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와라! 노비들아! (2)
아이작의 말에, 추기경들의 표정이 모두 바뀌었다.
맹랑한 발언에 불쾌한 얼굴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눈치를 보는 표정들이다.
아이작이 같잖다는 듯 웃을 수밖에 없다.
‘허어 이 새끼들, 열심히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뭐 이해는 했다.
하필 이들이 껄끄러워하는 강자인 할아버지에,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백의 추기경까지 모두 있었다. 말조심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곧 추기경 중 제일 남한테 관심 없고 시니컬한 흑의 추기경이 작게 한숨 쉬었다.
“청이 마음이 상한 건 알겠다. 우리도 뒤늦게 알게 된 일이지만, 동료로서 분노가 솟는군. 이를 공감하고 깊이 통감하는 바다.”
새끼가 대본 읽나.
국어책을 읽어도 저것보단 더 감정 담아서 읽겠네.
“토템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이런 일이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지.”
흑의 신앙은 시체나 감식 조사 등 수사 연구나, 마물 연구, 범죄자나 탈주자들의 뒤처리 등. 상대를 면밀히 해부하고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일을 하는 신앙이었다.
청의 토템에 장난질을 한 범인도 그리 만들어주겠다는 약조였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참 든든한 말이었지만, 글쎄?
‘응, 그러니까 지금은 귀찮으니까 좋게 넘어가자는 거지?’
곧 죽어도 본인들은 몰랐다는 쪽으로 하고 싶은 거지?
적의 추기경도 능구렁이처럼 방긋 웃었다.
“원하시다면 저희가 조사해드리죠. 저희도 신성한 신앙 선택에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서요. 교황청을 뒤져보면 범인이 나올 것 같은데요?”
어이고, 적가 놈은 아예 금에게 뒤집어 씌우네.
실제로도 금의 추기경은 이 쓰레기 보라는 듯 적의 추기경을 노려 보았다.
흑의 추기경도 껴들었다.
“맞군. 토템을 준비한 금을 물색하면 청이 원하는 답이 나오겠어.”
와, 이 새끼들. 자기가 살겠다고 가차 없구나.
[…신성제국, 왜 안 망하고 있답니까?]
‘왜긴 왜야. 신들도 똑같은 놈들이니까 그렇지.’
[아.]
위스퍼는 단번에 납득했다.
‘그리고 성전은 숭고할지언정, 사람은 모이면 거대한 이익집단이 될 뿐이지.’
[!]
성전은 모일수록 거룩한 이야기가 되지만, 사람은 모일수록 권력이 생긴다.
그리고 신성제국 자체가 그렇다.
원래는 부족을 이루고 있던 신앙들을 초대 교황과 황제가 하나의 거대 신앙으로 통일시켜 지금의 헬라를 만들어낸 것이다.
각 신앙들도 같은 세계의 신을 모시고, 마를 막는다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동료가 되었을 뿐.
그래서 본인들의 뿌리가 더 중요한 건 알겠지만, 지금이 씨부족 사회인가? 이미 문명인이 된 지가 언제인데.
애초에 사람을 지키는 게 공동 사명인 성직자란 놈들이 선을 넘으면 안 되지.
[그러는 주인님도 맨날 선을 넘으려 하시잖아요.]
‘난 이단이라 면죄부임.’
[아.]
그렇기에 아이작은 순진하게 방긋 웃었다.
그사이, 흑과 적의 추기경은 좋은 먹이가 생겼다는 듯 합심해서 금을 공격했다.
“피해를 입은 청을 도와주지.”
“우리가 청 대신 교황청의 사제들을 조사해보면 청도 만족할…….”
“잠꼬대는 주무시면서나 하세요.”
“……!”
“이분들이 은근슬쩍 모른 척하시네?”
“!”
아이작의 썩은 웃음이 추기경들을 향했다.
‘이분들’이라고 했지만, ‘이 새끼들’이라고 들리는 건 절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디서 멋대로 금을 두들겨 패려고 하시나?”
그 말에, 다른 추기경들은 어쩐 일로 청이 금을 감싸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저것들은 우리가 팹니다.”
아, 그럼 그렇지.
