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신앙 선택 (2)
견습 졸업식.
졸업식에 참가하고 있는 견습들과 사제들은 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졸업 대표의 연설 때문이다.
“나참, 못 들었어? 마지막으로 비전을 보여주고 끝내겠다고.”
“아니! 비전만큼은 안 됩니다! 이곳은 한 가문의 홍보의 장이 아닙니다!”
비전을 보여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졸업 축사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자를 막으려는 것이었지만.
“애초에 황궁 내에서 성력을 쓰시는 건 엄금 사항입니다!”
“그래? 그럼 그 대신 청의 포부에 대해서만 말하고 끝낼게.”
“아니이! 지금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서 이미 40분 동안이나 발표를 하셨잖아요!”
“이제 진짜 안 됩니다! 내려오십시오!”
“알았어. 내려가는 대신 청의 비전에 대해서만 말하고 내려갈게.”
“아악!”
결국 아이작은 한 시간을 꽉 채우고 나서야 단상에서 내려왔다. 아이작을 말리는 사제들과 추기경들은 10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왜 3분짜리 연설이 1시간이 된 거지?
몹시 즐거워하는 백의 추기경만 빼고는 다들 두 번 다시는 저런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얼굴들이다.
물론 신입들이나 사제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아이작이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는 것도 있었지만, 신입들과 사제들은 서로 다른 의미로 아이작의 제안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정말 급료를 그 정도로 준다고??’
‘아니, 청! 도대체 어디까지 제안할 셈인데?!’
무엇보다 아이작이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주교들의 수면제 축사와 훈화가 잘린 게 이득이었다.
결국 아이작 뒤로는 거의 잘려서, 졸업식은 정식 3품 사제의 증표만 나눠주며 끝이 났다.
물론 원래도 전야제 격인 졸업식보다는 이후에 있을 신앙 선택의 자리가 더 중요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 졸업식이 완전히 청의 홍보 자리로 전락했단 게 문제지.
3품 사제의 증표를 든 슈리조차 질린다는 듯이 아이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새끼…. 나조차도 졸업식에서 기억에 남는 게 네 축사밖에 없다.”
“푸하핳! 그러게 누가 이런 자리를 주래?“
아이작은 아주 좋은 홍보의 시간이었다며 푸헤헤헤 웃어댔다.
“뭐, 정작 비전을 못 보여준 건 아쉽다만.”
“당연히 못 보여주지! 청의 비전을 쓰려면 마족을 불러와야 하는데, 거기서 그걸 쓰냐?”
“어엉? 뭐가 문제야? 진마를 유인하면 그만…….”
“야!!!”
슈리는 말을 말자는 듯 이마를 짚었다.
“추기경들이 너 끌고 나가려는 거 못 봤냐? 특히 흑의 추기경은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더라. 너 만약에 흑의 임무에 배치되는 일이 생기면 진짜 죽을걸?”
“푸헿! 왜? 먼저 작정한 건 그놈들이잖아? 치사하게 인재들을 미리 스카웃해?”
“어휴…. 질리는 놈.”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아이작 덕분에 청이 유례없는 관심을 받은 건 맞았다.
-정말 사유재산을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엉.
-급료도 주급으로?
-엉! 원한다면 집도 주마!
-오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한테도 생활비와 집을 주마!
-오오오!
-쌍둥이면 두 배다!
-우어오오오오!!!
그쯤 되자 슈리는 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
“너… 다 좋은데 공수표를 그리 남발해도 되는 거냐?”
“야. 나만 믿어. 나 이제 에슈아의 소가주야.”
그말에 슈리는 더더욱 걱정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너 벤야민 백부님하고 상의는 한 거 맞지?”
“차남?”
“그래! 에슈아의 재정은 벤야민 백부님이 관리하고 계시잖아! 백부님과 상의해야 할 텐데?”
아이작은 별걱정 같지도 않은 걱정을 한다는 듯 웃었다.
“야, 장난하냐? 나 이제 소가주야. 날 뭘로 보고.”
“오오 했구나! 니가 어쩐 일!”
“아까 열심히 말했으니까 알아서 듣겠지?”
…안 했잖아!! 시발 놈아!
슈리는 새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자 뒷일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벤야민 백부님…. 이야기 듣고 쓰러지실 게 훤히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신앙 선택 식전까지 점심을 즐기던 둘에게 시종이 다가왔다.
“저, 저기… 아이작 도련님.”
“뭔데?”
“그, 가택에서 연락이…….”
“누군데?”
“받아보시면 압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종이 내미는 새끼 고래를 전달받았다. 에슈아 직계들이 쓰는 연락용 신수였다.
