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와라! 노비들아! (1)
번쩍!
푸른 섬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이작을 중심으로 펼쳐진 반구 형태의 빛은 순식간에 콜로세움을 뒤덮었다. 콜로세움의 관중석까지 뒤덮을 정도로 상당한 크기의 에너지였다.
모두가 처음 보는 소용돌이 빛에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뭐지?’
넋을 잃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제국민들, 아니 하다못해 사제들조차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숭고한 적막이라고 해야 할까. 강력한 빛이 관중의 소리까지 삼키는 듯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빛에도 형체와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다.
강력한 에너지를 뿜는 빛은 마치 승기를 이끄는 여신처럼 강인하고 숭고한 자태로 마물을 뒤덮었다.
소용돌이치는 아름다운 빛이 마물에게 부딪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에 부딪힌 마물들은 형태도 유지하지 못하고 모래로 변하며, 빛에 빨려 들어가듯 소멸했다.
그오오오오!
그야말로 시선을 뗄 수 없는 광경에, 다른 신앙의 사제들은 그저 홀린 듯 빛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이게 난생처음 보는 청의 비전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사제들은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물론 책과 이야기로는 들은 적이 있지!
-선봉의 성녀가 승기의 기를 들면 푸른 섬광이 일출의 빛처럼 치솟아 오르는데, 그 빛이 마치 대지에 쏟는 신의 호흡과 같더라.
그 숭고한 빛에 고개를 들고 있는 마물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그 빛을 보면 비열한 도둑들은 회개하고, 겁쟁이들은 용기를 갖게 된다고 했던가.
성서를 공부하는 다른 사제들은 찬사와 과장이 심하다며 비웃었지만,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딴 문장으로는 전부 담아내지도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빛에, 다른 신앙의 사제들은 충격이 큰 듯했다.
‘이, 이게… 청의 비전!’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건,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자, 청의 비전 시연식 끝.”
아이작이 정신 차리라는 듯 짝, 손뼉을 치자, 홀린 듯한 사람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관중석에서 보고 있던 금의 신앙의 사제였다.
“청이… 부활했다.”
들고 있던 물건이 툭 떨어졌다. 청을 몹시 싫어하는 금의 사제가 그런 말을 할 정도였다.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아!”
“젠장!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환호성에 떠밀릴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었다.
“저게 청의 비전이야?”
“미쳤다!”
견습들 중엔 홀려서 옆에서 쳐도 반응조차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조건 따위는 머리에 생각나지도 않는 게 분명했다.
“시바…. 이건 무조건 청이다!”
“무급으로 일하게 해주세요!!!”
“우오오! 역시 성직자는 마물을 퇴치해야지!”
“최고다!”
견습들과 구경 온 제국민들의 외침에, 아이작은 짜릿짜릿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캬아, 이 맛이지. 그래! 더해! 더해라! 내 노비들아!”
일부러 화려한 놈으로 갈기길 잘했지!
그리고 그 광경에, 지켜보던 추기경들은 탄식했다.
“젠장…. 당했다.”
아이작의 꼼수에 완전히 넘어갔다.
“여기서 저걸 쓰는 건 반칙이지…….”
“고작 마물 몇 마리를 상대로 저딴 걸 갈기다니…….”
원래도 청의 비전은 성직자들의 이상향과 가까웠고, 심지어 소실된 줄 알았다가 무려 백 년 만에 등장한 비전이었다.
거기에 추기경들이 쩔쩔… 아니, 실제론 쩔쩔매진 않았지만, 그렇게 보인 상황에서 마물을 한 방에 퇴치한 비전이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청에 가자!”
“청이다! 무조건 청이야! 으아아악!”
어린 견습들은 이미 눈이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추기경들은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순간이지만 추기경들조차 빛에 압도되어 집중을 빼앗길 정도였는데, 어린 견습들의 눈에는 오죽할까. 이미 게임 끝났지, 뭐.
적의 추기경도 눈썹을 꿈틀거릴 수밖에 없다.
“치사하네. 저건 성녀가 해골왕의 군대를 토벌할 때나 쓰는 놈이 아닌가? 시연장에서 그런 걸 써?”
“비유하자면 추기경이 나서서 생태계를 파괴한 격이네요.”
