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2)
한편, 아이작이 교황의 사자들과 만난 그 무렵.
“가주님. 도련님들이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냐.”
기사의 보고에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도원에 있는 멜리사를 보러온 참이었다.
‘물의 수련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청의 성직자들이 심신을 다스리는 곳이었다. 마치 절대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수면을 유지하듯, 마의 앞에서도 유혹받지 않는 굳건함과 인내를 수련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멜리사는 에슈아에 있을 땐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았다. 해골왕을 잡지 못한 것이 마치 본인이 흔들린 탓이라 자책하는 것처럼.
혹독하게 본인을 채찍질하고, 마음을 죽이고, 어떻게든 해골왕에 대한 증오만 남기려고 애썼다.
그래서 일라이는 늘 멜리사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원래라면 가문의 사람도 아니거늘.’
멜리사는 신성드래곤과의 혼혈로, 엘프와 같은 장수 종족이었다. 윗기수의 성녀가 어린 멜리사를 찾아내고, 결국 에슈아에 입양되어 해골왕을 상대한 마지막 성녀가 되었다.
물론 해골왕이 사라진 뒤 그를 반드시 찾아내겠다며 속세를 떠났지만, 선대 가주에 의해 다시 가문에 돌아오게 됐다.
그리고 선대에게 에슈아의 화신이 되어 달라 강요당했지.
‘뭐, 결혼을 해달라고 한 건 나였지만.’
그렇게 안 하면 가문 사람들에게서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행복했고, 네 명의 자식들을 낳았지만 멜리사는 에슈아가 저주받게 된 것에 대한 큰 책임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비전이 사라진 것조차도.
전부 자신 때문에 가문과 자식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해골왕을 죽이기만 했어도, 80년 전 해골왕이 저택에 쳐들어와 저주를 내리는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아이작이 청의 비전을 부활시켰어.”
일라이의 말에 멜리사가 움찔했다.
“정말 비전이었나?”
“그래, 비전이었어.”
멜리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말문을 잇지 못했다. 드디어 신들께서 용서를 해주시는 건가? 다시 해골왕을 잡을 기회를 주시는 건가?
“아이작은 희망의 불씨구나. 에슈아를 구렁텅이에서 구해줄 수 있는.”
문제는 그 희망의 불씨가 바로 빌어먹을 해골왕이란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비전이 부활했다고 알리고, 청도 칼을 꺼낼 생각이야.”
그런데 그 말에 기사가 어째서인지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게, 신수를 통해 실시간으로 저택의 일을 듣던 기사였다.
그러니까… 그 말이 무슨 이야기냐면, 아이작의 깽판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단 이야기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는 얼굴을 짚으며 죽으려고 했다.
“저… 가주님. 비전이 부활했다고 알리시는 건, 이미 늦은 판단 같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똑 바로 말해라.”
가주의 목소리가 드물게 살벌해졌지만, 겁에 질린 기사는 또르륵 눈알만 굴렸다.
“그것이… 아이작 도련님이 교황가의 사신을 만났는데, 거기서 먼저 비전 부활을 알리신 것 같은…….”
가주의 눈이 볼만해졌다.
이 고얀 자식이, 제일 맛난 부분을 쏙 빼먹어??
* * *
교황의 사신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조건이라니? 상황이 역전되었다니?!
‘그보다 지금 비전을 부활시켰다고 말하는 거야?’
물론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주도권을 잡으려고 일부러 비전을 되찾은 척, 거짓말을 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심리전을 이용해 교황의 성물을 거래 대상으로 삼으려는 거지.
‘그래, 청이 비전을 부활시켰을 리 없지 않은가!’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원래 제일 안 좋은 패를 가진 놈들이 제일 머리를 약삭빠르게 굴리는 법이다.
그걸 아는 교황의 사신들은 같잖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것 같은가. 비전을 되찾아? 허, 성물의 가치가 생각보다 더 높으니 오히려 한몫 챙기려는 것 같은데…….”
“어어? 싫어? 그럼 말든가.”
“!”
아이작은 기껏 생각해줘도 뭐라고 한다며, 슈리에게 성물을 도로 넣으라고 했다.
“아, 받기 싫음 마쇼. 등신들이 기회를 줘도 지들이 복을 걷어차네.”
“……?!”
“거래하기 싫으시다니, 이건 저희가 잘 써먹겠습니다.”
