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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51화 (151/272)

제151화. 아, 성질 좀 죽이쇼! (2)

옛 신탁의 도시 델로스.

청의 가주 일라이는 그 델로스에 있었다.

물론 그곳엔 일라이와 그의 종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것이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다른 신앙의 기사들도 있었다.

나무 위나 폐허 건물 위에 숨어 있는 그들은, 전부 청의 가주를 감시하는 이들이었다. 청의 가주의 행보에, 다른 신앙들이 부리나케 사람을 붙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청의 가주가 진마의 땅에 가는 이유가 교황과의 거래 때문이었으니!

이 탓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쫓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청의 가주가 죽으면, 후계는?’

‘청의 후계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토벌에 성공해서 청이 비전이라도 찾게 된다면?’

‘청이 비전을 가지게 되면 끝장나는데.’

하지만 감시와는 별개로, 눈으로 보고 또 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아직 델로스 초입이라고는 하나, 적들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거늘.’

청의 가주에게 덤벼든 마족들의 숫자만 벌써 수백이 넘어갔다.

하지만 그 적들은 전부 동강이 나서 시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힘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혼자서…? 무기도 없이?’

역시 청의 가주의 이름은 어디 가지 않는다.

물론 델로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족들의 힘이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머지않아 청의 가주 혼자서는 버거운 상태가 오겠지. 어쩌면 탈진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다른 신앙의 사람들은 청의 가주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그래서 누군가가 묻기도 했다.

“그래도 적들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 공작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죽을 겁니다. 이래서는 성직자, 아니 인간으로서 도리가…….”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지 마라. 우리가 나서면 교황 성하의 일에 우리까지 개입하게 되는 거다.”

“!”

“그리고 청의 가주가 지금 죽을 경우, 잘하면 5대 가문이 4대 가문이 된다. 그러면 남은 자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저 아래에 내려가면, 지금처럼 이걸 챙길 수 있을 것 같나?”

“……!”

그들은 근처에 수북이 쌓인 짐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들은 청의 가주가 쓰러트린 마수들의 뼈나 이빨, 뿔, 마력핵 등 중요한 부산물들만 뽑아 줍고 있었다.

“이만한 걸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진마의 땅이 아닌 듯, 높은 계위의 마족들이 가득했다. 보통은 부산물 챙길 생각은 하지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강한 상대였다.

그런데 그런 놈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다?

“전부 주워라. 가져가면 마수를 퇴치한 증거물이 된다!”

“명예와 보상을 얻을 수 있지.”

교황청에서는 마족을 퇴치한 증거를 가져가면 그에 상응하는 금액과 물건을 준다.

“무엇보다 이만한 마족들을 우리가 퇴치했다고 하면? 그 공적으로 가문의 명예가 올라간다.”

“오.”

게다가 마력핵은 마도제국이나 관련 상인에게 팔면 상당한 돈이 된다.

‘저만한 걸 챙기지도 않고 그냥 가다니.’

청의 가주가 또 마족을 쓰러트리고 휘휘 걸어가자, 감시꾼들이 슬금슬금 건물에서 내려와 부산물을 챙겨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라이의 종자는 핏대를 세웠다.

“저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정녕 제정신인가……!”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자신들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물건만 챙겨가?

하물며 아까 전 위험한 순간이 있었음에도 저들은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가주님을 이용하다니.’

그렇기에 종자는 빡친 듯 주인을 보았다.

“가주님. 정녕 저자들을 내버려 둬도 되겠습니까? 청의 불행을 즐기는 놈들인 데다가, 남의 명예나 훔쳐가는 도둑놈들입니다.”

하지만 일라이는 대수롭지 않게 마족의 모가지를 뜯어냈다.

“냅둬라. 5대 신앙 놈들도 아니다. 일일이 신경 써봐야 심력 소비다.”

종자는 가주님답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정말 아이작 도련님들이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그래. 그런 것 같다.”

솔직히 도련님들의 서신을 받았을 땐 깜짝 놀랐다. 아이작이 보낸 서신이란 말에 가주의 얼굴이 일순 기뻐 보였건만.

서신을 확인하고 한순간에 호랑이가 된 얼굴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지.

‘설마 이 근방까지 오셨을 줄이야.’

