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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53화 (153/272)

제153화. 희망의 불씨 (1)

아이작의 미소에 모두 당황한 기색이었다.

특히 가주는 믿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약 40년 전. 청은 크게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바로 일라이가 막 가주가 되었을 때였다.

-신년이잖습니까. 추기경으로서 5대 신앙의 어리고 젊은 인재들 앞에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신년.

견습 사제들의 졸업식임과 동시에, 무소속인 성직자들이 신앙을 고르게 되는 중요한 때.

하지만 당시 추기경들은 천재인 일라이가 자신들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게 영 심기에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심지어 조카뻘 아이한테.

당시 청은 비전을 쓸 수 없는 어려운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비전을 보여주자고 입을 모았다.

-비전을 보여주죠. 어린 새싹들이 이름 높은 일라이 추기경의 힘을 보고 싶어할 겁니다!

-하지만… 청은 비전을…….

-왜요! 일라이 추기경에게 그깟 비전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형태를 구현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죠!

-우리도 다 함께 비전을 보여주겠습니다!

아마 그들은 청이 비전을 쓸 수 없는 걸 알면서 일부러 강행했던 걸 거다.

결국 그들의 계획대로 수많은 인파 앞에서 청만 비전을 쓰지 못했고, 큰 멸시와 굴욕을 당했다.

-뭐야, 비전도 못 쓰는 게 5대 신앙이라고?

-와…. 희망이 없다. 저긴 절대 가면 안 돼.

-쟤들은 해골왕도 못 잡고, 비전도 못 쓰고.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하물며 신앙 선택? 비전조차 쓰지 못하는 청을 택할 이들이 있을 리 없었다.

-올해 청의 성직자는 한 명도 없었네.

-누가 청을 따르겠냐.

그리고 일라이는 잊지 못한다.

청에겐 미래가 없다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멸시를? 앞에선 괜찮다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것 보라는 듯 웃는 다른 신앙의 추기경들의 얼굴을?

아니었다.

일라이의 가슴에 뿌리박힌 건, 절망하는 청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힘이 없어 동료를 구하지 못하고 끝내 오열하는 가족의 얼굴.

그래서 그 뒤로 꾸준히 비전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사라진 장남조차도 어떻게든 부활시키겠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청의 비전만큼은 제가 꼭 부활시키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저주인지, 비전과 얽힌 이들은 모두 죽었고 끝내는 장남마저도 사라졌지.

그런데 그걸 부활시키겠노라고, 이 조그만 아이가 말한다. 심지어 빛보다 더 밝은 얼굴로.

“보고 놀라지 마세요.”

아이작은 바로 비전을 발동했다.

동시에 아이작의 등뒤로 후광과 같은 빛이 생겼다. 그 빛은 마치 날개처럼 뻗어나가고, 아이작의 손바닥에서 청의 신의 문양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청의 기사들도, 릴라이도 제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저건 청의 신의 힘!”

그들은 감격한 듯 외쳤다.

“빛의 신의 힘이 되돌아온 것인가!”

그들의 반응에 아이작은 크, 뿌듯한 듯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지! 이런 반응을 기대했어!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아이작은 그 상대로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치솟아 오르며 주변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성력의 힘의 파동에,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박살 났다. 청의 기사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오! 이런 광경은 처음 봅니다!”

“역시 도련님!”

“정말 비전이 돌아온 겁니까?”

레아도, 릴라이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현상이며, 힘하며. 비전의 특징하고 똑같다.

청의 비전을 부활시키기 위해 몸을 갈고닦았던 직계 사람들이 저 모습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레아는 멜리사에게 들은 것이 있기에 더욱 눈빛이 달랐다.

“아이작이 정말로……!”

릴라이의 반응까지 확인한 아이작은 보란 듯이 가주를 보았다.

자, 어떠냐!

이게 바로 성녀들이 쓰던 비전이다! 직접 눈으로 본 걸 재현했으니, 두말할 것도 없겠지!

[눈으로 보신 게 아니라 쳐맞으며 익힌… 컥!]

맞은 적 없거든? 아무리 나라도 비전에 맞으면 성불이거든?

사실 멜리사도 비전을 잘 구현하진 못했다. 멜리사는 분명 강했지만 단순무식한 근육 바보… 아니, 무력계였으니.

아무튼 비전을 가장 잘 활용하던 성녀의 것을 가져왔으니, 이놈들 입장에선 최고의 성법을 보게 된 셈이란 것이다. 그랬기에 아이작은 의기양양하게 가주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주는 드물게 말문이 막힌 채 아이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의 신이 네게 응답을 해주신 거냐.”

그래, 새끼야! 어떠냐! 이제 진마의 땅에 갈 맘이 사라졌지?

이제 교황의 말에 따를 이유는…….

“그렇다면 더더욱 진마의 땅에 가야겠구나.”

캬, 네가 그럼 그렇ㅈ… 뭐가 어째?! 인마?!

아이작은 당황한 듯 가주를 보았다. 그러나 가주는 기대 이상이라는 듯한 얼굴로 아이작을 보았다.

