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양심이란 게 있습니까? (2)
에슈아 저택.
“예? 아이작이 도박을요?!”
집에 돌아온 릴라이는 입을 떡 벌렸다.
그는 델로스에서 사라진 형과 형수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엔 승단 시험에서 탈락한 아이작을 위해 ‘미해결 임무 리스트’를 살피는 중이었다.
시험 대신 다른 조건으로 승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을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것까진 좋았는데.
‘아이자악!’
성직자가 도박이라니! 이 무슨 소리냐!
그런 릴라이의 표정에, 노엘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헬라에 돌아오자마자 아주 인성이 썩은 짓을 해. 그러고도 소가주야?”
“……!”
형의 공격에 릴라이는 말문이 막혔다. 다른 부분이면 릴라이도 뭐라고 따졌겠지만, 도박은 도저히 감싸줄 수가 없다.
술, 여자, 도박은 성직자들의 최대 금기가 아닌가! 그보다 저 인간은, 치사하게 그런 것만 캐내고 다녀?
“게다가 승단 시험은 떨어졌다면서? 1품 사제가 못 되면 아버지도 추기경의 비전도 안 알려주실 텐데. 아이작 정말 괜찮은 거 맞냐? ”
“윽……!”
릴라이의 얼굴이 얼어붙을 때, 벤야민이 옆을 지나갔다. 에슈아에서도 청렴한 재정 담당의 모습에, 노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형님은 그리 생각 안 하십니까? 소가주가 도박이라니, 무슨 생각인지…….”
“닥쳐! 도박이 뭐 어때서!”
…뭐?
“걘 돈이라도 벌어오지! 니들은 최근에 돈 한 푼이라도 벌어왔냐?!”
“……!!”
벤야민은 딱 걸렸다는 듯, 노엘에게 삿대질을 하며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주변에 있는 화병을 집어 던질 기세였다.
“니들이 사교회 명목이랍시고 가져간 돈이 얼만 줄은 알아?!”
“윽……!”
“아이작은 자기 돈으로 돈을 불려서 가져오기라도 하지! 이 돈만 축내는 기생충들! 가문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
벤야민은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들을 노엘에게 집어던졌다.
“아이작이! 얼마나! 돈을! 벌어오는지는! 알고! 그래?! 니들 돈을 누가! 벌어온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컥!”
“하물며 아이작은 범죄자들이 약탈한 돈을 뜯어와서 사회에 환원해! 얼마나 예쁜지 알아?”
“아오! 집안 기물 다 깨집니…….”
“니들은 이제 돈 없어! 꺼져!”
벤야민의 불호령에 노엘은 이를 갈며 사라졌다.
노엘이 사라지자, 릴라이는 쫓아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설마 벤야민 형님이 아이작을 감싸주실 줄은 몰랐네요…….”
“나는 돈을 잘 벌어오는 놈이 예쁘다.”
“…저는 미워하신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벤야민은 쯧, 혀를 차면서 안경을 치켜세웠다.
“아이작을 잘 지켜줘라. 저놈들,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다니요?”
“아이작이 가주가 되는 꼴을 가만히 볼 놈들이 아닌데. 교황도 어째서인지 몇 년 동안 가만히 보고만 있고.”
“기우시겠… 아니, 물론 아이작이 승단 시험에 통과 못 하면 가주가 못 될 테니, 문제긴 합니다만……크윽!”
그러자 벤야민의 총명한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게 아냐. 카야가 곧 9계위가 될 것 같다더구나.”
“카야가요?!”
카야는 노엘의 딸이다. 그리고 에슈아 가문의 여자가 9계위가 된다는 건, 성녀가 탄생한다는 의미였다.
“이번 대의 성녀가 될 수도 있단 거지.”
“……!”
“레아는요?”
“아직 8계위 그대로지.”
릴라이는 끄응, 미간을 좁혔다.
에슈아에서 성녀의 존재는 의미가 남다르다.
“설마, 성녀를 앞세워서 가주 자리를 빼앗아갈 셈인 걸까요?”
“그 꿍꿍이를 모르겠다. 아무튼 아이작한테 빨리 1품 사제가 되라고 해. 아니 그 전에 2품 사제부터…….”
바로 그때였다.
“말을 내와라!”
멜리사가 옷을 입으며 급히 나오자, 아들들이 깜짝 놀랐다.
“어머니?!”
“그런 모습으로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해골왕의 육신이 나타났다고 한다.”
릴라이는 깜짝 놀랐다.
“아이작이 드디어 볼일로 배출했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소리친 벤야민은 멜리사를 바라보았다.
“해골왕의 육신이라니요?”
“이사악의 몸이 율리우스에서 나왔다더구나. 자세한 건 살펴야 알겠지만, 봉인의 여파로 흩어진 몸이겠지.”
“!”
“그게 있으면 아이작도 그 공을 인정받아 2품 사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다.”
