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공평하게 해야지 (1)
아이작은 잔뜩 빡친 채로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그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뭐? 5년 동안 신입이 없어?
감히 내 노비들이 없다고?
“하다못해 청의 팀은 난데없이 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 뭐? 유하악?”
아이작을 따라가는 슈리는 땀을 삐질 흘렸다.
“뭐, 기뻐하긴 하더라. 청으로선 뼈아프지만, 친구로서는 축하할 일…….”
“유하악에 장하악생은 옘병. 걔들 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들도 아니잖아?”
슈리는 기겁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너, 방금 되게 무례한 말 한 거 알아?”
“알았냐? 나 정도 머리는 돼야 장학생에 유학을 가는 거라고. 게다가 유학도 갈 거면 도움이 되게 적국으로 가라고! 바보들아!”
…이 새끼, 마도제국으로 간다고 할까 봐 무섭네.
“아무튼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뭘?”
“비전을 쓸 때 나눠준 토템에 누가 수작을 부려놓은 거야.”
“뭐?!”
뜻밖의 말에 슈리는 깜짝 놀랐다.
“치료의 성법을 쓰는 백 말고는 다들 고문, 배척, 소멸의 비전이니까, 대상이 될 마족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토템을 쓴 모양인데, 청의 물건에만 손을 댄 거지.”
“!”
토템은 마족을 봉인해둔 것으로, 생포한 마족들은 거의 물건 형태인 토템으로 만든다. 전리품으로 쓰든가, 이렇게 필요할 때 시범용으로 사용했다.
“하 때끼들, 마족이나 소환할 것이지, 뭔 토템이여.”
“아니…. 성직자가 마족을 소환할 수 있는 건 스켈레톤 정도인데, 비전을 쓰는데 스켈레톤을 소환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스켈레톤이 왜! 어때서! 지금 해골 무시하냐!”
“아, 아니, 왜 화를 내.”
“청이 해골왕 무시하냐고! 그러니까 니들이 안 되는 거야! 찌발!”
슈리가 생각해보니 그건 또 그렇다며 당황하자, 위스퍼가 한마디 했다.
[주인님이 자아를 잃지 않으셔서 기쁘긴 합니다만, 해골왕 때가 더 좋으신 겁니까?]
아니? 이 몸이 천만 배 좋은데, 성직자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싫을 뿐이야!
“아무튼! 청을 깎아내리려고 일부러 토템에 수작을 부린 거야.”
“설마… 신입들을 오지 못하게 하려고?”
“그래! 퇴마가 전문이라는 놈들이 마족을 잡는다고 헐떡이고 있으면, 얼마나 덜떨어져 보이겠어.”
그래서 청에 준 토템만 수를 쓴 것이다.
물론 비전을 못 쓴 영향도 어마어마하게 크겠지.
다른 놈들은 비전으로 단시간에 처리할 텐데, 청 이놈들은 비전도 못 쓰지.
그런 마당에 본인들의 인내의 신앙을 보여주겠다며 검으로 무식하게 피를 흘리며 싸워댔겠지. 성녀들처럼 그게 명예인 줄 아는 놈들이니.
“으휴, 변태 새끼들. 그러니까 갈 마음이 생기겠냐? 그렇게 더럽게 구르고 싸우는데?”
“…아니, 그건 청으로서 치열한 전투 자세를 보여주려 한 게 아닐까 싶은…….”
“찌발, 그건 치열한 게 아니라 쪼렙스러운 거야! 네가 신입이라면 졸라 개같이 구르는 곳에 가고 싶겠냐! 고작 슬라임하고 싸우는데 전력으로 피 터지며 싸우는 곳에 가고 싶겠냐고!”
“…….”
맞는 말이라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뭐어, 비전을 못 쓴 영향도 크지만, 아마 처리하기 힘든 이유는 더 있었을 거다.”
“그게 토템에 장치를 해 둔 것때문이라고?”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슈리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청이 비전 시연식에서 물을 먹었던 게 의도된 것이었다니.