아, 아니 잠깐?
뭔데 저렇게 당당해?
쟤들, 진짜로 비전을 찾은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상황은 곤란해진다. 저 성물을 에슈아가 주지 않겠다고 하면 교황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사자들은 당황한 듯 아이작을 붙잡았다.
“아니, 아이작 공자! 왜 그리 성미가 급하시오!”
“정말 청이 비전을 되찾으신 것이오?”
말투까지 제법 공손해졌다.
“비전을 되찾았다면, 보여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보여줘어?”
“그렇습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맨입으로?”
“…예?”
“어디서 남의 집의 비전을 공짜로 보려고 해? 보고 싶으면 대가를 내놓든가. 어?”
이 돈에 환장한 새끼가?
바로 그때였다.
“아이작!”
“!”
소식을 듣고 온 노엘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그는 소매의 품을 가다듬으면서 아이작을 괘씸하다는 듯 보았다.
“교황 성하의 사신들께 무슨 말버릇이냐.”
아이작은 허,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가 꼿꼿하고, 몸을 가다듬는 모습이 이미 가주가 되었다는 듯한 꼬락서니가 아닌가. 마치 금의 추기경을 보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아이작은 건방진 얼굴로 숙부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잠깐 안 뵌 사이에 목에 철심이라도 박아넣으셨나 봐요. 원래 그리 뻣뻣하셨나?”
“아이자악!”
슈리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뜬 노엘은 맞수를 두었다.
“그러는 너는, 잠깐 안 본 사이에 더 싸가지가 없어졌구나. 살아돌아온 걸 보니 진마의 땅엔 가지도 않고 되돌아왔나 보지?”
아이작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갔다 온 건데요?”
그 말에 움찔한 노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는데 거짓말까지 늘었어?”
그러나 노엘은 되레 안쓰럽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왜 아버지가 하실 말씀이 있다고 했는지 알겠어.”
“할부지가?”
“그래, 아버지께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셨다.”
“생각? 무슨 생각?”
그러자 노엘은 대답 대신 아이작을 천한 것 보듯 내려다보며 풉, 웃을 뿐이었다.
“뭐, 반쪽이 천한 피는 어쩔 수 없다는 거지.”
그는 잘됐다는 듯 아이작과 슈리, 레아를 보았다.
“너희 세 명, 모두 따라와라. 감히 명령도 무시하고 저택을 이탈해 아버지를 쫓아가고, 끝내는 사신들께 불경한 짓을 하며 에슈아의 이름까지 더럽혔다.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니 새끼가 뭔데, 내 눈 앞에서 내 딸까지 데려간다 만다 지랄이야.”
차남 벤야민이 노엘을 쏘아보았다.
“레아, 동생들을 데리고 가 있어라. 그 녀석들은 내가 훈육할 테니.”
“꼴에 장남 대리라고.”
노엘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실컷 혼낼 수 있을 때 혼내십시오. 그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
노엘이 웃으면서 교황의 사신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노엘님. 정말 청이 비전을 되찾았습니까?”
“애의 말을 믿으십니까.”
벤야민은 그런 그들을 노려보며 아이작 일행을 이끌고 나왔다.
몹시 화가 난 듯한 차남의 뒷모습에 슈리가 눈치를 살폈지만-
“후우우. 잘했다. 잘했어!”
“?”
“그래, 너희들. 진마의 땅에 안 들어가다니, 용케도 호기심을 억눌렀구나. 정말 잘했어!”
아이작의 어깨를 부여잡은 벤야민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그는 조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긴 듯했다.
“진마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도 끌고 와준 거지?”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아니, 쩌기.”
“그래, 고맙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살아있으니 된 거다. 다 된 거야!”
“…쩌어기.”
이 새끼들, 설마 릴라이나 청의 기사들한테 아무 말도 못 들은 건가?
그때, 레아가 물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이 바뀌셨다는 말은 뭐예요?”
“아…….”
벤야민은 절망하듯, 안경을 벗고는 미간을 짚었다.
“돌아오신 아버지가 대뜸 그런 말을 하셨다. 뭐, 후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신 거겠지.”
벤야민은 몹시 분한 얼굴이었다.
후계 자리는 손주들에게도 주겠다고 하셨지만, 사실 그게 아이작을 기다리겠다는 의미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 아이작이 따라간 일로 실망을 많이 하신 모양이다.