“설마 네가 여기까지 구현해낼 줄은 몰랐다. 네 아비도, 숙부들도 그 형태는 만들어내지도 못했거늘. 하지만 너라면 정말 부활이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그 형태를 발전시키며 비전을 부활시켜 봐라.”

“……?!”

형태라니. 뭔 소리야.

이거 닿으면 마족들 그냥 녹아내려! 정화된다고!

그래서 이 새끼가 뭔 말을 하나 싶었지만, 아이작은 곧 아차 싶었다.

‘그래! 가주도 비전을 부활시키려 했으니까, 어느 정도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했던 거야!’

즉 할아버지 입장에선 이게 완벽한 모형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태는 완벽하지만, 이게 진마를 무찌를 위력의 검이란 건 모르는 거지!

그 증거로 가주가 흡족해하듯 아이작을 보았다.

“그 정도 만들어냈으면 머지 않아 마족도 처리할 수 있겠지. 그러니 너는 그 힘을 포기해서도, 죽어서도 안 된다.”

마치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눈빛.

“이 할아비가 교황에게서 비전의 힘을 찾아줄 테니, 네가 어른이 되어 못 다한 걸 이뤄라.”

그 말에 릴라이나 청의 기사들은 내심 울컥하듯 가주를 바라보았다. 가주가 아이작을 인정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도련님을 인정해 주셨군요.”

“비전의 형태를 부활해 주시다니. 역시 차기 가주 자리는 저분밖에 없을 겁니다.”

“청의 한을 풀어주시길.”

하지만 주변에서 감동하고 자시고, 정작 아이작은 미치고 환장할 판이었다.

아니이이! 못 다한 걸 이루고 자시고, 이미 이뤘다고! 이 찌발 놈들아!

아이작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가주가 인정해준 건 좋지만, 이래서는 뭔가 제대로 인정받은 느낌이 아니지!

이거는 그러니까… 그런 느낌이다.

세상에 없던 혁신적인 발명을 해냈는데, 노벨상이 아니라 어린이 발명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칭찬받는 느낌!

뭐, 청의 기사들 앞에서 가주의 인정을 받았으니 나쁘진 않지만, 이걸로 만족할 것 같아? 해골왕이 이런 취급을 받고 가만있을 것 같으냐?!

‘젠장! 나무를 부수는 것 정도로는 안 돼!’

형태가 아니다. 비전의 진짜 힘을 보여주려면 마족을 쓰러트려야 해!

그런데 있는 마족은 이미 이놈들이 쓰러트렸고오오!!

‘아니, 아니지.’

애초에 그 마족으로도 부족하긴 했다. 쓰러트린 마족은 그래봐야 5계위 정도였으니까.

그 정도 마족이면 사실 비전을 쓰기도 전에, 빛의 신의 성력에 이미 찢겨져 나갔을 테니까.

[최소한 상급 마족을 상대할 정도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죠?]

‘하. 뭐 괜찮아. 마침 여긴 마족의 땅이다. 금방 증명해보일 수 있어. ’

아이작도 비전의 힘이 어디까지 먹힐지 궁금하던 참이긴 했다.

‘그러니 위스퍼.’

[넵. 시간은 걸리겠지만 델로스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니가 구체화해서 마족으로 변신해라.’

[…예?]

‘그리고 나한테 털려라.’

[…진심이십니까?]

‘왜. 너 상급 마족이나 다름없잖아. 비전의 힘을 선보이는 용으로는 딱이야.’

[…고작 그런 용도로 저더러 죽으란 말씀?]

‘다시 부활시켜 줄게.’

[그건 이미 제가 아니잖아요! 저 말고 다른 마족도 있잖습니까! 이를테면 애쉬라든가! 이 근방에 불러내시지 않았습니까?]

뭐, 불러내긴 했지. 샤브나크랑 같이 가주를 쫓으라 했으니까.

‘하지만 가주가 여기 있으니 이 근방에 있겠군.’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의 시선이 슬쩍 나무 위를 향했다. 그곳엔 샤브나크와 애쉬가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애쉬는 기겁해서 붕붕 저었다.

‘뭐, 애쉬 놈은 이미 겁에 질려서 안 되겠네. 역시 너로…….’

[으악! 상급이라면 상급이다 못해 최상급 진마인 샤브나크도 있는데, 하필 왜 저를!]

‘샤브나크?’

아이작이 힐끗 샤브나크를 보자, 움찔한 샤브나크가 근엄하고 진지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께서 명만 하신다면, 기꺼이 비전의 실험 대상이 되어 죽겠습니다.]

‘아니, 죽으라곤 안 했는데.’

[명예롭게 죽겠습니다!!]

그런 샤브나크를 애쉬가 애절하게 말리는 게 보였다. 그 광경에 아이작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샤브나크.’

[예. 언제 죽으면 될까요.]

‘…큼. 이 영역에 있는 진마가 누구인지 파악이 됐나?’

[광혈 형제입니다.]

‘아…. 하필 그놈들?’