“도대체 무슨 장치를……!”
“뭐, 그 부분은 안 봐도 훤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이작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아는 그게 토템에 장착이 되어 있는 거라면, 청이 애를 먹은 것도 이해가 간다.
“내 예측이 맞는다면, 올해도 어김 없이 장치를 해 놨겠지. 그러니까 황실에서 토템을 가져왔을 때 당황한 거야.”
“도대체 누가…! 아니, 왜 그딴 짓을!”
“그건 범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만이지.”
“뭐?”
아까부터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이작이 드디어 멈춰 섰다.
아이작이 도착한 곳은 콜로세움 내부의 무기 보관소였다.
보관소의 문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박살 난 채 뚫려 있었고, 여러 무기들이 즐비한 그곳에선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읍, 으읍! 으으읍!”
아이작과 슈리는 신음이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슈리는 깜짝 놀랐다.
샤브나크가 남자 하나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이 틀어막힌 남자는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샤브나크의 짓인지, 남자의 몸을 따라 살벌한 예기가 꽂혀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몸이 베이게 되어 있다.
거기에 목에 겨누고 있는 칼까지. 붙잡힌 사제로서는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아이작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샤브나크에게 잘했다는 듯 다가갔다.
슈리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아이작과 남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이 사람, 교황청의 사제인데…? 동료를 이렇게 잡아도 되는 건가?
“얜 또 뭔데?”
“우리 훔쳐보던 범인.”
“뭐?!”
사실 아이작이 황태자를 만나러 간 건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범인이 자신이 예상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감시가 붙겠지.
왜냐고?
자신이 황실과 친해지는 걸 무척 경계할 테니까. 그리고 감시가 붙으면 오히려 붙잡기 쉬우니까.
그래서 황태자궁에 일부러 간 것도 있다. 신앙 선택을 앞두고 자신이 황태자궁으로 향하면, 청이 곤란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쫓아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걸렸네.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샤브나크의 검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검으로 남자의 입을 묶은 재갈을 툭, 잘라냈다.
재갈이 풀리자마자 겁에 질린 사제가 버럭 화를 냈다.
“에슈아! 함께 신을 모시는 동료에게 이 무슨 짓을! …으아악!”
아이작은 가소롭다는 듯 그의 턱에 칼날을 갖다 댔다.
“동료는 개뿔이? 동료라는 놈이 개짓거리를 해?”
“…개, 개짓거리라니?!”
“머리 굴릴 생각 마라. 우릴 훔쳐보고 있었잖아?”
“그, 그거는 너희가 신앙 선택의 장소가 아니라 황태자궁으로 향하니까, 이상해서……!”
“웃기고 있네, 니들 수작이 안 먹힐까 봐 쫄린 거면서.”
“…수작이라니!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그러자 아이작은 큭 웃으면서 무기 보관소에 있는 큰 상자 앞으로 갔다. 샤브나크에게 이곳으로 유인하란 것도 사실 이 상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작의 모습에, 슈리가 급히 말렸다.
“야! 멈춰! 그 상자는 손대면 안 돼!”
아이작이 관심을 가지는 건 보통의 상자가 아니었다.
“상자 덮은 천 안 보여? 교황 성하의 휘장이잖아!”
성직자들에게 있어 교황의 휘장은 절대적이다. 그게 있는 곳은 일종의 성소로 분류된다. 한마디로 휘장은 아무나 손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실제로 성직자들이라면 그 절대적 문양 앞에서 꼼짝도 못 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손대지 말고…….”
“그래도 되겠어? 비전 시연식 때 나눠줄 토템이 들었는데?”
“!”
슈리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이작의 말이 맞는다면, 청에게 줄 토템에 뭔가 장치가 되어 있겠지!
실제로 붙잡힌 교황청 사제의 눈이 불안한 듯 바삐 움직였다.
‘지금 저 안에 있는 걸 청이 확인하면 곤란하지 않나.’