백의 추기경의 말에, 적의 추기경이 시연 사제를 쏘아보았다.
“우리는 왜 비슷한 급으로 안 보여줬지?”
“아, 아니…. 각하. 그렇게 말씀하셔도…….”
“늘 이 정도로도 충분하시다고…….”
‘젠장.’
당장 자신들이 나서서 비슷한 급의 비전을 보여줄 순 있지만, 아마 강한 인상을 남기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저런 걸 봤는데, 뭐가 기억에 남겠나.’
연출된 상황, 화제성, 상징성. 무엇을 놓고 봐도 지금은 밀린다. 다 아이작의 계획대로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자신들도 놀랐다. 청의 비전을 실물로 보는 건 추기경들조차도 처음이었으니까.
동시에 백의 시연 사제들이 청의 시연 성직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다가왔다.
“너희들, 대단한데?”
“그치? 그치? 우리 소가주님 대단하시지?!”
“소가주님도 대단한데, 너희도 굉장해.”
“뭐?”
“그간 저런 놈들을 잡아 왔다는 거잖아. 비전 없이도 그런 걸 상대할 수 있다니.”
“다들 지금 청에 어떻게 들어가냐고 난리야.”
“올해는 신입을 많이… 아니, 솔직히 다 뺏길 것 같더라.”
“우리도 순간 혹했다니까.”
비록 모시는 신은 달랐으나, 동기들의 인정에 청의 성직자들은 울컥, 목이 막힌 기분이 들었다. 청이 처음으로 살아났음을 느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이작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염원이었다.
* * *
비전 시연식이 끝나고, 선택의 시간이 되었다.
신앙을 고르는 방법은 콜로세움에 있는 5대 가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5대 가문 사람이 대기자에게 명찰 패를 나눠준다.
보통 대기실을 빌려 그 작업을 했다.
그리고 평소라면 금의 신앙 쪽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고, 나머지가 박빙을 이루고 있을 테지만…….
“청! 저요! 명찰 패를 주세요!”
“청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비켜! 내가 먼저 왔어!”
올해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견습들의 대다수, 아니 거의 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파가 청으로 몰리고 있었다.
늘 관심도 받지 못했던 청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평소 다섯 명이 오면 정말 많이 왔다 싶을 정도였는데…. 이러니 명찰 패도 모자랐다.
실제로 매년 홀로 왔던 벤야민의 부하는 눈물을 흘리며 슈리와 아이작, 샤브나크에게도 도움을 요청해 올 정도였다.
뭐, 고생하는 건 슈리뿐이었지만.
“푸헤헤헿! 푸헤, 푸헤헤! 노비, 노비!”
아이작은 대기실 밖에 늘어서 있는 줄을 훔쳐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노비가 하나, 둘, 셋…! 저게 다 얼마야, 전부 노예로 팔아버려야지!! 푸하헤헿!”
[…아니, 신성제국엔 노예 제도가 없지 않나요? 불법이라 잡혀갈 텐데요?]
‘알 게 뭐야! 그럼 야만족이나 마도제국에 팔면 그만이거든?!’
그는 옆방을 보며 히죽 얄밉게 웃었다.
파리만 날리는 다른 신앙의 방은 청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쾌감을 느끼는 아이작의 눈이 초승달로 휘었다.
좋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죄다 쓸어와야지!
‘내 노비를 한 방울이라도 나눠줄 것 같냐?!’
그럴 거면 비전 시연식은 하지도 않았어! 올해는 신입 전원 입문시키는 게 목표야!
하지만 그 와중에 옆방으로 들어가려는 견습들도 있었다.
“으으음, 청도 멋있긴 했는데, 역시 한 번에 혹하면 안 되지 않을까?”
“맞아. 역시 안정적이고 현명하게 금을 택하는 게…….”
그러자 다른 신앙의 사제들이 반갑게 일어났지만…….
“기다려!”
아이작이 뭔 개소리냐는 듯 단상에 올라가 소리쳤다.
“지금 청으로 와서 상담만 하면 지원금 천 달라크!”
“?!”
“그것도 선지급!”
“!!!”
“친구까지 데려오면 더블 가격!”
“??!!”
“친구에 동생에 가족까지 데려오면 보너스 세 배 간다!!”
