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3)
가주의 말에 회의실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 가주께서 뭐라고 하신 건가.
노엘은 물론이고, 장로들과 원로들, 다른 직계들도 눈의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지금… 소가주로 삼겠다고 하신 겁니까?”
“아이작을?”
회의실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거의 고함을 외치듯 목소리를 높인 건 노엘이었다.
“아버지! 저놈은 윗항렬을 무시하고, 명령도 듣지 않는 놈입니다! 에슈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놈을 소가주로 삼으시겠다니요! 이럴 순 없습니다!”
아니, 하다못해 아이작은 이제 견습 졸업생이다.
“이미 9계위인 제가 있는데, 어찌하여 자격도 안 되는 저런 젖비린내를 키우시겠다고!”
“닥쳐라.”
“……!”
“이미 정한 결정에 변함은 없다. 또한 윗항렬은 이제 그 누구도 가주 자리를 물려받을 일이 없을 테니 그리들 알아라.”
“!!”
완전한 사형선고였다. 사실상 노엘에게만큼은 절대로 가주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선전포고.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에 노엘은 일어선 채 얼어붙었고, 원로들과 장로들은 난리가 났다.
그들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휑하고 나가버리는 가주를 뒤쫓았다.
“가주님! 기다려 주십시오!”
“가주님! 가주님!”
그리고 이 소식은 금방 에슈아에 퍼졌다.
청의 사람들은 물론, 에슈아에 머물던 다른 신앙 사제들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후계는 5년 뒤에 뽑겠다고 하신 게 아니었나?”
“아이작 도련님이 진마를 잡아왔대.”
“뭐라고?!”
“그리고 청의 범고래들을 구하셨다고 하더라.”
“허……!”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빠른 결단을 내리실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럼 노엘 님은 완전히 나가리 된 거야?”
“노엘 님 망했네…….”
“나는 반대일세. 아무리 그래도 윗항렬들이 있는데, 가장 막내가 소가주? 이건 규율 파괴지.”
“아이작이 어때서 그러나. 최고신에 쌍신 계약자잖아.”
“애초에 진마를 잡고 비전을 부활시켰다는데…….”
“맞습니다. 선대들께서도 그렇게 염원하셨던 비전이 아닙니까.”
여러 의미로 난리도 아니었다. 수뇌부부터 주교, 제일 아래인 3품 성직자들까지.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에슈아를 떠나 다른 지역의 귀에도 들어갔을 때쯤.
슈리는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이작…….”
“푸핳.”
“아이작……?”
“푸핳, 푸헿.”
“…하. 너 표정 관리 좀 해라.”
“푸헤히후하헤헿!”
아이작의 광대가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들었냐, 김쓔리? 내가 소가주래, 소가주! 푸헤헿, 소공작이다!”
슈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대단히 축흐한다.”
“야, 어디서 감히 소가주한테 이를 악물어. 그리고 반말까고 싶으면 뇌물부터 가져와!”
슈리는 말을 말자며 심호흡을 했다.
물론 성자와 교황을 노리는 슈리로서는 아이작이 소가주가 된 게 뼈아프긴 했다. 아이작이 자신보다 더 앞서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노엘 백부님보단 천만 배 낫지.’
아마 그 사람이 가주가 된다면, 그 순간 에슈아의 분위기는 작살이 났을 것이었다.
‘성녀 핏줄은 쫓겨나고, 대규모의 숙청이 있었을 게 분명하…….’
“이제 이 저택을 팔아버리고, 죄다 타락시켜야지! 망해라, 성녀 가문! 푸하헤헿!”
…아니, 차라리 노엘 쪽이 나을지도?
최소한 노엘은 집안을 망하게 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 전에 저 흉측한 표정 좀 제발!
보다 못한 슈리가 레아에게 한 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레아 누님도 뭐라고 좀 해보십시오. 소가주란 놈이 침까지 흘리고, 저게 뭡니까.”
그러나 레아는 전혀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귀엽기만 한데.”
귀여워?? 저게? 진심인가? 누님의 미적 감각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바로 그때였다.
똑똑.
“!”
누군가가 찾아오자, 슈리가 보란 듯 문쪽으로 다가갔다.
“봐라, 저택을 판다니까 그사이 교육담당자가 널 훈육하러 온… 헉!”
아이작을 찾아온 손님에 슈리는 얼어붙었다. 찾아온 건 가주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좀 화난 듯한 표정에 슈리는 기겁했다.
“너희는 잠깐 나가 있어라. 아이작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
설마 그사이 아이작의 헛소리 때문에 마음이 바뀌신 건 아니겠지?
곧 둘만 남게 되자, 일라이가 말했다.
“듣자 하니 저택을 팔아버리겠다고 했다더구나.”