가주가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낸 것이라기보단, 이런 위험한 곳에 손주들이 온 것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만.

“그래도 일단 도련님들을 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도련님들이 계시는 곳도 충분히 위험 지대입니다. 직접 가셔서 돌려 보내시는게…….”

솔직한 마음으로는 가주가 이곳을 벗어나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위험? 에슈아 사람한테 위기는 곧 시련이다. 그깟 위기도 혼자 탈출하지 못할 거면 뒤져야지.”

종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엄격하신 분.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시는군.’

그런데 그럴 때였다.

“가주님!’

새로운 마수가 나타났다. 그 마수들의 기운에 종자도 긴장하며 검을 바짝 세웠다.

“8계위 마족!”

감시꾼들도 눈을 반짝였다.

“더 희귀한 놈이다!”

그들은 가주가 빨리 적을 처리해주길 기다렸다. 저 정도 놈의 부산물이면 아예 인생이 펼 수 있다.

청의 가주가 죽더라도, 최소한 죽기 전에 힘은 빼놓아주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종자로부터 긴급한 연락이 도착했다. 청의 사람들이 긴급 연락망으로 쓰는 통신구였다.

무전처럼 모든 청의 기사들과 연결된 이 통신구는, 어지간히도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울리지 않는다.

당황한 종자가 통신구를 켰다.

“레아 아가씨? 어쩐 일이십니까?”

-할아버지가 연락을 안 받으셔서, 너한테 했어.

동시에 레아에게 무슨 말을 들은 종자가 빼액, 비명을 질렀다.

“예?! 누가 납치되셨다고요? 아이작 도련님이 마족한테 납치요?!”

-응. 할아버지가 아니면 구할 수 없어.

종자는 난처한 기색이었다.

곧 청의 가주가 드물게 관심을 가졌다.

“뭐냐.”

“…그게, 아이작 도련님이 마족에게 납치를 당하셨다고.”

종자는 본인이 말하고도 한숨을 쉬었다. 말해봐야 역정만 내실 것이 분명하다. 아까 전에도 그러지 않으셨나.

‘위험이 닥쳐도 본인의 시련이라고.’

같은 내용을 들은 감시꾼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서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에슈아 사람이 납치당했다고?

“청의 가주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교황과의 거래가 걸린 일이다.”

“원래 에슈아는 신앙의 수호자라 가족들에겐 신경을 안 쓴다. 가문의 일에 더 신경 쓸 사람이지.”

가족에게 위험이 닥쳐도 그것도 신앙의 수호자의 운명이라고 말하며 교리를 더 우선시하는 이들이었다.

“자, 그러니 어서 마족 처리나… 어?”

“어??”

감시꾼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청의 가주가 사라졌다.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가주 놈 어디 갔어?”

자세히 살펴보니, 가주의 종자도 주섬주섬 검을 메고 있었다.

“뭐야, 쟤? 왜 짐을 싸?”

아니, 짐만 싸면 다행이지. 종자 역시 강하게 땅을 딛더니, 순식간에 어디론가 달려갔다.

펑!

그러곤 마치 대포 같은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뭐야, 저거 어디 가?!”

청의 가주도, 종자도 기운이 느껴지지 않…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긴 델로스 한복판.

‘청의 가주가 없다면……’

그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8계위 마족은 물론 지금껏 청의 가주의 기운 때문에 다가오지도 못하던 마물들이 눈을 번득였다. 어느새 마물들의 눈이 전부 감시꾼들을 향하고 있었다.

핏기까지 사라진 감시꾼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 * *

한편, 그 무렵. 델로스 인근 마을.

“흠. 정말 이걸로 할부지가 올지는 모르겠네.”

구조 요청을 한 아이작은 귀를 후비고 있었다. 뭐, 일단 레아의 말대로 마족에게 납치된 걸로 했지만, 고작 이런 걸로 할아버지가 올까?

“정 안되면 델로스로 들어가야겠지.”

레아의 말에, 슈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끙. 진짜 델로스에 가는 거야? 거긴 해골왕이 정복한 땅이잖아.”

그 말에 위스퍼가 기억난다는 듯 물었다.

[델로스는 주인님이 옛날에 파멸시킨 곳이죠?]

