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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54화 (154/272)

제154화. 희망의 불씨 (2)

푸른빛이 치솟았다.

그 빛은 차갑게 내려앉은 밤의 어스름을 햇살로 바꿀 만큼 강렬하고 찬란했다.

처음 보는 빛의 형태에 기사들은 넋을 잃었다. 마치 절망 속에서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주는 듯한 느낌.

그래서 청의 사람들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빛의 신을 따르는 그들이지만, 살아생전 한 번이라도 이만한 빛을 본 적이 있었던가.

간절하게 신을 찾았으나, 신의 무응답에 그들은 성전대로 더욱 혹독하게 몸을 가다듬고, 인내하고 또 인내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제아무리 인내의 신앙이라고 한들, 그들은 나약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정말 신들에게 버림받았을지 모른다는 절망과 불안 속에서 이 빛과 조우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장기를 뺏긴 어느 기사는 눈물마저 흘렸다.

“크으…. 저 빛을 보고 있으니 이젠 고통도 안 느껴져……!”

“다행이다…. 크으!”

물론 그 말에 정작 슈리는 기겁을 했지만.

“야! 다행은 개뿔이! 정신차려! 그거 죽어가는 신호잖아!”

“…아닙니다, 진짜 고통이 안 느껴집니다!”

“어…. 저도.”

“아, 저 빛만 따라가면 이제 고통도 뭣도 없을 것 같은…….”

“아, 빛 너머 강가에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을 흔드는 것 같아…….”

“그거 황천길 아니냐고!”

치유 성법을 쓰는 슈리는 당황스러웠지만, 기사들의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 더욱 당황스럽다.

‘아무리 청이 인내의 신앙이라, 고통을 즐기는 변태 소리를 듣는다 해도, 이거는 좀…….’

하지만 슈리는 금방 그 이유를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이 빛, 고통을… 아니! 상처를 아물게 해주고 있었다!

‘설마 마족은 찢어내고, 사람에겐 치료 효과가 있는 건가?’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좀 이상했다. 청의 성법은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치료 쪽은 백의 신앙과 비교하면 약했다.

‘이 정도면 백의 신앙과 맞먹을 수준인데.’

설마 비전의 힘인가?

아니다.

‘이건 아이작의 힘이 섞여서 생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기적은 교황이나 백의 추기경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동시에 두 팔이 사라진 마족은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이 미친! 이건 비전이잖아!”

과거에 비전을 가진 청은 어떤 존재였는가.

-청은 신성제국의 성화요. 그 존재만으로 다가오는 모든 마를 멸할 구제의 빛이니.

빛에 닿은 곳에 푸른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마족은 급히 델로스 쪽으로 달아났다.

‘이건 예상 밖의 일이다!’

성녀와 해골왕의 싸움을 지켜봐 온 만큼, 청의 비전을 모를 리가 없는 그들이었다. 청의 비전 앞에서는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청은 교황에 의해 비전을 잃은 게 아니었나?’

당황한 마족이 물러나자, 비교적 사지가 멀쩡한 기사들이 황급히 외쳤다.

“가주님! 마족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 틈에 어서 안전지대로 가시죠!”

용맹한 청의 기사들이었다. 마족을 추격하지 못하는 건 분하지만, 지금은 주인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물론, 이 몸으로는 이제 은퇴를 생각해야겠지만…….’

기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억울한 마음에 원수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지만, 주인들을 지키는 게 자신들의 사명.

주인들의 몸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저희는 괜찮으니, 어서!”

“지금은 저희를 신경 쓰지 마시고, 피신을…….”

“릴라이, 너는 이들을 데리고 가라.”

“예? 아버지는요?”

“나는 저놈을 쫓아 목이라도 들고 오겠다. 저놈이 델로스에서 빠져나온 지금이야말로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니 너는 기사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에슈아로 돌아…….”

“어딜 가냐아아, 때끼야!!”

…엉?

가주가 나서기 직전에 아이작이 슝 뛰쳐나갔다.

당황한 릴라이가 급히 외쳤다.

“아이작! 어딜 가는 것이냐!”

