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4)
“할부지가 나한테 사기를 쳤어.”
아이작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촌 형 조세프는 옆에서 숨을 죽이고 끅끅 웃어댔고, 슈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왜 사기야.”
하지만 문서를 읽던 아이작의 불만이 폭발했다.
“언제는 저택을 팔지 말라고 경고하더니! 저택이라는 게 개집이었어?!”
“크하하핳! 개집, 개집! 위대한 수호견의 집이 개집이래!”
조세프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데굴데굴 구르자, 아이작은 부들부들 떨었다.
사실 아이작이 후계로 거론되자마자 시종들이 붙여졌다. 그리고 가주의 시종인 시종장이 와서 소가주의 권한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래, 좋았지! 기분 째졌지!
다 좋았는데!
-쩌어기. 이게 다 뭐야?
-이것이 도련님이 하실 일입니다. 도련님은 이제부터 가문의 작은 주인님으로서 사교 파티에 참석해 가문을 빛내주시고, 군사 회의에 참석해 기사들의 배치와 토벌 건을 확인해주시고, 에슈아의 사업처를 돌아다니면서 경영 문제와 물자 및 유통 문제를 확인해주시고, 에슈아의 가신 가문에 방문해 그들의 충성심과 현 상황을 파악해주시고…….
-쩌어기이이.
-아직 어리시지만, 가주님께서 이 모든 권한을 허락하라 하셨습니다.
찌발! 장난해? 이거 권한은 맞는데, 실제로는 업무가 섞였잖아! 심지어 할배,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일을 죄다 나한테 떠넘기고 있네!
그래서 시종장을 향해 눈총을 쏘아댔지.
-쩌어기, 왜 업무만 가득해? 권리는? 책임에는 권리가 따르잖아?? 보물은? 저택은!
-아, 그거라면 에슈아 수호견의 저택과 청의 기사들의 소대, 가주 전용 서고 출입권 등이 주어집니다.
-그거 말고! 청의 광산은? 빛의 여신과 청의 신들이 주신 광산도 있을 텐데? 청금석 산지가 있잖아! 5대 광석인 청금석!
-아직 어리시기에 재물을 탐내면 안 된다고 하셔서, 조금만 참으시라 하십니다. 그 부분은 가주가 되시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수호견의 저택으로 만족하시라고.
빠직.
할부지! 이거 계약 사기야!
아이작이 화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작은 소가주로 임명되기 전,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이작, 정말 가주가 되고 싶으냐.
-네.
-이건 계약이다. 나는 네게 소가주의 자리를, 너는 이를 받들어 책임감을,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이다.
라고 해놓고!
“푸하하하, 개집… 개집! 아니, 개집이라기엔 수호견도 사람의 모습이라 지나치게 크고 좋은 곳이지만!”
레아의 쌍둥이 남매인 조세프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소가주로는 아직 교황의 자리에 닿기엔 부족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교황의 자리를 먹기 위해서는 다섯 추기경을 모두 짓밟… 아니, 승리로 이끌어 스스로 교황이 돼야 했다.
그 전에 성자가 먼저겠지만, 어쨌거나 교황이 돼야 교황의 비전을 익혀 계약한 금의 신들에게 복수할 힘을 얻는다.
그리고 소가주의 지위는, 그 길을 향한 위대한 한 보. 여기까진 아이작의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식단은 왜 건드는 건데?”
아이작은 다시 마주한 콩고기와 콩물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슈리가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빛의 신께서 또 꿈에 나오셨는데, 우시면서 계시를 내리시더라고.”
[소가주를 적극 지원해주어라. 어지간한 건 들어줘도 된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재물은 현혹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재물만큼은 절대 삼가라.]
[가주 자리를 위해 청의 교리를 지키게 하라.]
[아, 식단도 검소하게 채식만 허락하게 하는 걸 잊지 말고…….]
[아, 그리고 또…! 또!]
슈리가 빛의 신의 애절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시는 걸 보면, 비전을 부활시켜서 감격하신 거겠지?”
슈리의 말에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아. 할부지가 이러는 게 빛의 신 때문이었어?
[주인님이 소가주가 되는 걸 막지 못했으니, 차라리 완벽한 청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거군요.]
