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5)
신앙 선택.
뭐, 그러니까 대충 자신의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다.
보통은 견습 졸업 때 정하게 되는데, 신앙을 고르면 연수를 받으러 각 5대 가문에 들어가게 된다.
아무튼, 신입이 들어오는 건 매우 중요했다.
왜 중요하냐고?
내 노비니까…가 아니고.
신입들은 소가주의 밑으로 배치되었다.
그래!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내 부하가 될 놈이 수급이 하나도 안 되고 있던 거라고, 시발!
‘젠장, 신입은 필요한데.’
가문에 자신의 세력을 늘려놓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드래곤!
‘내 육신을 가졌다는 드래곤 수장 놈을 끌어내긴 해야 하니까.’
평소엔 철저하게 위장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절대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굳이 찾을 필요가 있나요? 주인님이 흑마법 한 번만 거하게 쏘아주시면, 단번에 달려올 텐데요.]
‘성직자들도 단체로 달려오겠지, 새끼야.’
어디 성직자들 뿐이랴? 마도제국 인간들에, 해골왕을 주인으로 섬기던 부하들에, 옛 동맹들까지. 해골왕을 우러러보는 이들이 신나서 달려올 거다.
특히 드래곤들은 아주 연합해서 우르르 몰려오겠구나.
‘아무튼 나는 드래곤들한테 지명수배당해서, 직접 만나는 건 곤란하다고.’
신성드래곤은 보통 어리고 재능 있는 성직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신입 중에서 취향에 맞는 놈들을 골라서 유인하려고 했건만!
[역시 드래곤 먹이로 쓰시려고 신입을……?]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신성드래곤인데, 인간을 먹을까?’
[육식이긴 하잖아요.]
‘뭐, 나는 주지육림을 꾸려서 넣어줄 생각이었다만.’
[하이고 이젠 하다 하다 인신매매에 납치까지…….]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보석을 캘 광부로 써먹을 수 있다. 놈들이 보물에 환장한 건 다 알고 있거든.
[광부라면 청의 기사들을 써먹어도 되지 않나요?]
‘아, 상급기사들은 부려먹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잖아. 속이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신입들이 대가리가 안 커서 굴려 먹기 딱 좋다고!’
애초에 청의 기사들은 지금 다 임무에 나가 있어서 부려 먹지도 못한다.
새삼 그 사실이 떠올랐는지, 마차에 탄 아이작은 화를 냈다.
“시바! 기사 놈들이 동절기면 집에 처박혀 있어야지. 왜 나가, 나가긴?”
화를 버럭 내는 아이작의 모습에, 슈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청은 오히려 겨울이 바빠.”
“도대체 왜?!”
“왜긴 왜야. 다른 가문이 겨울에 쉬니까지. 사람들의 도움 요청이 잦아지는 때라 청의 기사들을 많이 파견 보내야 하거든.”
“으아악! 이 개 같은 호구 신앙!”
아이작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무튼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내 부하가 될 놈들이 5년 사이 한 명도 안 들어왔었다니.”
“하긴, 나도 궁금하긴 하네. 나도 아카데미에 있을 때라서 잘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명도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데.”
“으휴! 3D 호구니까 죽어도 안 오는 거지!”
“…3… 뭐?”
“어렵고, 더럽고, 힘들고! 호구잖아!”
아이작이 대답 대신 가슴만 퍽퍽 칠 때, 마차가 멈췄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고, 시종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도련님들. 황궁 연회장에 도착했습니다. 바닥이 아직 미끄러우니 조심스럽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작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나갔다.
화살처럼 지나가는 그 광경에 마부도 시종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이작 도련님.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에슈아에서는 끙끙 앓으며 거의 죽는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던 것 같은데?
“견습 졸업에 참가하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프신 얼굴이었는데…….”
“전혀.”
슈리는 마차 칸에서 슈트 가방을 여러 개를 빼내는 샤브나크를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커흠, 기침을 하며 다가갔다.
“아이작 이놈은 혼자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시종들만 힘들게. 이건 내가 도와줄게.”
“?”
샤브나크는 귀찮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슈리는 호기롭게 아이작의 슈트 가방을 들…….
“컥!!”
…들지 못하고 쓰러졌다.
“커. 커헉!”
무겁다.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더럽게 무겁다!
‘아이작, 이 새끼. 도대체 뭘 담은 거얅!!’
샤브나크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가볍게 들어올려 가져갔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이작을 따라가는 샤브나크를 쳐다보며, 슈리는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아이작은 그런 슈리를 한심하게 보았다.
“뭐야, 낌슈리. 빙판에서 미끄러졌냐?”
“너 이 새끼…. 가방에 뭐 담은 거야…….”
“넌 알 거 없고.”
슈리는 이 꾀쟁이 좀 보라는 듯 아이작을 흘겨보았다.
“너 이 새끼, 너 가모님 만나기 싫다고 아픈 척이나 하고……!”
아이작이 에슈아에서 꾀병을 부린 이유가 멜리사 때문이라는 걸 슈리가 모를 리 없다.
