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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52화 (152/272)

제152화. 아, 성질 좀 죽이쇼! (3)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일라이였다.

“할부지?”

달빛을 등진 채 살의를 뿜고 있는 얼굴이 무서웠다.

원래도 그의 눈은 늑대나 호랑이에 가까웠지만, 평소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살벌했다. 칼날 같은 목소리는 적의 목을 도려낼 것 마냥 날카로웠다.

솔직히 아이작도 처음 봤다. 할아버지가 저렇게 분노하는 얼굴을.

“니 새끼가 우리 애한테 손을 댔어?”

눈빛만으로 아이작을 납치한 마족을 찢어발길 기세였다. 그 기세가 너무 드세서 해골왕조차도 일순간 찔끔할 정도였다.

하다못해 아이작을 잡고 있는 마족도 당황한 눈치였다.

하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

‘납치한 지 1분…은 지났나?’

아니, 몇 초도 안 된 것 같은데 가족들이 나타났으니, 납치범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아니, 빨리 나타나기만 한 거면 말도 안 하지.

“감히 우리 애를 영겁의 시간 동안 공포에 떨게 해?”

아니. 아닌데.

납치한 건 맞는데, 아무튼 그거 아냐!

우리 애라고 해준 건 좀 기쁘긴 한데. 이 납치범, 좀 억울하다고 할아버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눈이 뒤집힌 일라이가 손을 까닥거렸다. 서슬 푸르게 빛나는 청안에서 살의가 치솟아올랐다.

“내 손가락에게 손을 댄 걸 후회하게 해주지.”

치솟는 분노에 마족도 쫄은 듯, 눈알을 굴렸다. 뭔가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과는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실제로 마족의 말투가 아주 조금 공손해졌다.

“기… 기다려라. 나는 청과 협상을 하려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자 청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서 헛소리를!”

“이 뻔뻔한 마족 놈!”

청의 기사들은 어째서인지 눈에서 살의를 뿜어냈다.

“해를 가할 생각이 없어?“

“도련님을 붙잡아두고 몇 시간이나 고문을 하지 않았느냐!”

청의 기사들의 외침에, 마족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었다.

“…고문? 고문이라니?”

“발뺌하지 마라! 이미 다 알고 왔다!”

다 알고 왔다니! 뭘?

마족은 당황스러워했지만, 아이작은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땀을 삐질 흘렸다.

고문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덧붙였던 거 같기도 하고…….’

분명 통신구로 납치 사실에 대해 전달할 때였다. 레아가 내용을 전달하기 전에 물었다.

-그럼 아이작, 할아버지한테 네가 마족에게 납치되었다고 전할게.

-아, 그냥 잡혀있다고 하면 재미없으니까, 고문당하고 있다고 해. 고문당해서 죽어간다고.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던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 기사들과 릴라이의 눈이 돌아갔다.

“극악무도한 놈! 저 작고 어린 분에게 고문할 곳이 어디에 있다고!”

“똑같이 고문해주마, 개새끼야!”

…아, 어쩐지 애들 눈깔이 돌아 있더라.

아이작은 측은하게 마족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에 아이작을 잡은 마족은 고문은커녕 당황한 듯 아이작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쟤, 쟤들 왜 저래? 진짜?”

“…뭐, 그렇게 됐다. 미안하구나.”

“도대체 쟤들한테 뭐라고 했길래 저것들이 저러냐고!”

뭐라곤 안 했고… 사기를 좀 쳤지.

그때 손자의 고문 소식에 눈이 돌아간 일라이가 손을 우득거렸다. 그와 동시에 푸른 성력이 불처럼 치솟았다.

그래, 마치 불길 같았다. 가주가 늘 쓰는 물이 그야말로 불길처럼 타올라 증발을… 뭐? 증발?!

가주의 물의 성법을 본 아이작은 아득해졌다.

아니, 물의 성법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못해 기체로 변하고 있으면, 도대체 얼마나 빡이 친 거야.

심지어 물과 닿은 부분이 염산에 닿은 듯 푸시식 연기를 내며 녹고 있다.

“엉겁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지.”

아니! 잠깐!

할아버지, 다 좋은데, 좀 진정해 봐!

그거 날리면 이 일대 죄다 녹아! 아니,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제일 먼저 죽겠네!

그리고 이 새끼, 재도 안 남아! 내가 비전을 쓰는 의미 없이 녹아내린다고!

“해골왕처럼 뼈다귀로 만들어주지!”

“주인처럼 빡빡 밀어주마!’

릴라이, 니들도 좀 닥쳐!

결국 아이작은 한숨을 쉬었다.

뭐, 자신을 납치한 건 괘씸하지만, 약간의 오해가 섞인 상황이긴 했다. 저놈들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릴테니, 특별히 이놈은 내가 처리해주ㅁ…….

“허, 좋다. 협상할 의지가 없다면 성녀와 성녀 가문의 장남처럼 이놈 새끼도 찢어주지.”

마족이 아이작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그와 함께 아이작의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주륵.

목선을 타고 떨어지는 그 붉은 선혈의 감촉에 아이작은 썩은 미소를 흘렸다.

아… 끝났네.

이 미친 새끼가 제 무덤을 팠네.