“애들 장기는 놓고 가, 씹새야!”

…뭐, 뭐? 뭘 놓고 가?

고속 활보를 쓴 아이작이 순식간에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마족을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미쳤냐, 애들을 저대로 두게.’

비록 비전을 발동하는 데 아직 익숙하지 않아 기사들이 안타깝게 먼저 습격당하긴 했지만, 저놈에 대해서는 아이작이 잘 알았다.

<갈취>.

손가락 신호로 먼 곳에 있는 물건을 훔치는 마법이었다.

즉, 도둑놈들이란 의미다. 그래서 아이작은 일단 손부터 날려버린 것이었다.

‘뭐, 원래는 저렇게 금방 가져가진 못했는데, 못 본 사이 기술은 늘었군.’

뭐, 중요한 건 도둑놈인 만큼, 훔쳐 온 물건은 반드시 보관하고 있단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면, 장기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단 의미지!

“아직 장래가 창창한 녀석들을 병신으로 만들 것 같냐!”

아이작의 분노에 위스퍼는 감탄했다.

[오, 주인님. 어쩐 일로 성직자들 걱정을……!]

‘성기사 때끼들은 아직 한참 굴려 먹어야 하는데, 은퇴가 웬 말이냐고!’

[아. 그럼 그렇죠.]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자신을 좋아해 주고, 청에 충성하는 가신들이었다. 미래를 앗아가게 냅둘 순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마 정도면 마력핵이 얼마인 줄 알아?!’

이건 팔아도 이득이고, 흡수해도 이득이다!

심지어 광혈 형제?

‘그놈들은 전투 특화 마족도 아니고, 빛에 약한 도둑놈들이다.’

지금의 청의 비전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심지어 장남, 아니 부모를 납치한 놈들이라고? 이거라면 원수도 갚고, 청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내가 이런 기회를 놓칠 것 같아?!

[…와, 진짜 개속물.]

‘닥쳐! 이런 건 원래 다 명분 싸움이야!’

노엘이 장남이 사라진 걸로 세력을 긁어모았다면, 자신은 정반대 명분으로 긁어모으면 될 뿐.

그리고 사실 내심 신경 쓰이긴 했다. 이 육신은 왜 에슈아 저택에서 태어난 게 아닌지. 부모들은 왜 굳이 에슈아 저택을 떠나서 이놈들에게 변을 당한 건지.

하다못해 상대가 도둑놈인 걸 감안하면 부모의 무덤 장소나 유품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미쳤다고 내가 이런 떡을 놓칠 것 같아?!

“기사들이랑 부모님의 원수! (내 떡) 절대 안 놓친다!”

숲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기사들은 내심 눈가를 짚었다.

‘세상에, 저희를 그리 생각해 주시다니.’

“거기에 부모님까지 신경 쓰고 계셨어…….”

가주도 내심 신경 쓰인다는 눈빛이었다. 그간 가끔 아이작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던 것이다.

분노의 감정은 있지만, 다른 마음은 미숙하다고, 그래서 전부 해골왕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해골왕처럼 감정을 잊은 거라고.

하지만 티만 안 내고 있었을 뿐, 사실 부모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 인성은 썩어도,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있었어.’

이 정도면 걱정 않고 후계 자리를 줘도 될 것 같다.

가주도 결계 성법을 쳐주며 서둘러 움직였다.

그러자 그때, 앞장선 아이작이 마족 앞에 멈춰 섰다. 강을 건너고, 길고 긴 추격전 끝에 멈춘 마족은, 이를 갈며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쫓아오는 놈이 너였냐! 백금발!]

아이작은 마족에게 다가갔다.

“내놔라, 내 똘마니들 장기.”

청의 가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한 마족은 안도하듯 웃음을 흘렸다.

[아직 어린 에슈아가 겁대가리도 없구나.]

비전이 위험하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그걸 감안하고 일부러 델로스와 가까운 곳까지 유인한 것이었다.

‘해골왕의 마력이 넘쳐 성력을 쓰기 힘든 곳. 거기다 함정까지 있다.’

그 증거로 마족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 바닥엔 보이지 않는 마법선들이 있었다.

