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희망의 불씨 (3)
“네 동생도 형을 보러 왔네. 이제 장기를 못 돌려놓는다는 말은 못 하겠지?”
아이작의 섬뜩한 미소에, 진마 광혈형제 중 형인 코우랄의 눈이 떨렸다.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왜 동생이 저기에 있어? 왜 피를 흘리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냐고!
물론 얼굴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떡이 되어 있었지만, 힘의 기운이란 게 있다. 자신의 동생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러니 샤브나크를 보는 코우랄의 머리는 텅 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 여자, 뭐야?’
인간 아냐?
[뭔데 인간이 내 동생을 저런 꼴로……!]
“코우랄. 귀가 멀었나?”
아이작의 목소리에 코우랄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지금 이 꼬맹이가, 내 이름을 부른 거야?
‘어떻게 인간이 내 이름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샤브나크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연이어 귀싸대기를 때렸다.
“저분께서 말씀하시지 않나. 그 더러운 주둥이를 직접 열어줘야 입을 열겠나?”
[……!]
마치 벌레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
동시에 샤브나크의 위세에 짓눌린 코우랄은 아차 싶었다. 애초에 인간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마를 저리 만들 수 있는 건, 같은 진마 외에는 불가능하다.’
그것도 이만한 전력 차이가 나려면, 반쪽이 아닌, 진짜 진마!
‘아냐아냐, 그럴 리 없잖아.’
아무리 봐도 인간 여자인데!
혼란 그리고 본인도 똑같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섞인 얼굴에, 아이작은 픽 웃었다.
“애 잡진 말고. 너도 동생처럼 되기 싫으면 빨리 장기를 돌려주면 좋겠는데.”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에 코우랄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같은 진마라면 몰라도, 어린 성직자 핏덩이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건 생리적으로 참을 수가 없었다.
[인간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진마한테!]
코우랄이 아이작에게 손을 대려고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쿵!
하늘로 살의가 치솟아 올랐다. 마치 잠가두었던 마력이 폭발하듯, 흉흉한 마력과 함께 코우랄은 정신을 잃을 뻔했다.
방금 전까지 뒤에 서 있는 게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샤브나크의 눈이 희번득이고 있었다.
“너는 저분의 말씀을 두 번이나 무시했다.”
[커헉……!]
‘무슨 힘이……!’
무섭다. 압도적인 힘이 코우랄의 머리통을 박살 낼 듯 찍어내렸다. 무자비하게 찍어내리는 힘에 얼굴 뼈가 가루가 될 것 같았다. 입조차 벙긋할 수 없었다. 아마 이것조차도 힘을 조절한 것이겠지.
옆에 있기만 해도 공포를 느낄 살기였지만, 정작 아이작은 익숙하다는 듯 태연할 뿐이다.
그리고 이 포악성을 막고 있는 게 이 꼬마라는게 더 무섭다.
“빈대떡이 되기 싫으면 네놈이 뭘 해야 할지 잘 알 텐데?”
코우랄은 할 수 없다는 듯 이를 갈면서 발을 움직였다. 그가 발을 까닥거리자, 마력과 함께 뭔가가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장기의 이동이었다.
그걸 느낀 아이작은 그제야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잘했다는 듯 코우랄의 머리를 툭툭 쳤다.
“옳지. 쓸 만하니 네게는 특별히 몇 가지 더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뭐라고?
“진마들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말해라.”
‘허, 뭘 묻나 했더니.’
[진마들은 지금 각자의 영토에서 서로 영지 분쟁 중…….]
그 말이 같잖다는 듯, 푸른 섬광이 코우랄의 다리에 떨어졌다.
쾅!
[아악!]
비전에 한쪽 다리가 타들어가자 코우랄이 비명을 질렀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똑바로 답해라. 영지 분쟁? 그런 놈들이 서품식에 가짜 해골왕을 들여보내? 니 새끼들이 제국의 결계를 파괴하려는 걸 모를 것 같나?
[!]
정곡을 찔린 코우랄은 당황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하지만 코우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아이작의 말은 맞다. 가짜 해골왕을 이용한 선전포고는 덤이었을 뿐, 실제론 제국의 결계 파괴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면 꽤 머리 좋은 성직자라면 누구든 유추할 수 있는 범주였다.
진짜 목적은 모를…….
“결계를 박살 내 신성드래곤을 불러낼 생각 아냐? 드래곤의 마력핵을 노리는 거지.”
[……!]
아니, 거기까지 알아낸다고?!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뭐, 좋아. 신성드래곤의 마력핵이라도 핥아야 해골왕의 발끝에라도 닿지.”
[……!]
“하지만 목적이 단순히 마력핵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거면 그냥 드래곤 둥지를 박살 냈겠지.”
아이작이 비전으로 남은 다리까지 없애려 하자, 코우랄은 비명을 질렀다.
이 개 같은 청의 비전!
욕을 읊조리는 그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청의 비전은 분명 교황이 없애버렸다고 했는데, 도대체 이게 왜!]
그러나 가차 없이 비전을 후려갈긴 아이작이 섬뜩하게 웃었다.
‘교황이 비전을 없앴다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은 다른 게 우선이었지만.
“대답은?”
[신성드래곤의 수장! 숨어있는 그 녀석을 불러내려는 거다! 신성제국의 결계는 그 녀석의 몫이고, 그 녀석이 해골왕의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이작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내 몸이 인계에 더 있었어?
[이건 인간들도 모르는 정보 아닙니까?]
그래, 그럴 거다. 이 사실을 알았으면 교황청과 에슈아가 제일 먼저 눈이 뒤집혀서 달려갔을걸?