아이작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주님. 저는 그 누구보다 에슈아와 청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침이나 닦고 말해라.”
“커흠.”
일라이가 좀 화난 이유는 사실 반발하는 가신들 때문이었다. 뭐, 제일 어린 아이작을 올릴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그래서 일라이는 중요한 거래를 하러 온 것이었다.
“잊지 않았겠지? 소가주더라도 9계위에 오르지 못하면 결국 가주가 될 수 없단 것을.”
그래 안 잊었지.
가주의 조건은 추기경. 즉 9계위 성직자가 되어 추기경의 비전과 모든 청의 성법을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의 가주는 가주임과 동시에 성법의 전승자이기도 했기에.
“그래서 못 오르면 노엘을 주시겠다고요?”
“…….”
“할부지. 왜 그래요. 노엘 놈한테는 절대 주기 싫으시잖아요.”
일라이의 눈썹이 무섭게 올라갔다.
“리스크를 안고도 내가 널 택한 이유를 모르겠느냐. 반드시 네가 9계위에 올라야 한단 의미다.”
일라이로서는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사실 이미 9계위인 노엘을 버리고, 아이작을 택한 건 일종의 도박에 가깝다.
“걱정 마세요. 추기경의 비전까지 확실히 익혀둘 테니.”
일라이는 우려가 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릴라이도 아직 추기경의 비전은 못 익혔다.”
“그건 검질이나 하고 있어서, 효율을 낭비해서 그런 거잖아요.”
일라이의 표정에 아이작은 픽 웃었다.
“좋아요. 정 그러면 제가 할아버지 주변의 개소리들을 없애드리죠.”
“가신들을 딸랑이로 두들겨 패는 건 안 된다.”
…아니, 아무리 나라도 그런 짓은 안 해.
도대체 자신을 뭘로 보고?
“제가 실패하면 추기경, 그러니까 제 대타는 슈리로 해주세요.”
일라이의 표정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릴라이가 아니라?”
굉장히 뜻밖의 말을 한다는 눈빛이다.
그러자, 아이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건 아이답지 않은, 해골왕의 눈빛이다.
“할아버지. 절 이용해 에슈아에 있는 교황 세력을 쫓아내고 싶으신 거잖아요. 저도 할아버지 생각엔 적극 동의하지만, 당장 불만이 있는 세력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 잘못하면 노엘과 손을 잡고 사고를 칠수도 있지.
‘이를테면 가주나 나를 당장 암살하고, 자리를 꿰차겠다는 막무가내 계획을 꾸밀 수도 있어.’
“하지만 제 다음 순위가 슈리라고 하면요? 적어도 교황 세력이 합심할 일은 없어요. 오히려 슈리를 밀겠다면서 노엘 숙부에게 있던 세력이 떨어져 나가는 걸 기대할 수 있을걸요? 지들끼리 어디 신나게 싸워보라죠.”
“!”
일라이는 내심 놀란 듯 아이작을 보았다.
이 아이는 거기까지 내다본 것인가?
확실히 훌륭하긴 하다. 슈리를 이용하는 셈이긴 하지만, 노엘의 힘을 완전히 죽여놓을 수 있다.
“뭐, 그렇게 안 해도 어차피 다 쓸어낼 거지만.”
정치질에 능숙한 전직 마왕은 간사하게 웃었다.
‘미안하다, 슈리야. 조금만 널 이용하마.’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엔 아이작의 큰 그림이 있었다.
‘미쳤다고 다른 놈을 내 다음 가주로 두냐?’
아이작은 추기경의 자리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난 교황이 되어서 이 나라를 먹어야 하거든!’
그리고 자신이 교황이 되고 나면?
‘슈리가 가주여야지 내가 에슈아를 쥐락펴락할 수 있거든! 빨대부터 꼽아야지.’
아이작의 그 밑도 끝도 없는 탐욕을 읽은 걸까. 아이작을 좀 못 미덥게 보던 일라이가 미간을 좁혔다.
“좋다. 그럼 네 말대로 네 대타는 슈리로 두겠다. 네가 못 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니, 명심해라.”
“걱정 마세요.”
“내 널 기다릴 것이나 이 할아비도 나이가 있으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라. 성인식 때인 18살이 제일 깔끔하긴 하지만, 서른 이전에만 되거라.”
가주는 대략 스물다섯쯤을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아이작은 픽 웃었다.
‘서른 이전이라니,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
아마 최연소 추기경이 되고도 남을 텐데.
하지만 아이작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깜사합니다.”
“소가주의 권한은 즉시 주겠다. 저택은 팔면 안 된다.”
“네. 청을 사랑하는 저만 믿으시죠.”
“침 또 흐른다.”
“…….”
곧 일라이가 밖으로 나오자, 황급히 고개를 숙인 슈리와 레아가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랑 무슨 이야기 했어?”