그 외침에 다른 방에 가려던 견습들이 모조리 몰려왔다.
안에서 파란 명패를 나눠주며 이름을 쓰고 있는 슈리는, 삐질 땀을 흘렸다.
저놈, 정말… 괜찮은 건가?
‘벤야민 백부님, 폭발하시겠는데……?’
어쩌면 재정 파탄으로 소가주 자리가 철회될지도 몰라…….
그보다 다른 신앙 사제들이 우리 죽이려고 한다. 야…….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청의 시연 성직자들은 아이작에게 몹시 고마워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그들은 설움을 풀었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가주님 덕분에 저희도 한을 풀었습…….”
“풀기는 뭘 풀어.”
“예?”
아이작은 쯧 혀를 차며 다른 방에 입구에 마스코트처럼 서 있는 시연 사제들을 흘겨보았다.
아이작과 눈이 마주친 적의 시연 사제는 움찔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눈은 더 살벌해졌다.
“니들, 청의 토템에 마충이 장치된 걸 알고 있었지?”
그러자 적의 시연 사제들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아, 아니요! 저희도 설마 무한 마충이 들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 정말입니다! 장치된 게 그거란 걸 알았으면 청에게도 말해줬을 겁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청의 시연 성직자들이 버럭 화를 냈다.
“뭐? 그럼 장치가 된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고?!”
“아… 아니, 그게!”
“이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청의 기사들조차도 이것만큼은 못 참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자, 아이작은 히히히 웃었다.
그도 그럴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그렇지! 머리채 잡아!
‘그래, 이 빌어먹을 성직자들아. 아주 그냥 내부부터 파멸시켜 주겠어!’
아이작은 얄밉게 일부러 불을 지폈다.
“전부 니들 윗대가리들이 사주한 거지? 청을 몰락시키라고. 알량한 수법이 보이네.”
“잠…! 청의 소가주님! 모함입니다! 사주라니, 각하들의 명예를 위해 철회해 주십시오!”
“그래서, 잘못 없다고?”
“아, 아뇨. 분명 저희가 잘못하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나오시면……!”
“이렇게 나오시면 뭐!”
청의 기사들은 아이작을 건드는 것만큼은 안 된다는 듯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이에 적의 사제들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낯익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무슨 소란이냐.”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청의 가주였다.
그의 등장에 사제들이 놀라며 고개를 숙였고, 아이작은 계획대로라는 듯 히죽 웃었다.
‘원래는 평범하게 사기를 쳐서 더 뜯어내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이 근방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할아버지를 끌어내기 위해 약간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왜냐고?
추기경들을 불러내야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청의 가주는 나타나자마자 기운을 뿜어냈다.
“할 말이 있으니 전부 숨지 말고 나오지?”
성난 목소리와 함께 추기경들이 곳곳에서 어기적거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그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청의 가주에게 다가왔다.
적의 추기경은 달갑지 않은 손님을 보듯 인사했다.
“…교황 성하의 임무로 나가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사고뭉치 때문에 가려다가 잠깐 돌아왔다.”
그 말만 한 청의 가주는, 대뜸 적의 신입 대기실로 쳐들어갔다. 그러고는 상석에 털썩 앉아 본인이 주인인 양, 적의 사람들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적의 추기경이 눈썹을 치켜뜰 수밖에 없다.
“저희 대기실에서 뭘 하는 겁니까? 신입이 오는 방인데요?”
“뭐래. 어차피 올 신입도 없잖아.”
뭐가 어째??
“꼴을 보아하니 올해는 우리가 다 가져가겠구만.”
이 양반이??
적의 추기경이 뭐라고 하려 하자, 청의 가주가 오히려 빡친 눈빛으로 말했다.
“토템에 대해서는 좀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
따라 들어온 추기경들의 낯빛이 바뀌자, 아이작은 푸웁 웃었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물론 추기경들이 바른대로 말할 리도 없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줄은 알겠는데, 저희는 몰랐습니다.”
“그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공유했을 겁니다.”
적과 흑의 추기경의 말에, 아이작이 같잖다는 듯 웃었다.
“웃기고 있네.”
“…?!”
추기경들이 아이작을 보자, 아이작은 순진한 척 웃었다.
“아, 실수. 다들 알고 계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