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희망의 불씨 (4)
가주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물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이작이 들고 있는 건 진마의 머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양손에 하나씩, 두 개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다.
‘이건…….’
델로스 땅에 있던 그 진마들이었다.
진마의 기운을 눈치채지 못할 가주도 아니었다. 장남 부부를 앗아가고, 기사들의 장기를 가져간 그놈.
그래서 아이작을 바라보니, 손주가 마치 성탄절 선물이라도 받으라는 듯 내밀었다.
“제가 부모님 원수를 갚았어요. 이거 원하셨죠?”
“허…….”
“부모님이 묻힌 곳도 알아냈어요. 찾으러 가요.”
가주는 더더욱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 아이는, 도대체…….
아이작은 무덤에 가자고 하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사들은요?”
돌쇠 놈들한테 땅파기를 시켜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그건 너무 패륜 같아서 참았다.
그랬는데…….
“기사들도 데려가야겠구나.”
“예?”
“땅파기를 시켜야지.”
할부지. 가주가 그래도 되는 거야?
[그 손자에 그 할아버지네요.]
“하지만 지금 있는 기사들은 몸이 성치 않으니, 다른 기사들을 다시 데려와야겠구나.”
아무래도 가주는 부모가 묻힌 땅이 굉장히 넓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마 델로스 일대를 다 뒤져야 할 거라고.
그래서 아이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굳이 귀찮게 새로 불러올 것도 없는데요.”
뭐?
“지금 있는 애들을 데려가면 되죠, 뭐. 지금쯤이면 멀쩡해졌을 텐데.”
…이놈의 망아지가?
가주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이놈은 도대체 장기를 잃은 기사들에게 뭘 시키려고 하냐는 듯한 눈빛이다.
“그들은 이제 움직일 수 없다.”
때문에 가주는 기쁘면서도 조금 착잡한 기색이었다. 원수를 갚은 건 속은 시원하나, 그것과 별개로 기사들의 신체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성직자의 길을 택한 이상, 그들도 각오를 단단히 한 일이지만, 우두머리로서 마음이 안 좋은 건 사실. 하물며 비전을 쓰지 못하는 청에서 벌어진 일이라, 책임감이 더 컸다.
물질적으로 보상은 해줄 것이지만, 그런 걸로 보상이 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기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 대부분 은퇴를 생각해야겠지.”
그러자 아이작이 푸웁 웃었다.
“은퇴? 그런 거 안 해도 돼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은퇴예요. 할아버지 뒤질 때까지 일해야지.”
…뭐? 인마??
가주의 눈이 드물게 흔들렸다. 티를 내진 않지만, 빛의 신이 정녕 이딴 놈에게 응답을 해주셨냐는 눈빛이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을 따라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간 가주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님!”
“도련님!”
기쁜 얼굴로 둘을 맞이한 기사들이 오열하고 있었다. 장기를 잃은 기사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낯빛이 밝았다.
아니, 낯빛만 밝은 게 아니다.
“돌아왔어! 내 눈이! 보인다!”
“배도 멀쩡해! 오오!”
“이제 움직일 수 있습니다!”
“……??”
가주는 이게 뭐냐는 듯 아이처럼 날뛰는 기사들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봤죠? 지금쯤 멀쩡해졌을 거라고 했잖아요.”
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별거 안 했어요. 죽기 싫으면 장기를 되돌려놓으라고 했을 뿐.”
미친, 고작 그런 협박에 진마가 넘어갔다고?
이 새끼, 진마한테는 뭘 하고 온 거야?
반면,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이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도련님이 저희를 구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를 생각해서 거기까지 쫓아가시고…! 감격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붕붕 흔들기까지 하는 모습에, 아이작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니들 생각해서가 아니라 귀한 상급 노동력을 잃기 싫어서 한 건데.
“도련님께서 구해주신 목숨, 다시 한번 청의 검이 되어 도련님을 위해서만 쓰겠습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 의도 따윈 상관없나.
그보다 좀 떨어지렴. 더러운 성기사 놈들아.
그리고 슈리는 그 광경을 보면서 내심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저 기사들은 릴라이가 이끄는 부대로, 청의 작전대장들인 <범고래>들.
아이작은 범고래들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아, 007 특수 요원? 고급 인재네.’라고 중얼거렸지만, 아무튼 중요한 임무에 동원되는 이들인 만큼 청에서 중요한 전력들이었다.
릴라이도 일부만 데려오긴 했지만 그들은 에슈아의 중요한 구성 요소. 이번 일로 전력이 손실되면, 청으로서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살려낸 것이다.