“가모님 우시겠다, 우시겠어. 또 시무룩해지신 거 못 봤냐.”
“몰라. 나부터 살고 봐야 해.”
“??”
이놈은 왜 이렇게 가모님을 무서워하는 거지? 하지만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이작!”
“슈리!”
황궁 연회장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뛰어나왔다. 청의 팀원들이었다.
“이게 몇 달 만이냐!”
“와, 미친. 아이작은 잠깐 안 본 사이에 키가 또 컸는데?!”
“얜 도대체 얼마나 크려고 벌써 쑥쑥 자라……!”
신년이지만 아직 눈이 내리는 계절인 만큼, 모두의 옷이 두꺼웠다. 연회장 내부도 공양제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입고 있는 옷차림도, 곳곳에 장식된 장식물의 재질도 죄다 두꺼웠다.
아마 이렇게 우르르 모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오늘 이후로 신앙을 선택해,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질 테니까.
‘견습 졸업이라 그런가, 무지 화려하게 꾸며놨군.’
견습 때는 아직 신앙을 탐색할 시기이기에 연회 장식도 비교적 중립적인 색을 고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천장과 벽 곳곳에 5대 신앙의 색들이 서로 경쟁하듯 걸려있다. 마치 작정하고 자신들을 홍보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청의 색이 묘하게 많군.’
검소한 청이 저리 비싸 보이는 장식에 투자를 할 리가 없는데?
그 시선에 청의 팀이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연회장 홀 장식을 직접 지시하셨더라.”
“황태자??”
“엉. 견습 졸업식은 교황청이 아니라 황궁에서 하자고 하신 것도 황태자 전하고.”
걘 왜 그런 짓을?
“뭐, 황실과 교황청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그편이 좋으니까. 다들 동의했지만.”
“그런데 일부러 그걸 신경 써야 할 정도면 도대체 사이가 얼마나 안 좋다는 거야……?”
다들 정치적인 이슈를 걱정했지만, 정작 깃발을 보는 아이작의 눈은 아득해졌다.
…뭐지. 청의 깃발들만 미묘하게 커 보이는 건 착각인가?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이 연회에 무슨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아무 목적도 없을걸.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다분히 보이긴 하다만, 아이작은 무시했다. 물론 아이작과 같은 눈썰미를 가진 이들이 있는지, 아니꼽게 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청이 어쩐 일로 화려한 장식을 달아놨대?”
“그럴 돈은 있었냐?”
“!”
대놓고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적의 팀이었다. 척 보기에도 좋은 재질의 코트를 입고 있는 그들은, 청의 팀을 잡아먹을 듯 보고 있었다.
“청은 오늘 밤에 신앙 선택 연회에 참가하시냐?”
“풉. 올 수는 있겠냐. 입고 있는 것만 봐도 빈티가 나는데, 뭐.”
이제 진영이 갈라진다고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기선 제압일 수도 있었다. 이미 5대 가문의 가신들이면 몰라도, 수백 명의 견습들은 오늘 신앙을 정해야 했으니까.
상대를 깎아내려 경쟁자를 없애려는 것이다.
“나이저, 너도 뭐라고 해줘 봐.”
그러자 구석에 앉아 있던 나이저가 화들짝 놀랐다.
따뜻한 남부의 귀족이라 추위를 잘 타는지, 다른 이들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적의 팀이 웃었다.
“청한테는 특별히 방을 잡아줄게. 졸업식이 끝나면 연회장 대신 거기서 놀라고.”
그러자 아이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왜? 우리도 신앙 선택장에 갈 거야.”
그러자 적의 팀이 대놓고 웃었다.
“푸핫! 뭐 하러? 어차피 청은 올 신입도 없는데 파티는 할 수 있겠어? 다른 사람들 보기 쪽팔릴 것 같아서 우리가 특별히 신경을 써준다는 거였는데!”
“올해도 청은 파리만 날리겠지!”
그 말에, 핏대를 세운 아이작이 나이저를 불쾌한 듯 보았다.
“야. 싸가지 세페트.”
“!!”
아이작은 적의 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애들 교육 똑바로 안 시켜? 뛰질래?”
“……!”
나이저는 움찔했고, 적의 팀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센 척…….”
“야, 새끼들아 그만해! 쟤 말 안 들리냐!”
나이저가 얼른 날아와 부하들을 걷어차고 멱살을 잡자, 얻어맞은 팀은 당황했다.
“나, 나이저?!”
왜 아이작을 돕냐는 실망의 시선에 나이저는 아차 싶었다.
“그, 그… 그래! 얘… 아니, 이분은 이제 청의 소가주셔!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라고!”
“뭐? 소가주?!”
모두 당황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소가주라면 이미 일개 견습이 아니었다.
하물며 청의 가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사실상 바로 이번 대의 추기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이저도 소가주나 다름없었지만, 정식 승계를 받기 전이기에, 위치가 완전히 다르다. 적의 팀의 얼굴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나이저는 아이작을 흘겨보았다. 아이작이 슬쩍 채찍을 꺼내려는 게 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손등을 흔들고 있다.
바로 형법의 신의 문양을!
