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비전? 그게 뭐가 어려운데? (5)
에슈아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아버지, 진짜 가실 생각입니까?”
청의 가주를 쫓는 릴라이와 벤야민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다름 아닌 청의 가주가 진마의 땅에 다녀오겠다며 채비를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종자 하나만 데리고 가겠다니!
“거긴 그 해골왕이 지배하던 땅입니다!”
“안다.”
“정 그러시면 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릴라이의 외침에 가주가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듯 뒤돌아섰다.
“너는 여차했을 때 내 뒤를 이어야 한다. 추기경의 비전을 익혀놓고, 아이작을 입양할 생각을 해놔라.”
그 말에 릴라이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니. 애초에 진마의 땅에서 살아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신 게 아닌가.
아이작의 미래는 지켜주면서, 가문의 미래를 위해 이러시는 것이다. 그러니 릴라이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언제는 아이작을 믿으신다면서요? 아이작이 비전을 부활시킬 거라고 말해서 두고 보기로 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그래, 믿지.”
“그러면 왜…….”
“그놈의 썩은 인성은 믿지.”
“…아버지,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만-”
“나도 진담이다. 그 정도 빌어먹을 성깔머리면, 최소한 교황 쪽 세력에 기가 죽어 살아가진 않을 거다.”
“!”
“사실 에슈아에 교황 핏줄을 들였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했었다.”
애초에 에슈아에 왜 원수지간인 교황 쪽 사람이 들어왔겠는가.
해골왕이 사라지고 에슈아에는 암흑기가 도래했다. 가짜 해골왕에게 저주를 받고, 후계자들은 줄줄이 죽어 나가고. 비전의 소실 역시 에슈아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암흑기에서 교황가가 제안한 게, 바로 ‘핏줄’이었다.
-에슈아는 신의 미움을 사서 해골왕의 저주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 저주받은 피를 축복받은 교황가의 피로 씻어내라.
-에슈아에 교황가의 피가 있다는 명분이라면, 우리 교황가가 지원해 줘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
뭐? 교황가의 피로 성녀의 피를 씻어?
말도 안 되는 거지 같은 말이란 건 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참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에슈아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대 에슈아 가주는 교황의 제안을 수락해 교황가의 피를 가문에 들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에슈아를 내부에서부터 먹으려는 교황가의 수작이 시작되었지.’
노엘도 그 잔재 중 하나였다.
그렇게 에슈아에 미치는 교황의 입김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일라이가 가문 사람들을 억제하고 있긴 하지만, 만약 가주가 죽은 뒤엔 어떻게 될까?
그러니 그 굴레를 자신의 대에서 끊어야 한다. 아이작이 자리를 이을 때쯤에는 제대로 된 에슈아를 넘겨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비전이라도 부활시키면, 너희도 눈치 볼 일이 사라지겠지.”
“……!”
더 이상 교황에게 휘둘릴 일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비전만이라도 돌아오면.’
천하의 일라이의 발목을 잡고 있는 에슈아 가주의 의무도 없앨 수 있겠지.
“뭐, 나도 쉽게 죽을 생각은 없다. 너무 걱정 마라. 내가 없는 동안 멜리사가 올 테니, 가문 걱정도 말고.”
“아버지!”
청의 가주가 먼저 자리를 뜨자,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노엘은 풉,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방해되던 아버지가 사라지시는구나.”
교황이 나설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외가가 도움을 줄 줄이야!
‘원래는 독살이라도 해서 없앨까 했지만.’
오히려 더 잘된 셈이었다.
가주가 죽으면 그 자리는 노엘에게 넘어올 것이고, 교황도 비전의 힘을 순순히 넘길 것이었다.
그럼 자신은 에슈아를 구원한 최초의 가주로서 이름을 박고 시작하겠지!
하지만 웃는 노엘을, 그의 종자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가주께서 진마의 땅에서 살아 돌아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거기가 어떤 곳인데?”
무려 해골왕의 땅이었다. 그 인근에서 그 잘난 장남과 성녀가 함께 사라졌으며,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비전이 없으면 버티지도 못해.”