‘밟아라. 어디든 밟으면 네 몸이 날아갈 테지.’

마족은 아이작이 더 가깝게 오도록 도발했다.

[네 부모는 은발이던데, 네 머리카락도 벗겨서 함께 엮어서 팔면 큰돈이 되겠지…. 컥!]

푸른 비전의 빛이 마족의 목을 찢겨냈다. 손을 휘두른 아이작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목을 지지면 목소리도 못 내겠구나.”

“커윽…. 커헉!”

마족은 당황한 듯 점점 가까워지는 아이작을 보았다. 왜, 해골왕의 독기에도 안 쓰러지고 멀쩡하지?

아니, 그 이전의 문제다.

‘함정 결계를 그냥 지나쳤다고? 저걸 어떻게…….’

“어떻게 함정을 눈치챘냐고?”

[?!]

마음을 읽혔나?

당황한 마족이 아이작을 보았지만, 아이작의 눈이 반달로 휘었다.

“눈에 보이니까, 새끼야.”

보인다고?

저게?

8계위 마법이?

그러나 모든 함정을 여유롭게 피하고 다가온 아이작은 마족의 목을 움켜쥐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해골왕 앞에서 이깟 장난 따위가 통할 것 같은가?

아이작과 눈이 마주한 마족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그 붉은 눈의 안광이, 마치 전에 느꼈던 절대적 군주의 위압과 같아서였다.

하지만 공포에 떨 틈도 없이 아이작이 물었다.

“일단, 한 가지 묻지.”

[?]

“가짜 해골왕을 내세운 건 누구의 알량한 생각이냐?”

그 말에, 마족의 동공이 무섭게 흔들렸다. 애쉬의 반응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애쉬 때는 비슷한 질문에 ‘가짜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지.’ 하는 눈빛이었지만, 이놈은 다르다.

그래, 마치 가짜란 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 즉, 가짜 해골왕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게 눈빛만으로 보여서 아이작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

“아아, 됐어. 답 안 해도 돼. 충분한 답이 되었다.”

아이작이 물은 이유는, 정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가짜 해골왕이 있고, 어쩌면 이놈들도 그 가짜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가짜 해골왕은 진마들의 짓이다.

뭐,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으니 새삼 괘씸할 것도 없지만 글쎄. 하필 그 가짜 때문에 에슈아 놈들이 맨날 대가리를 깨네, 어쩌네, 하고 있잖아? 그건 좀 억울하지.

“되돌려놔, 훔쳐 간 애들 장기.”

마족은 억울한 듯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못 한다. 애초에 네놈이 내 팔을 이따위로 만들지 않았다면… 컥!]

아이작은 헛소리 말라는 듯 마족의 다리를 짓밟았다.

꽉!

[아악!!]

그리고 그에게 속삭였다.

“되돌리는 건 이 발만 까닥거리면 끝이잖아. 발로 원만 그리면 되는 걸 이미 알고 있거늘, 어디서 약아빠진 머리를 굴려?”

마족은 얼어붙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능력이라면 몰라도, 그 방법까지는 다른 진마들도 모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더욱 알 리가 없는데.

몸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너… 누구냐! 그걸 어떻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작이 비전을 쓰기라도 하면……!

곧 아이작의 목적이 뭔지 깨달은 마족이 황급히 말했다.

[빼앗은 건 지금 나한테는 없다. 동생한테 있어!]

그래, 이걸로 시간을 끌자. 그리고 델로스로 돌아가서 힘을 충전한 뒤에 은발들을 다시 처리하자.

[그래, 동생을 찾게 해주면…….]

바로 그때였다.

“이걸 찾나?”

[……?!]

숲속에서 여자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마족은 놀란 듯이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마족의 동생을 한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샤브나크는 피투성이가 된 마족을 툭 던졌다.

쾅!

포탄처럼 날아간 마족이 땅에 깊숙하게 처박혔다.

제 덩치보다 훨씬 큰 마족을 가볍게 던진 샤브나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도망가는 걸 잡았습니다.”

아이작은 잘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되돌리는 데 전혀 문제가 없겠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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