“청의 사람답게 검소와 인내. 이걸 꼭 지키라 하셨대. 십계명도 주셨댔어. 재물은 특히 어린 소가주를 위해 반드시 피하라고.”
[하다못해 청의 재물만이라도 지키려고 했나 보네요.]
그으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할아버지도 적극 동의하셨어. 네가 능력은 돼도, 인성이 썩은 건 맞으니까. 그러니 당분간 고생해라. 검소한 게 좋은 건 맞으니까.”
그러나 아이작은 씨익 섬뜩하게 웃었다.
“채식이 더 위험하다는 걸 아셔야 할 텐데.”
…뭐라고?
“계약을 속이고 이런 낡은 검이나 주다니. 할부지, 복수해주마.”
그러자 조세프는 푸웁 웃으면서도 아이작을 격려했다.
“야, 이래 보여도 너 무지 좋은 거 받은 거야. 이거 돈으로 환산 안 돼. 무려 가문을 이끄는 불, 청화에게만 주어지는 거거든.”
슈리도 부럽다는 듯이 입을 삐죽였다.
“맞아. 솔직히 가주님이 이것까지 주실 줄은 몰랐는데.”
아이작이 받은 검은 가문의 상징인 에슈아의 검이었다. 볼품없어 보이지만, 청의 기사들이 받았으면, 분명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바쳤을 것이다.
“청의 기사들이 우러러보는 고귀한 명예인데……!”
아니, 그딴 명예는 필요 없거든?
아이작은 검을 뽑아보며 말했다.
“이거 팔면 얼마…….”
“파는 건 포기해라. 청의 검을 팔면 청의 최고기사들이 대륙 반대편까지 쫓아올 거라, 아무도 안 살 거다. 가치는 높은데 지하경매꾼들도 그거만큼은 피할걸?”
“…역시 고물 쓔레기.”
아이작의 표정에, 슈리는 책상을 내리쳤다.
“아, 왜! 넌 이번에 청의 기사 소대도 받았잖아! 원래라면 우리 나이에 절대 못 받아!”
릴라이도 소대를 받은 건 스물셋 때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만 있으면 청의 어떤 기사들도 충성해! 가주님이 부재중이실 땐 다른 기사단들, 게다가 릴라이 숙부가 이끄는 범고래들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
아이작은 아깝다는 듯 칼을 집어넣었다.
“청의 기사단을 이끌게 된 건 좋다만, 내가 바라는 건 인사권. 기사들을 팔아치우고 수익을 얻을 권한이 필요했던 거야!”
…뭐? 뭐? 뭘 팔아치워?
하지만 조세프는 푸하핳, 아이작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어깨동무를 했다.
“설마 이 고지식한 에슈아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형이 이제부터 널 아껴주마.”
아이작은 의외라는 듯 조세프를 보았다.
“너, 가주 자리 원한 거 아니었냐?”
“원하긴 하는데. 난 싸움보단 경영이 더 맞아. 돈이 더 좋거든. 그래도 아쉽네. 너한테 빌붙어서 재산 몇 개 좀 챙기려 했더니, 하필 당장 받은 게 소대 하나라니.”
“아이작이 받은 소대가 어떤 소대인지 모르세요?”
“뭐, 엄청나긴 하지. 설마 그 소대를 주실 줄은 몰랐을 정도로. 특히 사마엘이 이를 갈고 있을걸. 네가 받은 그 기사단을 옛날부터 원하고 있었거든.”
낯선 이름에 아이작이 미간을 좁혔다.
“사마엘?”
“너랑 우리들 사촌. 왜, 노엘 숙부 옆에 있는 적갈색 머리인 애 봤지? 과묵한 애.”
아이작은 금방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 <생존을 방해하는 자>가 떴던 놈이군.’
노엘의 아들인 듯하나,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오히려 교황과 비슷한 기운.
‘기원 반응도 더럽게 시커먼 색이었지.’
조세프는 영리하고 계산적인 눈빛으로 큭 웃었다.
“다들 노엘 숙부를 가주로 생각했지만, 난 사실 그놈이 제일 가깝다고 봐. 어쩌면 릴라이 숙부보다 더 천재일걸?”
“!”