“우리 동의도 없이 멋대로 청의 대변자인 양 나서지 마요. 그런 걸로 은근슬쩍 이쪽의 편인 척, 피해 가려는 걸 모를 줄 알아요?”
“……!”
아이작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할 수 없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토템을 준비한 금? 이놈들은 뭐, 말할 가치도 없고.”
입구에 서있는 추기경들은 기가 찬 듯했다.
이 자식 눈빛이랑 말투 좀 봐라…? 이젠 금은 대놓고 바퀴벌레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네?
“그리고 무한 마충이 무슨 메뚜기랍니까? 애새끼들도 잡으면서 가지고 놀게? 그만한 걸 구할 수 있는 건 흑뿐이죠.”
왜 알고 있느냐곤 하지 마라.
해골시절 흑의 추기경들이 채집해 가는 걸 봐서 잘 아니까.
“무한 마충은 사육 환경을 벗어나면 오래 못 버텨요. 고작해야 몇 분이라, 아마 사용 직전에 넘겨줬겠죠. 그러니 흑 쪽을 조사하면 나올걸요? 무한 마충의 페로몬이요. 숙주를 마비시키기 위해 뿜어내는 페로몬이라, 지독해서 씻어도 며칠은 남거든요.”
[안 나오면요?]
‘백 프로 나와.’
[왜죠?]
‘내가 묻혀놨거든.’
[…저기요??]
위스퍼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큭 웃었다.
뭐, 사실 그딴 짓까지 안 해도 이 나라에서 그만한 걸 다룰 수 있는 건 흑의 추기경 정도였다.
왜냐고?
신성제국에서 금지된 마충을 연구 목적으로 취급하고 소유할 수 있는 건 흑의 공작가 정도거든.
다른 불법 경로의 물건이었다면, 흑가가 진작 눈치채고 잡으려고 했을걸? 근데 모르쇠 한다는 건 결국 지들이란 거지.
‘애초에 백은 신수들 때문에 기생형 벌레들은 절대적으로 피하니까. 마충에 손을 댈 리가 없고.’
“하물며 토템을 사용하기 직전에 문제가 없나 점검하는 건 적의 추기경 각하잖아요?”
토템이 폭주할 일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설마아, 추기경께서 기생충이 들어가 있는것도 모르셨다곤 안 하겠죠? 그쵸?”
‘그딴 것도 몰랐다면 추기경 자리 내려놔야지?’ 하는 듯한 눈빛에, 적의 추기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즉, 토템에 손댈 일이 없는 백 말고는 어떻게 각하들이 모를 수가 있는데요?”
흑과 금, 적의 추기경들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 건방진 꼬맹이를 내쫓고 싶지만, 아이작은 청의 후계자였고 그 옆에는 팔짱을 낀 청의 가주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내 후계자에게 손을 대면 죽여버리겠다는 눈빛이다. 일부러 손자를 위해 교황의 임무도 뒤로하고, 여기가 상전이라는 듯 앉아 있는 거겠지.
결국 듣다 못 했는지, 백의 추기경이 끼어들었다.
“청의 추기경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니 더 쉬웠겠네요. 잘됐구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나 보군요?”
“……!”
평소 끼어드는 일이 없는 백의 추기경의 모습에, 다른 추기경들은 드물게 움찔했다.
“그리고 백은 여러분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고요.”
날이 선 음성에 다른 추기경들은 억울해했다. 먼저 적의 추기경이 말했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냅둔 거야.”
“그리고 백이 피해를 본 건 엄밀히 따지면 우리 탓은 아니다. 아이작 에슈아 때문에…….”
흑의 추기경의 말에, 청의 추기경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우리 애가, 뭐?”
호랑이 같은 눈빛에 추기경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쯧, 혀만 찼다. 아이작을 건드렸다간 괜히 X 될 것 같고, 이렇게 되면 백이라도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지.
금이 먼저 말했다.
“돌발 사고 때문에 백도 피해를 본 건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어.”
“맞아. 사실 문제라고 하면, 보복이랍시고 벌레를 심은 쪽이 잘못…….”
그러자 볼에 손을 얹은 백의 추기경은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아아….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지난 5년간 청의 토템에 장치가 된 걸 알고 계셨는데 그걸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어린 소가주님 때문에 생채기 좀 생겼다고 징징대고 계신 거군요?”