“넌 나한테 평생 고마워해야 해, 낌슈리.”
“뭐?”
“내 대타는 너거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슈리가 비명을 질렀다.
“뭐라고?!”
“캬, 좋지 않냐? 가주 대리?”
뭐지?
뭔데 왜 하나도 안 기쁘지?
왜 불길하지?
“자, 이제 우리는 한 몸이야. 그러니 넌 지금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어야 해. 나랑 같이 훈련할 거니까, 이제부턴 내가 마실 물이랑 간식을 가져오렴.”
…뭐지? 왜 사기당하는 기분이지??
왜 키나가 자신을 죽일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야. 너 잊은 건 아니지? 지금 청에서 비전 쓸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이야. 그걸 청의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라고 하셨잖아. 소가주로서의 조건이라고.”
“뭐, 신년회에서 교황 물 좀 먹이고 나면 바로 알려줄게.”
신년회란 말에 슈리는 눈을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게, 올해는 청도 비전을 선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작이 나설테니 걱정과 기대가 안 될 리가 없었다.
“아이작, 저기…….”
“걱정 마. 슈리야. 나도 교황한테 이를 갈고 있으니까. 청을 위해 성물로 교섭을 해야지.”
왜… 교섭이라는 말이 삥 뜯기로 들리지?
“그러니까 빛의 신한테 이걸 전해줘. 내 첫 공물이야.”
아이작이 내민 푸른 종이에 슈리는 내심 감동했다. 이 종이는 신께 전하는 감사의 기도문이었다.
“이 새끼가 소가주가 되더니,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그래, 뭐라고 감사를…….”
슈리는 쪽지를 펼쳤다.
-니네 집안 쩔더라?
“…….”
슈리는 해탈하듯 하늘을 보았다.
신이시여…. 정녕 이자를 에슈아의 구원자로 선택하신 것이 맞습니까?
* * *
“빌어먹을! 장난하냐고!”
분노한 노엘이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 날아온 물건에 얻어맞은 고엘은 어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딱히 별말 하지 않았다. 넷째 형이 저리 미쳐 날뛰는 것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일로 노엘은 완전히 가주 자리에서 이탈되었다.
노엘을 따르는 장로들? 그들은 아이작이 비전을 부활시켰다는 말과, 장남의 복수를 했단 말에 우르르 아이작에게로 넘어갔다.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박쥐 같은 놈들!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고정하십시오. 어머니와 교황께서도 두고보진 않으시겠죠. 그보다 지금은 신년회에서 에슈아 비전을 선보이는 게 먼저 아닙니까? 교황께서도 오시는 자리인데.”
그 말에 동생을 보는 노엘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야. 고엘 에슈아. 넌 지금 아들 슈리가 후보에 올랐다고 안도하는 거냐? 발을 빼겠다는 거야?”
“…….”
“뭐, 됐다. 어차피 아이작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테니.”
“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려고 했지만, 그는 본인의 딸을 불렀다.
“카야!”
그 외침에 누군가가 그림자 하인처럼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레아 또래의 절세미녀였다.
“예!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카야. 네가 지금 몇 계위지?”
그 말에 몸을 흠칫 떤 카야가 눈을 질끈 감았다.
“7… 7계위입니다.”
그 답에, 노엘은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하긴. 레아도 8계위거늘. 서둘러 9계위가 되어 성녀가 돼라. 네가 성녀가 돼야 아이작을 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
그 말에 고엘은 신기해했다. 확실히 카야는 재능은 넘치긴 하지만, 저 아이가 성녀가 되는 것과, 아이작을 끌어내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그만큼 딸을 믿는 건가?’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다. 노엘의 딸인 카야는 갈색 머리 교황 핏줄 중에서 유일하게 은발이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의 피를 짙게 받았으니 기대가 큰 걸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아무튼 고엘. 히레이하고 다른 추기경들한테 전달해. 이번 신년회의 일로 할 말이 있다고.”
그러나 고엘은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그 사람들, 지금 그런 말을 들을 정신이 아닐걸요.”
“뭐야?”
고엘의 말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 무렵. 교황청에 모여 있는 추기경들은 한 공문 때문에 일제히 충격을 받는 중이었다.
바로 청의 가주가 보낸 공문 때문이었다.
-아이작이 소가주로 신년회에 참석하니, 그리 알아둬라. 새끼들아.
“…그러니까. 누가 소가주라고?”
이번에 청이 후계를 뽑을 거라 확신은 했지만, 당연히 노엘이나 릴라이일 거라 생각했는데.
특히 금의 추기경과 적의 추기경의 표정이 볼만했다.
소가주.
그러니까 미래의 추기경 동료란 의미다. 청의 가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사실상 자신의 동료지.
그래, 미래의 동료…….
“…누가?”
…이 애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