‘뭐, 그랬었지.’

[인간의 땅은 흥미도 안 가지시던 주인님이 유일하게 파멸시킨 곳이라 신기했던 곳이죠.]

그 말에 아이작은 머리를 휘저었다.

“흠. 거긴 될 수 있음 안 가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슈리가 어쩐 일이냐는 듯, 동시에 감격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너도 알긴 아는구나.”

슈리는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작에게 말을 꺼냈다.

“수백 년 전, 해골왕은 델로스의 신관들과 성직자들을 잔인하게 없앴다고. 지금도 그 해골왕의 마력이 남아 있는 곳이야.”

그러자 레아가 물었다.

“해골왕은 딱히 신성제국 땅을 안 노렸잖아. 델로스는 왜 건드렸지?”

“이유야 모르죠. 그 극악무도한 놈한테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싶지만… 분명 거기서 신성제국의 중요한 인물이 처형당했다고 들었는데…….”

“누가 처형당했는데?”

“어… 정작 그걸 모르겠네요. 대규모 처형이 있었다는데, 누가 처형당했는지는 안 나와서. 누구더라. 주교였나?”

바로 그때였다.

“누구긴. 성녀님이시다!”

익숙한 목소리에 슈리도 레아도 화들짝 놀랐다.

“…숙부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릴라이였다. 드물게 숨을 헐떡이는 채였다. 그의 뒤에는 릴라이와 함께 청의 기사들도 있었다.

덕분에 슈리는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숙부님이 왜 여기에 계세요?!”

“왜 있긴. 너희를 쫓아온 거지! 여기가 어디라고 무모하게 온 거냐! 헉…헉!”

“…그런데, 숙부님. 왜 이렇게 숨을.”

“헉…! 근방에 있었는데… 헉! 헉! 갑자기 청의 기사 전용 통신구가 울려서!”

“이 근방이라니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뛰어오셨길래 천하의 숙부님이 이렇게 숨을…….”

“힐레스!”

“아니, 거긴 전속력으로 달려도 며칠은 걸리는 곳이잖아요!”

통신구를 쓴 지 아직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 거기서 여기까지 왔다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작은!”

“예?”

“통신구로 그랬잖니! 아이작이 납치됐다고!”

‘통신구라니… 설마.’

레아가 통신한 내용을 들은 건가?

동시에 그들은 아차 싶었다. 그 정도 거리에 있던 릴라이 숙부가 들었다면, 다른 청의 기사들한테까지도 다 들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설마 대륙 곳곳에서 몰려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청의 기사들의 통신구를 발동시킨 그들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이 납치됐다! 아이작 도련님을 구하라!

-진마, 이 씹새끼들.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감히 누굴 납치해?!

…아무래도 대륙에 흩어진 청의 기사들이란 기사들은 모조리 델로스로 몰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사고 쳤다.’

하지만 가짜라는 걸 알 턱 없는 릴라이의 눈은 뒤집혀 있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예? 여기 있잖… 뭐야. 얘 어딨어?”

슈리는 당황한 듯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릴라이 님! 아이작 님이 저기에!’

“!”

청의 기사들이 바깥을 가리켰다. 건너편 지붕 위에 백금발의 소년과 한 마족이 있었다.

그리고 마족에게 정말로 납치당한 아이작은 땀을 삐질 흘렸다.

‘아, 입장이 좀 난처해졌네.’

델로스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화제라 잠깐 밖에 나왔는데, 그사이에 정말로 납치를 당했다. 아무래도 백금발이라 바로 납치를 당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곳에서 성자를 보다니. 그분이 좋아하시겠군!]

심지어 진짜 마족이야…….

그 광경에 릴라이와 기사들이 분노했다.

“저놈이 아이작을 납치한 진마냐!”

아니. 아닌데요…….

결국 아이작은 에휴, 한숨을 쉬었다.

납치범이라고 해봐야 아이작의 수준에선 조무래기였다.

‘그래도 오히려 잘됐나? 릴라이도 있겠다, 비전 시험용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그래도 이왕이면 할아버지가 있을 때 쓰는게 좋은데…….’

그런데 그때였다.

“네놈이 내 손자를 납치한 놈이냐?”

…엉?

마족의 뒤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그것도 아주 험악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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