[몸통이나 머리통이면 좋겠네요. 그거면 손가락 뼈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마력이 오를 텐데요.]
아이작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좋다. 나름 유용하니 또 대답할 기회를 주지.”
‘이 꼬마가……!’
점점 기어오른다는 듯 코우랄은 이를 뿌득 갈았지만, 아이작은 비전으로 코우랄의 나머지 다리도 없애버렸다.
“델로스에 있다는 성물은 어디에 있지?”
아이작이 말하는 건 교황이 가져오라고 했던 성물이었다.
뭐, 명령을 완수하려고 한다기보단, 교황이 탐내는 물건이니 가지고 가서 엿 먹여주려는 거지.
“답해라.”
[델로스 신전에… 커헉!]
“알량한 머리 굴려서 거짓말할 생각 마라.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젠장, 델로스 숲의 탑 지하에! 에슈아의 장남 부부와 같이 묻었다! 재수 없어서 쳐박았어!]
오, 부모의 무덤에 놓았다니.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놓았군. 안 그래도 부모의 유해에 대해서도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고를 덜었다.
“좋다. 그것까지 알았으면 이제 볼일은 끝났어.”
아이작이 일어나자, 코우랄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 꼬맹이는 뭐지?’
단순히 에슈아의 피라고 해도 지나치게 자신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해골왕의 독기에도 멀쩡하고, 인간이 진마를 상대로 주눅들지도 않다니?
설마 인간인 척하는 드래곤인가? 그래서 드래곤의 마력핵을 노린다는 걸 쉽게 유추해낸 건가?
…엘프나 정령이라기엔 놈들은 해골왕을 무서워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는 놈이…….
“할부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그전에 처리해야지.”
“예. 주군의 뜻대로.”
묘한 기시감에 코우랄은 아차 싶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십사육마 중에 저런 딱딱한 말투를 쓰는 놈이 있지 않았나?
그 생각에 미친 순간, 코우랄은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찍어내리는 위압, 기술, 말투.
아아, 생각났다.
[너! 설마, 거절의 샤브나크냐!]
“!”
고함을 지른 코우랄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하! 그래! 너구나, 빌어먹을! 그래, 샤브나크니까 나랑 동생이 이 꼴을 당하지…! 젠장! 제국에 잡혀 있다는 새끼가 어떻게……!]
하지만 그는 본인이 말하고도 얼어붙었다. 그는 이 여자가 샤브나크라는 것보다 더 소름끼치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깐.’
저게 샤브나크면, 저 꼬맹이는?
샤브나크가 저리 충성하며 따를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밖에 없지 않은가.
곧 아이작을 보는 코우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서, 설마… 너!]
아이작은 씨익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소름끼치는 미소과 함께, 코우랄의 시야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서걱!
진마의 목이 잘려나갔다.
* * *
아이작이 사라진 강가 주변의 숲.
청의 가주 일라이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코우랄을 쫓아왔지만, 중간에 아이작의 기운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눈치챈 것이다.
심지어 그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 마치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처럼.
원수인 코우랄도 중요하지만, 만약 아이작이 납치된 거라면?
일라이의 발걸음이 납치된 듯한 아이작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든 게 작전이었지만 말이다.
일라이를 유인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애쉬였다. 애쉬는 거의 울면서 청의 추기경을 유인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이작의 명령이었다.
-야. 할부지가 날 쫓아오지 못하게 유인해.
-…추, 추기경을 저 혼자 유인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싫어? 그럼 내 마력핵이 되든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뭐, 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 특별히 딸랑이도 줄게.
-??
나쁜 사람이 아니긴! 도대체 그 딸랑이가 뭔데 추기경이 저렇게 미친 눈으로 쫓아오는데?!
실제로 애쉬는 아이작의 분신체를 만들고, 거기에 딸랑이와 기저귀를 씌운 채 이동 중이었다.
뭐, 이상하게 효과가 좋다 못해 너무 좋아서 추기경이 자신을 죽일 듯이 따라오는 게 문제였다만.
‘허엉, 들키면 진짜 퇴마당한다.’
아무리 상급 마족이라도 추기경은 무서웠다. 저 손자 팔불출에게 걸리면 무슨 꼴을 당할지 감도 안 잡혔다. 하물며 자신과 해골왕의 관계를 캐물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애쉬가 붙잡히기 거의 바로 직전.
“할부지!”
“!”
숲속 반대쪽에서 아이작이 튀어나왔다.
“할부지, 여기서 뭐 하세요?”
아이작이 무사한 걸 확인한 추기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작. 왜 거기서 나오느냐.”
“할부지는 거기서 뭐 하는데요? 길 잃었어요?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저놈이?
“혹 딸랑이를 잃어버렸느냐?”
“숙소에 놓고 왔는데요. 왜요?”
그러자 추기경은 뭘 납득한 건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족 놈이 네 기운을 흉내내 날 유인하려고 했던 모양이구나.”
델로스는 진마의 땅이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지. 은퇴하게 될 기사들과 장남 부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도 델로스에 가야 한다.
이왕이면 아이작을 가주의 자리에 올려놓고 델로스로 가고 싶지만, 지금은 아이작을 가주로 올릴 건수가 없다.
“나는 델로스로 갈 테니 기사들과 함께 에슈아로 돌아가라. 헛짓하지 말고.”
그 말에 아이작이 빙긋 웃었다.
“할부지. 선물이요.”
선물?
아이작이 뭔가를 내밀었다.
그 물건에 가주의 눈이 드물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