곧 아이작이 신수를 안아 들자, 신수의 입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자아악!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이작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연락을 해 온 건 차남 벤야민이었다.
-주급에, 저택에!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벤야민의 노성에 슈리는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지금 신앙 선택의 장에 가 있는 건 벤야민의 부하일 것이다. 그는 몰려온 신입 때문에 멘붕이 온 게 틀림없다. 그리고 지금 막 그 소식이 저택에 있던 벤야민에게도 전달된 것이겠지.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청에게 달려갔나 보군.’
곳곳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됐어요. 숙부님. 그래서 신입들은 몇 명이나 왔대요?”
-아이작! 너 이런 중요한 걸 상의도 없이 멋대로 하면…….
“아 그래서 몇 명이나 왔는데?”
-너한테 소가주 권한이 주어진 건 맞지만, 이런 식이면…….
“아, 몇 명!”
-서른 명!! 그리고 너 내가 숙부야! 인마!
“쯧. 고작 그걸로는 한참 부족해. 부하한테 더 열심히 홍보해보라 해. 조건은 더 올려서.”
-아니, 이 자식이 그래도……!
뚝.
아이작은 가차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다.
경악한 슈리와 시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숙부에게 반말을……?
그것도 모자라서 명령까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다른 부분에서 화가 난 듯했다.
“후, 이 몸이 직접 홍보까지 했는데 찾아온 놈이 고작 서른 명밖에 안 된단 거지?”
“뭐,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서른 명도 대단한 거다. 신앙 선택 식전, 아직 정식으로 시작도 안 했잖아.”
신앙 선택.
성직자들이 진영을 고르는 중요한 영입전으로, 이건 헬라의 콜로세움에서 진행했다. 아무래도 비전을 보여주려면, 실내가 아니라 실외에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모인 그곳에서 비전을 보여주는 연례 행사 후, 최종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슈리는 굉장히 뿌듯해했다.
뭐, 금의 신앙쯤 되면 서른 명은커녕 시작부터 절반이 몰려들지만, 보통 비전을 본 뒤에 움직이기 때문에 이 정도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면…….”
“닥쳐! 나는 다른 신앙의 사제들까지 빼앗아 올 생각이었어!”
“이 미친놈아! 이게 신입 모집이란 걸 잊었냐!”
“흥. 하다못해 신입 전부가 와야 수지가 맞지.”
“야…. 봐줘라. 그 조건에 신입이 전부 오면 에슈아는 파산해.”
“아앙? 아직 조건은 시작도 안 했는데, 고작 그깟 걸로 뭘 파산해?”
“…….”
시, 시작도 안 했다고?
이 새끼, 에슈아를 진심으로 망하게 할 생각인가?
하지만 그런 슈리의 시선에 아이작은 코웃음을 쳤다.
“걱정 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한 건 아니니까.”
“……?”
아이작의 입꼬리가 탐스러운 먹이를 보듯이 씰룩거렸다.
“내가 소가주로서 장부를 살펴보니까, 석연치 않은 곳이 있더라고.”
“…뭐?”
“돈이 새는 곳이 있어.”
슈리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말도 안 돼! 벤야민 백부님께서 그걸 모르셨다고?”
“음, 그럴 수 있어. 성직자들은 절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이거든.”
“!”
동시에 슈리는 내심 안도한 듯, 그리고 뭉클해진 듯이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이 찾은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걸 다 떠나서 일단 장부를 들춰봤다는 것이 기뻤다.
“이 자식…. 그래도 소가주로서 책임 의식은 있었구나. 그럼 신입들의 급료는 그 새는 돈을 환수해서 줄 생각…….”
“아니? 그건 내 돈이고.”
…뭐?
“에슈아 돈으로만 주면 그게 뭔 손해야.”
…손해?
슈리는 뭔가 좀 불안해졌다.
“신입들은 신께 공물을 바칠 것이고, 결국 그 돈은 내 돈인데. 이래서는 그냥 돈의 위치만 달라지는 거잖아? 이자도 안 돼요.”
아니 미친 새끼야. 공물이 왜 공물인지 몰라? 그거 신의 돈인데? 왜 네 돈이야?
“다른 곳에서 급료가 들어와야 그 돈도 내 것이 되지.”
…이 새끼. 설마 남의 돈으로 급료를 줄 생각이냐?!
“백도 괜찮고, 듣자 하니 흑도 돈이 무지하게 많다던데.”
“야!!”
슈리는 질색하듯 보았다.
“백은 왜 뜯어! 그 착하신 분들은 왜!”
“자고로 치유 성법이 제일 돈이 많이 드는 법이지. 그런데도 품위를 그 정도로 유지하고도 남아? 게다가 신수를 그렇게 많이, 곱게 기를 정도면 기본 재력이 어마어마한 증거지.”