‘젠장, 저 자식 역시 내 약점을 이미 알고 있어!’
아이작은 나이저가 형법의 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걸 눈치챈 것이다.
실제로 적가는 대장신인 ‘형벌’의 신에게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꼭 되찾아야 했다.
‘형벌의 신은 하필 형법의 신의 동생이다.’
형벌의 신은 혈육을 끔찍하게 아껴서, 이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들이 위험했다.
“뭐, 좋아. 싸가지 세페트. 잘못을 알았으면 단체로 엎드려 뻗치고 ‘청에 굴복했다’를 100번 외치도록.”
…아니, 이 새끼가 더 위험할지도.
그 광경에 주변에서 술렁거렸다.
“뭐야, 적이 청한테 뭐 잘못한 거야?”
“굴복했다니?”
그 술렁거림에 아이작은 이거라는 듯 히죽 웃었다.
그래, 시선이 쏠린다!
좋다, 어서 더 여길 주목해!
신입 노비들아, 어서 청으로 오라고!
선택?
원래 이런 건 막바지가 중요한 거다. 그동안 어떤 이미지였든 간에, 막판 뒤집기 한 번면 장땡이라고!
‘이거면 뭐, 신앙 선택도 걱정 없겠지. 청의 팀만 해도 스무 명인데…….’
그런데 그때였다.
“그래도 올해는 청에도 신입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도 청을 떠나는데, 아이작이 외로울 것 아냐.”
청의 팀의 말에 순간 아이작의 고개가 끼긱 돌아갔다.
“뭔 소리야? 청을 떠나다니?”
청의 팀은 어째서인지 움찔했다.
“어, 어어 그게…….”
“…그게?”
아이작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게??”
“그… 미안! 우리는 모두 공부하러 갈 것 같아!”
“공부우??”
“응, 우리 모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 당분간 성직 생활이 아니라 유학을…! 걱정 마! 청에 도움이 되는 공부야! 우린 이제 먼 곳에서 응원할게!”
아이작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먼 곳? 먼 곳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아아. 이거,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한 명도 아니고, 전원이 장학생으로 이탈한다고? 장난하나?
“누군가의 계략인 것 같은 냄새가 나!!”
그래, 안 그래도 이상했지.
아무리 다 3D 호구 가문이라도, 마를 퇴치하는 것으로 지조 높은 가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선망도만 놓고 보면 청도 순위가 상당히 높다.
왜냐고?
성직자로서 마를 퇴치하는 모습은 뿅 가게 멋있으니까! 성직자들, 특히 성기사들은 ‘명예가 아니면 죽음!’이라고 외치는 변태들이 대다수였고 말이다.
아무리 더럽고, 어렵고, 힘들어도 신념을 좇는 변태들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한 명도 없었단 건, 중간에 누가 수작질을 해놓았다고 볼 수밖에.
‘누구지? 금인가? 적인가?’
아이작은 나이저의 멱살을 잡았다.
“니들이 쌔벼 갔냐? 내 노비들?”
“…뭐, 뭐?”
“니들이 그간 청에 올 신입들을 쌔벼 갔냐고!”
그러자 적의 팀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외쳤다.
“어이고, 우리가 수를 안 써도 어차피 청에는 갈 놈이 없네요!”
“뭐??”
다들 그 말에 동의했다. 실제로 선배가 될 금의 2품 사제들도 신이 난 듯 지나갔다.
“뭐냐, 너희 벌써 기 싸움이냐? 청은 규율이 너무 빡세서, 재산 소유도 안 된다고 하더만.”
빠직.
“청에 가면 거지꼴 못 면한다더라고.”
빠직. 빠직.
“참, 청이 비전을 부활시켰다지? 이번에 비전을 선보이면서 신입들을 데려가려 한다고는 들었다만……!”
청의 비전은 명맥이 끊긴 지 꽤 되었다. 주교들은 물론, 선배 사제들조차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청의 비전은 대충 소문으로만 무성한 비전이다.
“얼마나 멋진지는 몰라도, 귀족들이 거기에 갈 리가 없잖아.”
“애초에 비전을 보여주기 전에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스카웃이 끝난 상태지.”
“그런 의미로 늦었습니다, 소가주님.”
“추기경 각하들께서도 작정하고 계시거든요.”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쪽도 작정을 해주도록 하지.
* * *
견습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기대되는 얼굴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너 어느 신앙 택할 거야?”
“당연히 금이지.”
“나는 백.”
“청은?”
“거긴 다 좋은데, 남들보다 빈곤하고 또 궂은 일만 해야 하잖아. 딱히 멋있는 것도 모르겠고…….”
“아, 그럼 안 되겠다. 그럼 나는 적으로…….”
“오, 그럼 저녁 때 적의 파티에 같이 가자.”
그렇게 모두가 부푼 마음으로 마음을 정했을 때, 신입생 졸업 대표가 호명되었다.
“신입 1위 졸업, 아이작 에슈아. 앞으로.”
“예!”
하지만 아이작이 앞으로 나서자, 견습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추기경들조차도.
어… 어어?
아이작의 모습을 본 모두가 식겁하며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