“아이작 도련님이 비전을 부활시키면요?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노엘은 푸핫 웃었다.
“비전을 살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애초에 누군가의 계략으로 사라진 비전이었다. 그게 어떻게 나올 수 있겠는가.
물론 확신에 찬 아이작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글쎄.
“그건 멜리사 가모님도 실패하신 일이다. 멜리사 에슈아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
그녀는 역대 성녀들 중에서도 천재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비전은 완전히 부활시키진 못했다. 가장 핵심인 부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반쪽짜리 비전’이었다.
“반쪽짜리라 불안할뿐더러, 그마저도 지금껏 아무도 발동을 못 했는데 무슨. 꼬맹이가 헛소리한 거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 * *
빛의 신이 울고 있었다.
흑흑.
그리고 빛의 신이 우는 모습을 쳐다보는 슈리는 당황스러웠다.
“여신님, 왜 울고 계시는 겁니까!”
“왜 울긴.”
“!”
슈리의 질문에 답한 건 여신이 아니었다.
그래. 답을 한 건 아이작으로, 해골왕과 함께 서 있는… 뭐? 해골왕?!
해골왕과 함께 있는 아이작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 낌슈리, 어서 인사해. 이분이 우리 에슈아의 새로운 수호신. 해골왕님이셔. 자, 이제부터 해골왕께서 에슈아를 지켜주실 거야.”
“으아악!!!”
슈리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시발, 꿈이었나!’
꿈이 묘하게 생생하고 현실적이라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이작이 해골왕을 섬기는 암흑사제라니! 너무 잘 어울려서 무서울 지경…….
“오. 눈떴냐.”
“아아악!”
아이작을 본 슈리는 또 비명을 질렀다.
“젠장! 해골왕! 해골왕은 어딨냐! 당장 나와라! 대가리를 깨주마… 커헉!”
“이 때끼가 정신을 덜 차렸나.”
딸랑이로 맞은 슈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기도실은 아니고… 저택인 것 같은데. 나 언제 여기로……?”
“너, 정신 못 차리길래 교황 손자 놈한테 시켜서 이동시켰다. 하는 김에 몸도 회복시키고.”
“뭐? 키나?”
고개를 돌리자, 키나가 창가에 앉아 슈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아이작도 아니고, 저딴 놈의 치료를…….”
감히 이 몸의 신성력을 쓰게 하다니, 감사한 줄 알라는 눈빛이다.
괜히 말을 섞으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 슈리는 아이작을 보았다.
“내가 왜 기절했지?”
“기억도 안 나냐? 너 청의 신을 부르고 기절했어.”
그러자 슈리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청의 신! 내가 청의 신을 소환했었지! 그래, 청의 신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어?”
“아, 중요한 말을 하셨지.”
아이작의 미소에 슈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신을 모셔와 놓고 기절하다니, 수치야! 그리고 중요한 말이라니, 뭐라고 하셨는데? 성자가 되는 법이라든가… 에슈아의 중대한 임무라든가…….”
“응, 이제부터 에슈아의 모든 일은 내 말을 따르라고 하셨어.”
…엉?
슈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뭐라고?”
“빛의 신께서, 이제부터 내게 계시를 보낼 테니, 너는 내 말에 따르래.”
어디선가 빛의 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이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뭐, 어쩔 거야? 구출되고 싶으면 날 도와야지.’
하지만 꼭 이럴 때는 눈치가 빠른 슈리다.
“널… 따르라고? 진짜로???”
정의의 신인 빛의 신이?
정말로?
이딴 새끼의 말을 따르라고 했단 말이야?
“말도 안 ㄷ… 커헉!”
채찍을 꺼낸 아이작은 이어서 깃털을 꺼내 보였다.
“날 따르라는 증거로, 이 깃털로 내게 주셨다.”
[…와, 이제 당당하게 김슈리 걸 자기 거라고 하시고.]
“할아버지도 너도, 이제 내 계시에 따르면 돼.”