“야!!”
아, 확실하다.
이 자식, 성자가 되어 교황이 되면 나라가 거덜날 거야!
“크크크 귀족들의 투자를 받아서 걔들 돈도 팍팍 뿌려야지.”
이마를 짚던 슈리는 그 말에 어린아이 보듯 비웃었다.
“야, 투자가 그냥 들어오는 줄 알아? 귀족들이 얼마나 돈독이 올랐는데 청한테…….”
“괜찮으니까 따라와. 방법이 다 있다.”
“……?”
* * *
슈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이작을 따라갔다.
물론 아이작의 말은 납득했다. 투자자가 있으면 아이작이 말한 신입의 조건 등, 에슈아도 재정적으로 해결이 되겠지만, 글쎄…….
‘누가 미래 불안정한 청한테 돈을 투자해준다고…….’
그런데.
“투자? 나한테?”
“예, 전하.”
…황태자한테 투자받을 생각이냐, 이 미친 새끼야?
황태자와 마주한 아이작을 보는 슈리는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하다 하다 황족한테 손을 벌릴 셈이야?’
진짜 저런 놈은 처음 봤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황실이 얼마나 성직자들을 싫어하고,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 하는데.’
투자를 해도 황실기사단에 투자를 하면 했지, 미쳤다고 성직자를…….
“좋다. 그대라면 투자할 가치가 있겠지.”
아니! 황태자! 너 그래도 되는 거냐??
얼어붙은 슈리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황실은 든든하긴 하지만, 저래 보여도 황태자는 굉장히 주도면밀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설마 청을 이용해서 교황가를 쳐내려는 건가?’
이거면 자칫 피바람이 불며 에슈아까지 휘말릴 수도 있다.
“그럼 에슈아에게 일단 10년 치 급료를…….”
시발! 10년이라니.
무슨 통이 저리 커? 미쳤나!
아니, 그 전에 안 돼! 돈이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슈리가 다급히 거절하라고 말하려는 그때-
“아니. 돈은 됐습니다.”
“뭐?”
아이작은 방긋 웃었다.
“대신 물건 몇 개만 주십시오.”
슈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자식이 황태자를 전당포 취급하네. 무례하다며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
“물건? 뭐가 필요하지?”
아니… 저놈도 좀 이상해!
“전하, 마물이 봉인된 토템을 가지고 계시죠?”
움찔.
황태자가 드물게 움찔했다.
“연구를 위해 가지고 계신 거겠지만, 그건 가지고 계시면 위험합니다.”
움찔.
황태자의 반응에 아이작은 흐흐 웃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눈빛이지만, 빤했다.
‘해골왕을 소환하려면 필요한 것들이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그것도 일개 마물이 아닌 꽤 상급으로.
“그거면 충분합니다.”
결국 왜 토템을 달라고 했는지도 모르는 채, 아이작과 슈리가 황태자 궁에서 빠져나왔다.
어째서인지 황태자가 묘하게 아까워하는 눈치였지만, 아이작이 손을 내밀자 그냥 넘겨줬다.
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토템은 왜 달라한거야?”
“비전을 보여주려면, 마물이 있어야 하잖아.”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비전 시연회에서는 무생물인 마물을 활용해 비전의 위력을 보여준다.
“어차피 교황청에서 나눠주잖아. 굳이 황실에서 받아올 이유가 있냐는 거지.”
그리고 그때였다.
“!”
슈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수풀을 보았다.
“누구냐!”
슈리는 바로 성력탄을 날렸지만, 상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가 아이작과 슈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됐어, 누군지 예상은 가니까.”
“뭐? 도대체 누가……!”
그러나 아이작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큭 웃었다.
“뭐, 설마 토템을 다른 곳에서 구할 줄은 몰랐겠지.”
“무슨 소리야?”
아이작은 대답 대신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지난 5년 동안 청에 신입이 없었다 했지? 그럼 그때 청의 기술을 보여주긴 했었어?”
“당연하지. 비전은 못 쓰니까 보여주지 못했지만, 청의 기술은 선보였다고 들었어.”
“그랬는데?”
“뭐…. 처리를 잘 못 했지. 좀 까다로운 마물이었대.”
그러자 아이작은 무슨 연유인지 씨익 웃었다.
“그 마물. 교황청에서 받은 토템이었겠지?”
“…어. 그랬을걸? 상급 마물의 토템은 교황청만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그게 왜… 헉.”
슈리가 뭔가 눈치챈 듯 움찔하자, 아이작은 가증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신성한 교황청에 장난질을 하는 놈이 있네.”
하지만 올해는 어림도 없지.
올해 신입들은 전부 내 노비가 돼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