“!”
“아, 예. 물론 이해는 합니다. 그런 걸 보고도 직접 처리할 실력이 안 되신다니, 이해하고 봐드려야죠.”
…젠장? 뭐라고?
“우리 추기경들께서 손 하나 까딱 못 하시는 병자에, 벌레도 안 보이는 장님분들이시라는데, 뭐 어쩌겠습니다. 편찮으시니 머리부터 치료해 드리라고 해야죠. 저희도 못 알아챈 책임이 있으니까요.”
저 인간, 웃으면서 두들겨 패는 것 보소?
그러나 백의 추기경은 곧 걱정하듯 아이작을 보았다.
“하지만 아이작 공자께서도 위험하셨습니다. 공자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흑가도 아닌데 위험한 마충을 직접 다루시다니요. 만일 공자나 시연식에서 더 큰 사고가 났더라면…….”
그 말에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일부러 반성한 척 웃었다.
“아, 물론 그 부분은 제 실수라고 생각해요! 부하들이 괴로워한 원흉을 알고 나자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갚아주려 한 것이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죠!”
그 말에 백의 추기경은 대단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저도 추기경으로서 지난 5년간 알아차리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이번 일은 백도…….”
“아뇨 아뇨, 백은 잘못한 게 없어요. 오히려 저 때문에 백의 사제들이 피해를 입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 마음이 앞섰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아이작 공자…!”
[…와, 이런 가증스러운 웃음이라니.]
위스퍼의 말에 동의하듯, 다른 추기경들도 같잖다는 듯이 아이작을 보았다.
뭔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 청의 비전을 보여주려고 상황을 연출한 걸 모를 줄 알아?
하지만 뭐, 됐다.
청은 그렇다 치고. 백을 적으로만 돌리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백의 반응을 보니,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
“아, 맞다. 이번엔 백의 토템에도 마충이 있던데.”
“네?”
움찔.
몇몇 추기경들의 반응에 아이작은 큭, 이거라는 듯 웃었다. 사실 추기경들을 불러놓은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거 아세요? 청의 토템에만 기생충이 있는 줄 알았는데, 백에도 있더라고요.”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백의 추기경이 다른 추기경들을 보았다. 하지만 추기경들은 도리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백에 그게 왜 있어?”
“우리는 진짜 모르는 일이야.”
“…이봐요!!”
백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다른 추기경들은 진짜 모른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저놈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허.”
애초에 청한테도 안 넣었다고 끝까지 발뺌한 사람들이었다. 백이 쉽게 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한지, 금의 말에 이어 흑과 적도 한마디 했다.
“우리 말을 믿어. 청에 한 건 맞는데 백은 진짜 아냐.”
“맞아. 청에는 있었는데 백은 아냐.”
“뭐가 어째요? 청에 있긴 있었다고요? 이제야 실토하는군요?”
기가 차다는 듯 그녀는 아이작을 보았다.
“설마 아이작 공자가 백의 토템에서 마충을 빼내주신 겁니까?”
“잘못 없는 사람까지 휘말리게 할 건 없잖아요. 성직자로서 불의는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황실의 토템으로 대체했죠.”
백의 추기경은 내심 놀란 듯 아이작을 보았고, 다른 추기경들은 기가 찬 듯했다.
청의 가주조차도 저건 누구냐는 듯 보고 있었다. 이쯤 되자, 아이작의 속셈을 읽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추기경은 골치 아픈 듯이 아이작을 보았다.
‘백은 치료의 신앙이기도 하지만, 다른 신앙의 신수들을 길러주고 있다.’
거기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냥 신입들을 들이는 수준의 일이라,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는데.’
백의 추기경이 단순히 상대를 의심하는 단계와, 아예 상대를 확정하는 건 이야기가 너무 달랐다. 그리고 백이 이번 일로 청과 손을 잡으면 골치 아파지는데.
아니, 그보다 억울하다!
백에는 진짜 마충이 없었는데!
“그래서 백의 토템은 제 임의대로 처리했는데, 혹시 제가 실수를 했을까요?”
아이작의 간드러지는 웃음에 추기경들은 기가 찼다.
저 사기꾼 같은 소악마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