“…진짜로??”
그 말에, 옆에 있던 키나가 속으로 혀를 찼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계약자를 두고 왜 다른 종자한테 계시를 내리려 하겠는가.
슈리도 이상했는지 키나에게 물었다.
신을 소환하는 비전을 가진 만큼, 누구보다 신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금가의 사람이니까 묻는 것이었다.
“저 말 진짜야? 저게 가능해?”
그러자 키나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2명의 상급신과 계약한 아이작이, 청의 신의 계시까지 받았다는 말까지 돌면 난리가 난다. 금가에게는 너무나 큰 악재였다.
솔직한 입장으로 키나는 아이작이 금의 사람이 되길 바랐다.
“당연히 아니…….”
“아 오늘은 간만에 베리트 사람이랑 공부를 해 볼까.”
아이작의 말에 키나의 눈빛이 바뀌었다.
“넌 사람이 말하면 믿지를 않냐? 당연히 가능하지! 너 따위보다 아이작이 더 에슈아의 가주에 어울린 건 알긴 아냐?! 청의 신도 인정하신 거지! 그렇게 눈치가 없어?!”
“아니…. 방금 아니라고 하려던 거…….”
“내 말은 곧 교황 성하의 의견과 같다!”
“…….”
진짜지?
그런 거지? 어?
그러나 아이작은 못마땅하게 키나를 보았다.
“그래서. 넌 왜 아직도 집에 안 가고 에슈아에 남아 있는데?”
키나는 침묵했다.
‘왜긴 왜야. 청의 가주 때문이지.’
-키나. 나는 곧 에슈아를 떠날 거다. 아이작이 쫓아오지 못하게 네가 아이작의 옆에 있어주면 좋겠구나.
-예의를 모르는군요. 전 금의 사자입니다. 제가 왜 청의 부탁따위를 들어줘야 하는지 모르겠…….
-에휴. 아이작을 황태자궁으로 보내야겠구만.
-언제까지 있으면 되죠?!
똥 씹은 표정을 짓던 키나가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 원래는 청의 가주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청의 가주가 진마의 땅으로 떠난다더라. 그동안 라이벌인 너랑 수련하고 있으래.”
“뭐?”
“알았냐? 청의 가주도 인정한 거야. 나야말로 너의 유일한…….”
“아씨, 할부지.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야, 낌슈리! 따라와! 당장 쫓아간다!”
“?!”
키나는 급히 아이작을 불렀지만, 아이작은 키나를 개무시하곤 방을 나갔다.
“이제부터 바로 비전을 깨우러 간다.”
슈리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놈은 노엘 숙부한테도 그런 말을 하더니…….
“아니, 불가능하다니까?”
“청의 신의 힘도 있는데 뭐가 불가능해.”
“신의 힘이 있다고 해도…! 애초에 비전 자체가 소실되어서 원전이 없어! 그나마 복구된 건 핵심이 없어서 안 된다고!”
“아니. 소실 안 됐어.”
“뭐?”
“어차피 니들로는 찾아내지도 못하고, 찾아줘도 못 읽었겠지만.”
“뭐??”
도대체 뭔 소리야??
본인의 방으로 들어간 아이작이 옷장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어디 보자…. 여기 있을 텐데.”
아이작이 뭘 꺼내나 싶었던 슈리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놈이 옷장에서 갑자기 기저귀를 꺼낸 것까진 좋은데…….
뭐야?
뭔데 기저귀에서 물건이 하나, 둘, 셋…. 뭔데? 왜 끊임없이 물건이 나오는데?
‘저거, 아무리 봐도 도둑맞은 에슈아 물건인데? 내가 잃어버린 물건도 있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뭔데 그 책?!”
꼬릿꼬릿한 책 하나가 나왔다. 물론 뭐라고 쓰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 고물은 도대체 뭔…….”
“비전서.”
“뭐? 비전서?”
“그래. 소실된 청의 비전서.”
…뭐?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왜긴! 아공간 기저귀니까!”
아니, 그 의미가 아니잖아, 새끼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