‘게다가 청의 기사들한테 지지받으면 좋긴 하지.’
성기사들은 꽤 보수적이라, 아무리 그래도 윗항렬을 제치고 가주가 되는 건, 곱게 안 볼 테니까. 분명 승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작이 보란 듯이 가주를 보았다.
“봤져, 할부지?”
“허어.”
탐욕이 그득한 눈빛에, 가주는 기가 찬 듯 한숨 쉬며 못 본 척했다.
“몸이 나았으면 전부 따라와라. 델로스 안으로 들어간다.”
그 말에 청의 기사들이 흠칫 놀랐다.
“가주님! 그 안엔 진마가 있습니다!”
인간들로는 거의 처리할 수 없는 진마가 둘이나 있는 곳이 아닌가.
“본거지에 들어가시다니, 자살행위입니다!”
“예! 가주님과 성녀님, 도련님들은 에슈아로 돌아가시는 게……!”
그러자 닥치라는 듯, 돌아서는 가주가 아이작의 머리를 작게 쓰다듬었다.
“됐으니 따라와라. 이제 들어갈 수 있다.”
* * *
“여기는……!”
청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숲속 버려진 탑. 그 지하로 들어간 그들의 손에 삽 한 자루씩이 쥐어졌다.
아이작의 안내에 이곳까지 따라온 릴라이는 충격을 받은 듯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정말 여기에 큰 형님과 형수님이 있다는 거냐?”
그렇다니까, 새끼야.
아이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뭐, 그래 봐야 시신은 없지만.’
사실 아이작은 이미 이 탑을 살펴본 지 오래였다. 당연히 성물의 위치와 부모님을 묻었다는 장소도 확인했다.
물론 마법으로 땅 밑을 투시해 확인한 거라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작이 말한 위치를 파던 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찾았습니다! 청의 물건입니다!”
청의 직계만 입는 푸른 옷가지와, 영대, 머리장식, 작은 소지품들이 나왔다. 형님 부부를 배웅했었던 릴라이는 발견된 옷가지를 꽉 쥐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큰 형님과 형수님의 물건이 맞다.”
푸른 옷가지에 새겨진 청의 문양과 이름이 그 증거였다.
“다행입니다, 릴라이님. 그렇게 찾으셨는데 물건이라도 건질 수 있어서……!”
“하지만 왜 옷가지만 있고, 시신은 보이지 않을까요?”
이거면 분명 입고 있던 옷일 텐데, 왜 옷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가주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말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긴 해골왕의 마력에 진마수준의 것들이 둥지를 튼 땅. 그만큼 독기도 흘러넘치는 곳이다. 그런 땅에 묻힌 인간의 시신이 지금껏 멀쩡할 리가 없지.”
한마디로 녹아버렸다는 의미다. 뼈째로.
“그것도 아니면, 이 땅에 있던 마족이 먹어 치웠든가.”
성물에 담긴 신의 힘은 마족에게 독이 되지만, 인간에겐 다르다.
고위 성직자쯤 되면 마족들이 환장하는 기호식품이니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옷가지가 얌전하고 뼈가 남아있지 않은 걸 봐선, 독기에 녹아 사라진 쪽이 맞겠군요…….”
“그래.”
그러나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뭐, 할부지의 말이 맞긴 하다만.’
마기가 가득한 곳에서 인간의 시신은 금방 부패하고, 뼈까지 녹아내린다. 뭐, 그건 맞지만. 글쎄.
‘여기 있던 건 최하급의 약한 진마들이었어.’
물론 아이작의 기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10년 사이에 뼈까지 녹여버릴 정도의 마기는 아니란 것이다.
하물며 대상은 추기경이 될 상급 사제에다가 성녀였다. 그 정도 되는 놈들을 뼈까지 녹이려면, 족히 1,000년은 농축되야 했다.
아니면 해골왕이 나서서 작정하고 녹이든가.
할아버지야 해골왕의 마기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이작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성녀의 몸은 그 정도로 절대 안 녹는다.’
즉, 이건 알맹이만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신경이 쓰이니, 조사는 해봐야겠군.’
그래서 아이작은 일부러 유품 중 하나인, 장신구를 슬쩍했다. 마침 유품을 발견한 가주와 릴라이는 몹시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거라도 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예, 다른 가족분들과 청의 사람들도 기뻐할 겁니다.”
기사들이 엉엉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자, 가주가 말했다.
“너희도 그만 울고. 멀쩡해졌으면 저것들을 잘 회수해서 보관해라.”
“저거라 하시면…….”
기사들은 가주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그곳에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범고래가 있었다.