“실은 가족들을 소집하셨다. 대충 5년을 기다리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폐기하실 모양인 것 같다.”
“예?!”
“노엘에게 자리를 위임하시겠다고 하시는 거겠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정도 불이익은 감수해야지.”
그러자 아이작이 헛웃음을 흘리며 벤야민의 어깨를 토닥였다.
“차남, 아까부터 뭔 헛소리야?”
“…뭐?”
아이작의 말투에 당황할 때가 아니었다. 슈리는 이제 말투 지적하기도 힘든 듯 한숨을 쉬었다.
“백부님. 저희 진마 땅에 들어갔다 왔어요.”
“엥?”
아이작은 벤야민을 토닥였다.
“진마도 잡았고.”
“에?”
“비전도 부활시켰고.”
“에에에엥???”
“부모님의 유품도 찾았다고, 때끼야.”
뭐가 어째?!
아이작은 푸웁 웃었다.
“그러니 최소한 우릴 혼내려고 부르는 건 아닐걸?”
“???”
벤야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 * *
“설마 너희가 거기까지 따라갔을 줄은 몰랐다.”
저녁 무렵, 가주의 명에 에슈아 사람들 모두가 소집되었다. 장로들은 사고를 친 아이작을 나무라듯 노려보고 있었다.
“교황청의 사자들이 얼마나 당황했는 줄 아느냐?”
“자칫 비전을 못 돌려받는 일이 생기면 어쩔 것이야.”
“아직 덜 배운 아이한테까지 후계자 자리를 주겠다고 하시니, 가주님의 은혜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게죠.”
“하지만 이번 일로 생각이 바뀌셨으니, 다행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후계의 자리를 5년이나 미룰 것도 없지.”
아버지의 말에 노엘은 웃었다.
암암, 그렇고 말고.
가주는 큰일 날 뻔했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후계자리에 대해 너무 안일했다.”
암. 그렇지.
“이미 적합한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다.”
노엘은 큭 웃었다. 이 노친네가 죽을 때가 되니, 정신이 돌아오는구나.
‘저 괴물도 진마의 땅에 갔다 오더니, 무서움을 깨달았나?’
뭐, 그 와중에 성물을 가져온 건 대단하지만 말이다. 노엘은 속내를 능숙하게 숨기며 공손하게 말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비전도, 교황 성하의 인정도, 제가 전부 해결하겠습니다. 이번 신년에서 제가 교황 쪽과 승부를 보겠습니다. 외람되오나 제가 힘을 써서 교황가에 기록되어 있던 청의 비전서의 일부를 찾아왔습니다.”
“오오, 기록이 있었는가!”
“예.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일부긴 하지만 역사서에 적혀있더군요. 저라면 교황가와 협력해 완벽하게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에슈아의 부흥쯤이야…….”
“되도 않는 헛수고를 하는구나.”
뭐?
가주가 손짓하자, 기사가 잘 보관한 상자 두 개를 가져왔다. 그 상자의 내용물을 꺼내 보이자, 모두가 놀랐다.
“마족의 머리?”
“델로스에서 잡은 진마다.”
“예?!”
“진마요?!”
다들 당황한 얼굴이었다.
뭐야. 그럼 중요하다고 했던 말이, 설마 진마를 잡았다는 말이었나?
노엘의 얼굴이 조금 딱딱해졌다.
“추, 축하드립니다…. 청도 이걸로 교황에게 인정을…….”
“아까부터 뭔 소리냐. 머리가 안 돌아가? 진마를 어떻게 잡았겠느냐.”
…뭐?
“비전은 이미 부활했다.”
“…예??”
장로들은 믿기지 않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들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청을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방향이 다를 뿐.
“가주께서 부활시키신 겁니까! 아, 이런 기쁜 일이……!”
“그걸로 진마까지 잡으셨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군요! 역시 일라이 님은…….”
가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안 잡았다.”
“…예?”
“비전을 부활시킨 것도, 진마를 잡은 것도 아이작이다.”
뭐가 어째?!
“청의 신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지.”
…아니, 잠깐.
그러면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의 의미는 설마……!
“이미 자격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뭐 하러 5년이나 기다리지?”
“자, 잠깐…….”
노엘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노엘의 불길한 예상이 들어맞듯, 가주가 선언했다.
“아이작을 소가주의 자리에 올리겠다.”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에선가 빛의 여신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