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저게 우리 대장이다 (2)
사신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을 뗄 수 없는 백금발 남자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뭐냐. 이건.’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보고 또 봐도 여기저기에 낭자한 핏자국. 아마 이를 만든 원흉은 백금발 남자겠지.
어… 그러니까 그 말은…….
‘고, 고문?!’
실제로 백금발의 남자는 이상한 도구로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중이었다.
맞는 사내는 뒷세계에서 제법 유명한 악당 지배인.
사신의 동공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뭐지? 범죄자라서 청이 붙잡은 상황인 건가……?’
아아, 그래! 그런 거야!
그래! 정의로운 청의 소가주가 극악무도한 무리의 소탕에 나선 거구나!
그래, 그런 거였…….
“아, 어디서 밑장 빼기를 하냐? 새끼들아! 뒤질래?”
“?!”
미… 밑장 빼기?
사신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더 기가 찬 말이 들려왔다.
“아, 억울합니다! 속임수는 소가주님이 치셨잖아요! 그보다 아직 패도 안 돌렸거든요?!”
“어차피 사기 칠거였잖아.”
…뭐? 뭐라고??
설마, 지금 청의 소가주가 노름을 했단 말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소가주가 타짜 짓을 했다고?!
“젠장! 청의 우두머리가 폭력에 속임수를 썼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자 백금발의 남자는 푸큭큭 웃었다.
“해라? 난 그래도 되거든? 성자가 될거라 면죄부야.”
뭐라고?!
백금발의 남자는 술병을 상대의 머리 위에 쏟았다.
꼴꼴꼴꼴!
술이 다 비워지자, 남자는 술병을 툭 던졌다. 그러곤 횃불을 들었다.
“됐으니까, 불타 죽기 싫으면 여기 있는 물건 다 내놔.”
“?!”
심지어 남자를 불태우려고 하자, 보다 못한 슈리가 언성을 높였다.
“아이작! 그만하랬지!”
그러자 아이작이 쯧 혀를 찼다.
“뭐야, 낌슈리. 왜 내 돈벌이를 방해해?”
“손님이 계시잖아!”
“손니임?”
아이작이 율리우스 국의 사신을 힐끗 보았다.
그러더니 장갑 낀 손으로 밧줄을 꺼내며 말했다.
“쟤도 같이 묶어놓을까?”
“야!!”
“목격자는 처리해야지.”
슈리는 핏대를 세웠다.
“네 손님이다! 그보다 왕국 사신께 무례한 짓 하지마!”
“왕국 사신? 오, 몸값 졸라 세겠네?”
“야!!!”
사신은 정말 저 사람이냐는 듯 슈리를 보았다. 슈리는 민망한 듯 크흠 기침을 했다.
“찾으시는 거, 저깄습니다. 저분이 청의 가주가 될 분입니다.”
음. 그래. 믿기진 않겠지만.
“손님이니 돈은 안 뜯어가실 겁니다. 아마도.”
…예? 뭐요?
* * *
저택에 돌아온 슈리는 차를 거의 냉수 마시듯이 마셨다.
“수련을 떠났다길래 철 좀 들어서 돌아오나 했더니!”
슈리는 질린다는 듯이 아이작을 보았다. 견습 졸업 때랑 비교하면 아이작은 정말로 많이 자라 있었다.
‘뭐, 그럴 만하지. 열여섯 살이 된 거니까.’
얼굴은 앳되지만, 발육이 빨라서 스치면서 보면 일순 성인으로도 보였다.
그런데 왜 내용물은 그대로지……?
“가모님은? 같이 수련 간 거 아니었어?”
멜리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이작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도망쳐서 나도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도망쳤다고?!”
슈리는 이게 뭔소리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야! 너 1품 사제가 되야 할아버지가 추기경 비전을 알려주신다고 했잖아! 나도 이제 2품사제인데 언제까지 널 기다려야…헉.”
슈리가 황급히 입을 막자 아이작은 눈썹을 치켜떴다.
“2푸움? 설마, 나 없을 때 승단 시험을 본건 아니겠지?!”
“…….”
슈리는 시선을 피했다.
아이작의 눈초리가 더욱 험악해졌다.
“이 배신자야! 나보다 위로 올라가지 말랬지!”
아이작의 욕설에 슈리는 귀를 막았다.
사실 아이작은 승단 시험에 낙방했다.
실력이 안 되어서냐고?
전혀 아니다.
중급 사제인 2품 사제는 사실 최저 성법 수준만 채우면 통과였다.
문제는 이… ‘최저 성법 수준’이라는 건데…….
“너처럼 극과 극인 놈은 난생처음 봤다…….”