가주의 신수가 뭔가를 가지고 신나게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뭘 가지고 노는… 아악!!”
기사들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머리잖습니까!”
범고래들이 뭘 던지고 받으며 놀고 있나 했더니, 마족들의 머리통이었다. 기사들이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왜 마족의 머리가… 잠깐 저놈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그들이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건 분명 자신들의 장기를 빼앗아간…….
“잠깐, 설마 진마를 잡으신 겁니까?!”
“왜 너희를 끌고 델로스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하는 거냐.”
“……!”
“설마 가주님께서…….”
“아이작이 잡았다.”
“?!!”
청의 기사들은 더욱 기겁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기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며 바라보자, 아이작은 크흠, 기침을 했다.
뭐, 새삼 내가 해골왕이라 다 찍어 눌렀다고 말할 순 없으니, 뭐.
“비전의 힘이 세긴 하더라.”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그걸로 놈들의 사지를 쳐 날렸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기사들의 눈빛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보이자, 아이작은 눈을 또르륵 굴렸다.
역시… 이제 막 견습을 졸업한 사제가 진마를 잡았다는 건 너무 말이 안 되나?
할 수 없지. 여기서는 슬쩍 타당성을…….
“…크흠, 아무리 진마라고 해도, 반쪽에다가 제일 서열이 낮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잡을 수 있었을찌도오?”
“아니아니, 그게 아닙니다!”
기사들은 황급히 아이작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리 서열이 낮아도 진마는 진마! 가주님도 감당하지 못하는 놈들이었습니다!”
“그걸 잡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란 것입니다!”
“!”
청의 기사들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이미 눈으로 보지 않았나. 푸른빛이 진마의 팔을 날리는 광경을! 청이 마를 무찌른 순간을!
청의 기사들은 울음을 겨우 참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딘지 설움과 희망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극한의 고통에 헛것을 봤나 싶었지만, 꿈이 아니었어!”
“이거면 신년회도 문제없다!”
“…신년회?”
아이작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기사들은 이를 악물 뿐이었다.
“매년! 비전을 못 써서 굴욕을 당하는 신년회가 아닙니까!’
“아.”
견습들의 졸업과 동시에 신앙을 택하게 되는 신년회.
신년회는 언제부터인가 비전을 선보이는 자리가 되었고, 비전을 못 쓰는 청은 비웃음을 사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청에 들어오는 성직자의 수도 없었고 말이다. 하다못해 5대 신앙도 아닌 놈들까지 으스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아이작 도련님이 비전을 쓰셨다면, 올해는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 지도요!”
“콧대를 눌러줄 수 있을 겁니다!”
“예! 당장 이 사실을 널리 알려서……!”
“잠깐.”
흥분한 기사들을 멈춘 건 가주였다.
“가주님?”
“비전을 찾았다는 말은 숨겨라. 아직 전달하지도 마라.”
“예?! 어째서……!”
기사들은 절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주의 눈이 번득였다.
“청이 비전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하이에나들에게 미리 전달해줄 필요는 없지.”
그 말에 아이작은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었다.
‘역시 할아버지. 드디어 칼 갈았구나.’
그동안은 비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고개를 숙여야했지만, 그걸 되찾았다? 더 이상 눈치 볼 일이 없어진 것이다.
‘뭐, 마침 잘됐군.’
신년회면 교황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닌가.
‘교황이 비전을 없앴다는 말도 신경 쓰이고.’
분명 코우랄이 청의 비전을 보면서 이렇게 지껄이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청의 비전은 분명 교황이 없앴다고 했는데, 이게 왜!
만일 사실이라면, 이건 대형 폭탄이 될 만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말대로라면 청을 곤란하게 만든 것도 교황이며, 지들이 없앤 주제에 비전을 찾게 해주겠다며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었단 뜻이 되니까.
[가주한테는 말 안 해둬도 됩니까?]
‘원래 이런 건 하나씩 하나씩 풀어주는 거야.’
그랬기에 아이작은 가주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 할아버지. 이제는 진짜진짜 집에 돌아가도 되죠? 네?”
“!”
그 말에 청의 가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곧 드물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돌아가자꾸나.”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 * *
에슈아 공작령.
에슈아 저택은 뜻밖의 소식에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특히 노엘은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누가 돌아와? 아버지가?”
진마의 땅에 죽으러 갔다며 좋아하던 그들이었다. 하물며 그런 아버지를 쫓아 아이작에 릴라이까지 따라갔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던 참이었건만.
관짝을 준비해야겠다고 기뻐하던 노엘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다른 놈들도 전부 살아 돌아왔다고?”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구나.”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