“뭐, 음침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성녀 건으로 레아가 극도로 싫어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놈이 가주 자리를 포기할 애가 아니라. 너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 수도 있다.”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그의 웃음에, 아이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거야?”
“지금은 네가 비전을 살려, 장남의 유품까지 가져와. 가주께서 명분으로 찍어누르고 계시지만, 노엘을 지지하는 가신들과 성기사들이 많다는 거야.”
조세프가 아이작을 돕듯이 말했다.
“이 가문에는 할아버지의 가신과 노엘… 아니, 정확히는 교황의 가신밖에 없어. 다시 말해 네 가신은 없단 거지.”
아이작은 단번에 이해했다.
할아버지의 가신들은 아이작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겠지만, 아마 교황의 가신들과 숫자가 비등비등한 거겠지.
그럼에도 에슈아가 굳센 걸 보면, 할아버지의 기세가 어마어마하다는 거지만.
“그 할아버지가 가주 자리를 내려놓는 순간,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워질 거라는 거야.”
조세프가 보기엔 아이작은 어린애니까. 할아버지가 없으면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풉, 바보 같은 생각이죠. 주인님이라면 살생부를 만드실 텐데.]
야, 아무리 나라도 성직자 가문을 피바다로 만들진 않아. 통구이 정도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교황이라면 그들을 움직여 소가주의 자리를 바꿔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아니, 조세프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걸 보면, 벌써 교황이 움직였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일단 교황의 가신들을 골로 보낼 방법을 찾아야겠군.’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일을 쉽게 해결하는 법이 있다.
평판도 안 더러워지고, 아이작의 손을 안 거쳐도 되는 길.
“아직 세력이 결정되지 않은 신입 성직자들 있지? 걔들을 내 가신으로 삼으면 돼.”
그럼 이쪽의 가신들이 늘어나서 교황 쪽 가신들도 밀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작만의 가신들을 만들어놓는 게 장기적으로도 좋았다.
‘마침 드래곤이 내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놈을 유인하려면 부하가 필요한데.’
[…설마 가신들을 드래곤 먹이로 쓰시게요?]
‘아니. 드래곤이 좋아할 만한 노비를 구하려던 것뿐인데, 그것도 나쁘진 않군.’
지금 청의 기사들은 대부분 임무에 나가 있어 써먹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신입은 쓸데없이 머리도 안 굴려서 굴려먹기엔 좋다.
계산이 끝난 아이작이 웃었다.
“마침 신입 성직자들은 소가주가 교육할 권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신입 성직자들은 어디서 훈련 중이지?”
신입 성직자들은 보통 가문 후계자의 밑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찌감치 차기 가주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자 조세프 푸핫,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신입? 뭔 소리야. 청한테 신입이 어디에 있어!”
“뭐?”
“5년째 제로다, 제로!”
“뭐라고?”
“다들 청은 오기 싫다고 하고, 다른 신앙이 다 채가고 있는데 무슨. 올해도 신년회에서 청만 빼고 우르르 쓸어갈 거다. 최고는 역시 금이겠지.”
조세프는 포기하라는 듯 아이작을 토닥거렸다.
“애초에 네가 소가주인데, 네 기행을 본 신입이 우리 가문에 오려고 하겠냐? 어차피 내가 보기엔 가문도 교황가에 넘어갈 거, 적당히 포기하고 나랑 같이 에슈아 재산을 처분해서 사업이나 하자. 소가주가 함께라면 좋은 얼굴 마담이 될걸?”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뭐? 신입이 제로야?
내 부하가 될 놈이 한 놈도 없다고?
천사 같은 아이작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아무리 그래도 한 놈도 없었다는 건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지. 지금 그게 중한가?
그때, 소가주의 임무를 전달해주던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래서 올해 신년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년회는 왜?”
“신년회는 견습 졸업식이면서, 동시에 신입들이 신앙을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신앙 선택은 졸업 이후에 진행이 되는데, 청은 그동안 신입이 없어서 가주께서도 참여 안 하시고 대리를 보내셨습니다. 보통은 노엘 님이 가셨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할까요?”
“아냐. 됐어. 이번엔 내가 간다 해.”
“!”
아이작은 큭큭큭 웃었다.
찌발, 두고 보자.
아주 들끓게 해주겠어.
일단 추기경들부터 처리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