마주한 적이 있는데.’
[있는데?]
‘날 마음에 들어 한 건 맞는 거 같아. 그러니 계약했겠지. 그런데……’
[그런데?]
‘속을 모르겠어. 그리고 취향이…….’
[취향이?]
‘…아냐, 거기까지만 하자.’
아이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갇혀 있는 청의 신이 아닌가?
‘청의 신은 구해줘야지.’
청은 유용한 패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성녀들이나 청은 잘되면 좋겠다고 여겼다.
[오, 청은 또 좋아하시는 겁니까?]
‘아니, 지긋지긋한 악연이야.’
애초에 아이작은 성녀들의 존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해골왕의 토벌만을 위해 생겨난 존재들 따위, 좋을 리가 있겠는가.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건지.’
하지만 어쨌거나 에슈아는 자신의 가문이 될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하들이 골골거리고 있는 게 빡쳤다. 그래서 슈리에게도 영약을 먹인 것이 아닌가.
물론 영약을 먹는다고 바로 흡수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추기경급들이 먹는 약을 달라고 했는걸. 견습 졸업생 실력으로는 소화시키는 데에만 한 달이 걸리겠지.’
그런 만큼 영약에서 신성력을 흡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하지만 그때였다.
“오오오오! 힘이 끓어오른다!”
“오!”
아이작은 포효하는 슈리를 보며 감탄했다. 슈리의 몸에서 강력한 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영약 먹을 땐 사약을 받는 것처럼 굴더니. 조금은 아이작에게 뽀뽀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다.
‘저걸 이렇게 빨리 흡수하다니, 가르친 보람이 있……’
“우오오! 이거면 해골왕도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해골왕은 이미 네 앞에 있고, 때꺄.
“자, 와라! 해골왕! 대가리를 깨주마!!!”
…저 미친 새끼가??
저놈은 교황 쪽 핏줄이라 해골왕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냐고!
“아이작! 이 형만 믿어라! 네 대머리… 아니, 고자 저주… 아니, 시한부 저주… 아니! …어떤 저주든 이 형이 다 풀어줄게!”
아이작은 핏대를 세웠다.
“청의 신이나 불러, 따샤.”
그 말에 슈리는 양손을 마주하더니, 바로 포효하며 청의 신을 불렀다.
그러자 기도실에 있던 성화가 거칠게 피어올랐고, 동시에 성화의 형태가 바뀌었다.
형법의 신이 새였다면, 청의 신의 모습은 빛에 가까웠다. 그런데 묘하게 일그러지는 형태가 마치……
‘뭐지? 뼈?’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청의 신…! 내가! 젠장, 내가 진짜 청의 신을 불러냈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듯한 슈리의 모습에, 아이작이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에슈아에 와서 깨달았던 것이다. 슈리가 갈색 머리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말이다.
노엘이야 능력이 뛰어나니 제 세력을 만들었지만, 고엘은 능력이 없어 교황가에서도 버려졌다. 모친이 도망간 것도 연관이 아예 없진 않다고 들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청의 사람이고 싶어 했던 슈리였다. 하지만 청의 사람으로 인정도 못 받던 상황이니, 청의 상징인 빛의 신을 불러낸 것만으로도 설움을 푼 느낌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작은 드물게 슈리의 등을 토닥여주려고 했다.
“그래, 잘했다, 낌슈…….”
“꽥.”
“……?!”
청의 신을 소환한 건 좋은데, 슈리가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심지어 경련까지 일으켰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샤브나크…. 네 짓이냐?”
“아뇨, 자기 혼자 쓰러진 겁니다.”
하긴, 샤브나크의 짓이었으면 거품도 안 물고 정말 깔끔하게 쓰러졌겠지.
아무래도 영약의 힘이 너무 강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빛의 신을 소환하기엔 아직 일렀든가.
“뭐, 어차피 기절시킬 거였어서 알아서 기절해준 건 고맙다만.”
빛의 신과의 대화 내용을 듣게 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화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자여…! 종자여…! 드디어 날 불러냈구나! 부디 내 말을 들어다오!
빛의 신인 듯했다.
-종자여…! 지금부터 잘 듣거라, 네 옆에 에슈아를 멸망시킬 아주 사악한 자가 있단다……!
샤브나크의 황금색 눈이 바짝 경계하듯 날카로워졌다. 그 ‘사악한 자’라는 게, 주인을 칭하는 말임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빛의 신은 슈리가 쓰러진 걸 모르는 건지, 애절하게 말을 이었다.
-종자야…. 할 수만 있다면 부디 그자를 회개시키고, 불가능하면 멀리하여 에슈아를 지키…종자야? 듣고 있느냐? …종자…….
“응, 나 불렀어?”
-……!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누구를 회개시키고 멀리하라고? 설마 나를?”
몇 초간의 침묵.
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듯한 성화 속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