아이작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놈들이 하필 델로스에 있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델로스에 남아있는 해골왕의 힘을 먹으려는 거겠군.’

성녀와 장남, 즉 부모님을 납치한 것도 틀림없이 그놈들일 것이다.

‘하이에나라면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지.’

그리고 능력으로만 봐도 청에게는 골치 아픈.

‘확실히 그놈들이라면 교황이 할아버지를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게 하려고 한 건 아니야.’

아니, 어떤 의미론 더 악질이다.

아니나 다를까, 릴라이가 말했다.

“아버지. 델로스는 위험합니다. 저희도 왔으니, 이왕 이리된 거, 차라리 함께 가시는게…….”

“아니다.”

가주에게 있어 이곳은 장남과 성녀를 잃은 곳이었다. 사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을 여기서 또 잃을 순 없다.”

[그래, 그 말대로다. 꼬마들아.]

“!”

목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졌다.

쩌엉!

“크윽!”

그들은 당황한 듯,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달빛을 등진 채 금발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얼굴로 에슈아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은발이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지?”

쿵!

그 남자를 본 에슈아 사람들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진마……!!”

그 위압에 잠시 경직됐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인간이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동시에 해골왕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싸워야 하는 수문장적인 존재.

“하하하. 에슈아 핏줄이 몇 마리나 있는 거냐고! 이게 웬 행운이지? 게다가 그 유명한 백금발까지 있네?”

명백하게 아이작을 노리는 남자의 말에, 샤브나크가 벌레 보듯 미간을 좁혔다.

[주군. 처리할까요?]

‘아냐. 오히려 잘됐어.’

아이작이 서둘러 성법을 발동했다.

그때, 마족이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커헉!”

“아악!”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청의 기사들을 쓰러트렸다. 기사들이 배, 심장, 목, 눈, 장기가 있는 부위를 감싸안으며 쓰러졌다.

장기를 잃은 7계위 청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그 모든 게 눈 깜짝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살아있나!”

“살아는 있습니다만…! 누구는 눈을 잃고, 복통을 호소해서!”

청의 가주가 성법진을 펼쳤다.

“장기를 빼앗는 놈이다. 괴로워하는 걸 즐기는 놈이지.”

“크윽…! 저놈이!”

릴라이가 힘을 쓰려하자, 가주가 말렸다.

“손대지 마라!”

“!”

“심장을 빼앗기면 끝이다. 여기 있는 진마는 비전이 없으면 절대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가주가 손짓을 하며 어떤 성법을 발동했다. 그 성법진에 기사들이 흠칫 놀랐다.

“가주님! 그 성법은 안 됩니다!”

릴라이도 당황한 듯했다.

“아버지! 그만두세요!”

가주가 쓰려는 성법은 본인의 목숨을 담보로 아군을 먼 곳으로 날려보내는 탈출 성법이었다.

“여기서 후계자들을 죽게 할 순 없다. 저놈은 내가 붙잡고 있으마.”

마족은 큭큭 웃었다.

“청이 비전도 없이 날 상대하게? 댁의 장자도 호기롭게 굴다가 사라졌거늘, 뭐 좋아. 아들이 묻힌 곳에서 아버지도 묻어주지.”

그런데 그때였다.

가주가 성법을 발동하려는 그 순간, 아이작이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갔다.

가주는 놀라서 그를 보았다.

“아이작!”

“똑똑히 보라고요! 할부지!”

…엉?

그때,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푸른 섬광이 치솟아 올랐다. 그 위압적인 빛은 마족에게 날아가 정확하게 적중했다.

“잠깐, 뭐야!”

빛에 적중당한 마족은 당황했다. 빛과 맞닿은 부분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가주는 제 눈을 의심했다.

그 빛은 분명 아이작이 쓴 성법이었지만, 위력이 완전히 달랐다. 압도적인 크기의 빛의 폭풍은 스친 것 만으로도 마족의 팔을 찢어발겼다. 빛이 어둠을 쫓아내듯, 비전의 빛이 닿는 모든 곳의 마를 없앤 것이다.

그 아름다운 빛을 등진 채, 아이작이 웃었다.

“봤죠? 나 비전 쓸 수 있다니까?”

가주는 말문을 잃었다.

그 순간, 가주의 머릿속에 문득 교황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일라이. 포기하고 교황가 밑으로 들어와라.

비전도 못 쓰는 너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냐고. 하지만 어릴 때의 정이 있으니 자신들이 받아주겠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

-청의 한순간의 실수는 용서해주마.

실수, 그래 실수지.

미워해야 하는 대상을 동정해 버렸으니.

-해골왕을 동정하여 놈을 죽이지 못한 죄. 신들은 너희에게 분노하고 계신다.

교황의 말은 곧 신의 말과 같다.

-알았나? 청을 살릴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아이작을 보는 일라이는 가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청을 살릴 수 있는 건 교황가뿐이라고?

아니, 틀렸다.

청을 살릴 수 있는 건 네가 아니다.

“아, 할부지 봤냐고요!”

바로 저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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