결국 아이작의 피를 본 청의 사람들의 인내심이 끊겼다. 원래는 아이 앞이라 최대한 안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마냥 눈빛이 변한 그들이, 일제히 공격을 날렸다.

<광속>.

제일 먼저 릴라이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마족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검과 하나가 되어 무서운 속도로 마족을 찍어내렸다.

콰직! 콰직! 쾅!

원래는 한 발 필살기에 가까운 일격이었다. 푸른 섬광이 얼굴을, 몸통을, 다리를 타격하며 이곳저곳에서 번쩍였다.

한 발, 한 발로도 이미 치명타인 일격이 10연타, 20연타, 100연타를 갈기며 마족을 몸을 박살 냈다.

마족도 핏대를 세우며 릴라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갑자기 하늘 위로 푸른빛이 떠올랐다.

<임전무퇴>.

모여 있던 청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에 성력을 담아 날렸다. 맹렬한 청의 빛이 한 개도 아니고, 수십 개가 마족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펑펑펑!

하늘에 수를 놓는 매서운 빛이 정신없이 마족에게 내리꽂혔다.

“커헉, 커허어억!”

본래라면 성법의 이름처럼 사활을 걸었을 때 쓰는 성법이다. 그만큼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마족을 고깃덩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치명상을 입어 가죽이 벗겨진 듯한 마족은, 피를 토하면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 미친 새끼들……!’

강하다.

미친 듯이 강했다.

이렇게 된 이상, 주인님을 불러와야 했다. 그래서 이 비겁한 놈들에게 복수를……!

“커헉, 알았다! 애는 돌려줄 테니! 그만! 이제 그… 헉!”

마족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빛을 등진 일라이의 뒤에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존재가 너무 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고 더 올려다 봐도, 일라이가 도대체 무엇을 소환했는지 형태조차 가늠할 수 없다.

마치 우주를 보는 것처럼, 그 존재가 너무 거대했다. 마족이 스스로 작은 점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벌백계>.

마침내 그 푸른빛의 일격이 마족의 몸 위로 떨어졌다.

힘에 짓눌린다, 이 표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 사방에서 가해졌다.

“아악!”

곧 비명과 함께 마족은 한순간에 갈기갈기 찢겨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아이작의 눈은 아득해졌다.

…이 잔인한 청의 새끼들.

애를 꼬챙이로 찌르고, 다져놓고, 가죽을 벗기더니, 최후엔 그냥 아예 재로 만드네. 그것도 치사하게 다굴을 쳐서.

심지어 가주놈은 저만한 햇병아리를 상대로 해골왕한테 날릴 만한 성법을 그냥 막 날려버리네.

뼛가루 정도는 남겨주지.

[글쎄요. 주인님의 사기 탓이 한 50%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아이작은 눈만 또르륵 굴렸다.

뭐, 그건 미안하네.

하지만 뭐 어쩔 거야. 날 인질로 잡은 이놈 탓이지.

헛짓거리 안 했으면 내가 비전으로 편하게 보내줄 수 있었잖아.

그런데 그때였다.

“아이작 괜찮으냐!”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릴라이와 청의 기사들이 급히 아이작에게 달려왔다.

“다친 곳은? 그 새끼가 심하게 고문을 하더냐!”

“아니 고문 눼… 뭐. 괜찮아요.”

“무사해서 다행이다!”

릴라이가 아이작을 꼬옥 끌어안았다.

터져 죽을 것 같았던 아이작은 낑낑 숙부를 밀어냈다. 이 새끼는 뭔데 이렇게 오버를…….

“이 일대는 큰 형님과 성녀님이 실종되신 곳이다. 너도 똑같이 될까 걱정했단다.”

아. 청이 눈이 돌아갈 만하네. 하필 부모님이 사라진 곳이 이 일대였나?

‘에휴. 뭐, 됐다.’

애초에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되돌아왔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주가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냐.”

“할아버지!”

아이작을 확인한 가주는 미련 없이 홱 돌아섰다.

“괜찮은 거 같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라.”

“할부지!”

“허락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건 딱 한 번 용서해주마. 하지만 두 번은 없다.”

그 목소리에 화가 섞여 있어 움찔한 슈리가 황급히 가주를 보았다.

“가, 가주님은요?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거죠?”

“난 안 돌아간다. 진마의 땅으로 가겠다.”

뭐? 안 돌아간다고?

당황한 슈리가 결례를 무릅쓰고 외쳤다.

“가주님! 서신에 썼다시피, 이제 청도 비전을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레아도, 릴라이도 처음 듣는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비전이라니? 무슨 소리냐?”

그러자 슈리가 아이작을 잡았다.

“아이작이 청의 비전을 부활시켰어요! 그럼 이제 교황 성하의 명을 들을 이유도 없잖아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청의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릴라이 역시 제 귀를 의심하듯 아이작을 붙잡았다.

“아이작, 네가 청 비전을 부활시켰다고? 그게 정말이냐?”

노엘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것은 허풍이 아니었던 건가?

곧 슈리가 말했다.

“아이작이 쓰는 걸 제 눈으로 봤어요. 그치?”

가주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아이작을 보았다. 솔직히 믿지 않는 눈빛이다.

그러자 아이작은 가주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뭣하면, 보여드려요?”

아이작의 등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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