그렇다.
아이작은 다른 건 다 만점이었는데 ‘치유’와 ‘신수 길들이기’, ‘찬가’ 성법에서 0점을 찍었다.
물론 백의 신앙의 주특기인 그쪽 성법은,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거긴 했다.
불안불안하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낙제라니…….
‘정녕 이것이 우리의 가주란 말인가…….’
그래. 한마디로 말하면, 남을 지키는 성법은 모두 젬병이란 의미다!
그에 비하면 고문 쪽은 어떠한가!
‘…신성제국이 생긴 이래 역대 최고 점수라니!’
뭐 이딴 놈이 다 있지?
심사위원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고문 성법은 보통 높은 점수를 받기도 힘든데.
‘그나마 정화 성법이 높아서 이단으로 안 끌려간게 다행이지!’
아니, 적의 추기경이 자기 후계가 되라며 몹시 좋아했으니 또 괜찮나?
아무튼 이런 연유로 멜리사가 아이작을 끌고 갔던 것이었다. 정작 아이작은 몹시 싫어했지만 말이다.
‘정체 들킬까 봐 뒤지는 줄 알았네.’
그래서 잠깐 같이 있다가 도망쳤다. 남은 기간 동안에는 폐관수련을 하며 마법에 올인했다.
‘이제 내 몸도 찾고, 가짜 해골왕도 찾아야 하니까.’
그렇게 올린 계위가 8계위.
해골왕 때와 비교하면 아직 낮지만, 제법 충분했다. 놈들에게 대항할 진짜 힘을 기른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없는 동안 내 노비들 훈련은? 내가 없어서 보고 싶어 미치겠다던?”
“…….”
이 새끼는 양심이 있는 건가?
지금도 훈련 이야기만 나오면 얼어붙으며 발작하는 놈들인데?
‘집에 돌아왔으니 또 신나게 굴리겠군.’
“뭐, 특이점이라면 네 3기생 노비… 아니, 3기생 사제들이 교황 성하께 원한을 품게 됐지.”
“원한? 왜?”
슈리는 기가 찬 듯했다.
이놈은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건가?
그도 그럴게 처음 들어왔던 1기생들은 아이작의 훈련에 피를 토하며 아이작을 저주했다.
-이건 사기야아앍! 속았어어!
-살려줘어어!
-차라리 신앙 선택 전으로 되돌려줘어어!
신입들은 모두 속았다며 눈물의 훈련을 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런 1기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지.
-후배들 못 끌고 오면 나한테 뒤진다?
결국 1기생들은 공포에 떨면서 2기생들을 적극 영입해왔다.
그리고 2기생들? 본인들이 속은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들은 눈을 번뜩였다.
물론 아이작 덕분에 10년 치의 수련 경지를, 1년 만에 깨닫게 된 건 좋았지만…….
-시발! 우리만 당할 것 같아?!
-죽어도 같이 죽자!
그 이후로 3기생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 3기생들도 속았다며 치를 떨면서 똑같이 영업을 하려고 했지만…….
-<공고: 청은 공평성의 원칙에 따라 신입을 받지 않는다.>
-시발! 교황!! 지가 뭔데 우리를 막아아앍!
-죽어라! 교황청에 쳐들어가서 암살해주마! 시발!
슈리는 능력은 최고지만, 흑화해버린 3기생들을 떠올리며 질색했다. 1, 2기생들도 교황을 욕했지만, 3기생들의 분노를 넘진 못했다.
“교황 성하가 완전히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에 보이면 암살하려고 난리야. 교황 성하와 관련된 물건은 다 파괴되고 있다고…….”
“풉!”
그거라면 오히려 잘된 일인가?
“역시 굴린 보람이 있구만. 나중에 교황을 처리할 때 도움이 되겠어.”
“…….”
…지금 이 새끼, 교황을 처리한다고 한 거냐?
“그 뒤로 교황의 행보는?”
“성물을 계속 달라고 하고 있지만, 잠잠해. 가만히 있는 게 좀 수상하긴 하다.”
“그래? 그럼 계속 보고 있어. 교황은 처리해야 하니까.”
그말에 슈리는 오히려 기가 차다는 듯 했다.
“그렇게 교황 성하를 싫어하면서 황태자 전하의 성인식에는 왜 불참 했냐?”
그러자 아이작은 뭔 개소리냐는 듯 보았다.
“불참이라니? 내가 왜 불참해?”
아이작에게 있어 황실은 중요한 패였다.
자신도 참여해서 황태자랑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샤블리스의 성인식이 돌아오는 5일 아냐? 그래서 날짜에 맞춰 헬라에 도착한 건데.”