하지만 괜찮았다. 신성제국 사람이라면, 절대 저 천으로 덮인 물건을 건들 수 없다. 교황의 권위도 권위고, 이단 심문관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
“아, 슈리야. 저기! 저기! 저기 좀 봐!”
“뭐?”
쾅!!!
아아악!
교황청 사제는 비명을 질렀다. 슈리가 고개를 돌린 사이, 아이작이 사정없이 보물상자를 박살 낸 것이다.
교황의 문장이 새겨진 천 따위는 개떡으로 보는 듯,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저 미친 놈이 교황 성하의 물건을 그냥 박살 내네!’
곧 큰 소리에 놀란 슈리가 기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안 했는데? 저 사제 놈이 갑자기 상자를 박살 냈어. 세상에. 증거 인멸하려고 했나 봐…….”
사제는 기가 찬 듯 아이작을 보았다.
저 애새끼가, 죄를 이쪽에 뒤집어 씌우네?!
“그치, 샤브?”
“예. 교황 성하의 휘장을 찢어내다니, 교황청 귀에 들어가면 처벌을 받겠군요.”
환장하겠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상자 안을 확인했다.
상자에는 5개의 건어물 같은 물건이 있었는데, 각각 다른 신앙의 색상의 띠가 둘려 있었다.
아이작이 주목한 건 청색 띠로 감싸인 토템이었다.
“역시 붙어 있군.”
“!”
슈리는 아이작이 내민 토템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토템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먼지 같은 벌레. 심지어 토템의 살을 파고들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슈리로서는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이게 뭐야?!”
“기생충의 일종인데, 숙주를 조종하면서 무한 재생시키는 놈이야.”
“무한 재생?!”
아이작은 같잖다는 듯 사제를 보았다.
“이게 있으면,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지.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고 몸을 조종하고 있으니까.”
“……!”
“뭐, 기생충이 숙주를 지배하는데 하루쯤 걸리니까, 대충 시간은 맞겠네. 완전히 스며들고 나면 쉽게 눈치도 못채고. 5년 동안 청만 이런 걸 무식하게 잡고 있으니, 잡는 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있나.”
슈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왜 그런 짓을!”
“청에 신입이 들어가는 걸 막으려는 거지, 뭐. 할아버지도 마침 교황청의 임무 때문에 5년 전부터 참가를 안 하셨다고 했잖아? 더 수 쓰기 좋았겠네. 아니면 일부러 할아버지를 빼내려고 임무를 부여하셨나?”
“!”
그 말에 열 받은 슈리가 사제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자, 사제는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우, 우리는 몰라! 청을 시기하는 다른 신앙 놈들이 한 거겠지! 워낙 신입을 두고 치열하잖아!”
“5대 신앙 중에, 교황의 휘장으로 덮인 물건에 손댈 간 큰 놈이 있다고?”
“그럼 다른 마이너 신앙이겠지! 청을 나락으로 보내, 본인들이 5대 신앙이 되려는 놈들!”
“아아아, 그럼 교황청은 그런 수작질이 가능할 정도로 보안이 병신이라는 거구나?”
슈리는 빡친 듯 뒷목을 잡았다.
“일단, 이 사실을 알리고 올게. 중단해야 해! 이런 비겁한 짓은 못 하게 해야지.”
그러자 아이작이 푸웁 웃으면서 슈리를 붙잡았다.
“아냐. 일단 냅둬 봐.”
“뭐?!”
“내가 보기엔 이거, 교황이 얽혔을 가능성이 커. 아니, 애초에 다른 신앙들도 알면서 묵인했을 것 같은데.”
“……!”
“그리고 이대로 아무일 없이 진행되면, 분명 올해도 청만 낑낑대며 마물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
아이작은 큭큭큭 사악하게 웃었다.
“하지만 올해는 좀 특별할걸?”
그는 기생충 벌레를 청의 토템에서 스윽 뽑아서 들어올렸다.
“이런 건 똑같은 조건해서 해야지.”
그러고는 청이 아닌 다른 토템을 향해 벌레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본인들도 어디 똑같은 조건에서 해 보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