“…5일인 건 맞는데, 지난 달이었다.”
“…….”
아.
급하게 편지를 보다가 착각했군.
아이작의 표정에, 슈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거야. 황태자 전하 지금 완전히 삐치셨다.”
“…삐쳐? 그걸로?”
슈리는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고 했다.
“성인식은 본래 18살에 해야 하는 건데, 샤블리스 전하는 21살에 하게 됐잖아.”
황실의 성인식은 국가의 중대사다. 그런게 왜 3년이나 미뤄졌냐고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교황이 안 해줬다죠?]
그렇다.
황실과 관련된 중요한 의식은 교황이 주관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승계식을 미뤄왔던 것처럼, 성인식도 교황이 무기약으로 미뤄버린 것이다.
‘치졸한 놈이지.’
교황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황태자라면서, 대외적으로 이미지를 망가트리고 귀족들과 제국민들을 부추켜 즉위를 막으려는 것이다.
‘교황이 밀고 있는 황위 후계자는 샤블리스가 아닌, 다른 황자 쪽이니까.’
교황이 황제를 고르는 건 아니지만, 교황의 승인이 없으면 식을 진행할 수가 없다.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과 달이 공존하는 신성제국에서는 서로의 화합이 귀족들에게, 제국민들에게 중요했다.
문제는 자꾸 한쪽이 선을 넘으려 한다는 거지.
“1년 전부터 폐하의 용태가 안 좋으시다는 소문이 있거든. 슬슬 황위 교체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거지.”
“!”
황위 교체. 이건 모든 귀족, 에슈아에게도 중대사였다.
그리고 교황과 황태자의 기 싸움이 역대 최고로 치닿은 상황에서 열린 성인식이었다.
그런데 귀족이 참석을 안 한다?
‘교황처럼 황태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지.’
그리고 거기에 아이작이 참여를 안 해버렸네?
“에슈아가 참여를 안 한 건 아니니 상관은 없는데… 황태자 전하… 꽤 오래 기다리셨다. 뭐라고 하신 건 아닌데,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아이작은 내심 미안한 듯 허허 웃었다.
그거야 화날 만하지. 황태자가 약 3,4년 동안 얼마나 아이작에게 퍼주고, 에슈아한테 잘해줬는데.
‘오해는 풀어줘야겠군.’
일단 밖에 나온 지금 문제는 자신의 육신이었다.
‘그걸 찾아야 승단 시험을 통과하는데.’
승단 시험에 그게 왜 필요하냐고?
-2품 사제가 되려면, 최저기준을 통과하시든가…아니면 미해결 임무를 해결하시죠.
미해결 임무!
제국엔 퀘스트처럼 선조들이 달성하지 못한 미해결 임무 리스트가 있었다. 그걸 달성하면 어지간한 시험은 대체가 된다.
한마디로 음서제도!
그리고 그중엔 놀랍게도 ‘해골왕의 육신 찾기’도 있었다!
‘게다가 내 육신이 있으면 가짜 해골왕도 찾을 수 있지.’
가짜 해골왕은 누군가의 개입 때문인지, 은거지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력을 더 올려 상위 추적 마법을 개방하든 해야 했다.
물론 제 육신을 가졌다는 신성드래곤은 황실과 밀접하니 황태자에게 물으면 그만이었지만…
‘황실에게도 모습을 안드러내는 중이라니 뭐.’
어쩌지? 내 육신?
‘결계에 쌓인 듯이 기척도 안 느껴지고.’
그때, 그들의 눈치를 보며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저…어.”
율리우스 사신이 나타나자, 슈리는 죄송하다는 듯 일어났다.
“기다리게 하셨군요. 오랜만에 본 반가운 가족이라,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자, 아이작. 네 손님이다.”
“뭐야. 저거 아직도 있었냐?”
저거라니……!
율리우스의 사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딴 놈을 믿어도 되나 싶지만, 그들에겐 아이작이 꼭 필요했다.
“실은 소가주님께 직접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인력 동원 문제랬나? 미안하지만, 내가 좀 바빠.”
“하지만……!”
“내가 해골왕의 육신을 찾아야 하거든. 다른 녀석들이 성심껏 도와줄 거야.”
그러자 율리우스 사신은 어째서인지 얼굴이 밝아졌다.
“바로 그겁니다!”
“뭐?”
“저희 왕국에 해골왕의 육신이 나타나서요! 마족에 드래곤에… 아주 우르르 몰려와서 난리도 아닙니다. 그리고 해골왕의 육신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에슈아, 아니 해골왕의 육신을 드시고도 멀쩡하신 소가주님뿐이라서……!”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