2품 사제 시험 통과! 아이작의 성적을 알고 있는 숙부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당장 제가 가서……!”
“안 그래도 아이작에게 직접 의뢰가 들어왔는데, 교황이 출국 금지를 내렸더구나. 5대 가문 직계들은 출국 금지라고.”
“예?!”
릴라이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의뢰자인 율리우스는요? 피해를 보고 있으니 의뢰를 해온 게 아닙니까?”
“그래서 다른 5대 가문의 직계들을 아이작 대신 보낸다고 하더구나.”
벤야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옘병하네. 걔들은 뭐, 직계 아니랍니까?”
“그래서 가문의 직위를 일시적으로 반납하고 교황청의 사신으로 보낸다고 한다.”
“허, 말장난이네요.”
“아이작은 자리를 포기하면 바로 다른 놈들이 채갈 테니까, 그러지 못할 걸 아는 거지. 다른 가문에는 이미 천리마까지 내줬다는구나.”
“천리마요?!”
둘은 교황이 아주 작정을 했다며 욕을 했다.
“그래서 따지러 갈 생각이다. 감히 이사악의 육신을 다른 놈들한테 뺏길 것 같으냐.”
“아이작은요?”
“황태자궁에 갔다더구나. 어쩌면 출국 금지 때문에 갔을지도.”
“아아…….”
그들은 탄식했다.
안 그래도 성인식 이후로, 교황 때문에 성직자들에게 적대적이 된 황태자였다. 실제로 그 뒤로 성직자들에게 냉랭해졌고 말이다.
추기경들이 뭔 뇌물을 바치고 수를 써도 얼굴조차 안 보여 곤란해하던 참이었다.
아마 아이작도 황태자에게 바람을 맞겠지.
* * *
황태자궁.
부리나케 달려온 황태자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아니, 뭐지?’
‘성직자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전부 거절하라고 엄포를 두시지 않았던가?’
‘청하고도 연을 끊을 기세시더니?’
이번엔 진짜 교황청을 적으로 삼을 걸 각오 하신 줄 알았는데…….
“전… 전하?”
아이작의 서신에, 단걸음에 달려온 것 같다.
그것도 그냥 달려온 게 아니다. 너무 급해서 어딘가에 부딪친 흔적이…….
“…전하?”
황태자는 스윽 시녀들과 시종들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었다. 마치 네가 나한테 될 것 같냐는 미소다.
“전하. 성인식에 찾아뵙지 못한 건 죄송합니다.”
상황을 깨달은 황태자는 스윽 돌아섰다.
“화장실을 찾다가 길을 잃은 것뿐이다. 난 간다.”
시종들은 경악했다.
아니, 전하! 길을 잃은 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는데요?!
시종들의 동공 지진 속에서, 아이작은 능글맞게 웃었다.
“가셔도 되겠습니까? 편지 보고 오신 줄 알았는데.”
“!”
아이작의 말에, 황태자의 고개가 무섭게 돌아갔다.
아이작이 보낸 서신은 단 한 줄이었다.
-내가 해골왕인지 아닌지 알려주겠음.
황태자의 기대에 찬 눈빛에, 아이작은 풉 웃었다. 해골왕에 대한 건 그동안 황태자가 계속 궁금해했지만, 아이작은 한 번도 답을 해준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정말 알려줄 건가?”
차갑고 감정을 드러내는 법 없는 황태자의 눈이 드물게 기대에 차 있다. 마치 어른이 일생에 걸쳐 바랐던 꿈을 이루기 직전의 눈빛이다.
그러자 아이작은 그 뭔 개소리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입니까?”
“알려준다며!”
“그거야 전하를 부르려고 한 거죠. 구라예요.”
“…….”
황태자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인해 썩어들어갔다.
아이작은 풉 초승달 눈으로 웃었다.
“설마 제가 해골왕이겠음? 당연히 아니죠.”
“…사기당했어. 돌아간다.”
황태자가 허탈한 듯 돌아가려고 하자, 아이작이 어딜가냐는 듯 악마처럼 웃었다.
“가시면 저는 마도제국으로 가 버립니다?”
우이씨?
돌아가려던 황태자가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애석하게도 무시할 수가 없다.
-마도제국으로 아이작 형님을 보내주시죠.
그 거지 같은 마도제국의 황자가 아이작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아니, 그 황자만 관심을 가지면 개무시하기라도 하지.
-마도제국의 여제께서 에슈아의 소가주를 보자고 하십니다.
설마 그것들이 해골왕에 대해서 눈치챈 건가?
해골왕이 마도제국에 넘어가면 국가적 위기다. 아니, 그 전에 그 원수 놈들에게 해골왕을 보낼 것 같은가.
그런 황태자의 눈빛에, 아이작은 푸헿 웃었다.
“마도제국에 가도 됩니까아?”
그 말에 황태자가 언제 돌아가려고 했냐는 듯 스윽 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은 히죽 웃었다.
“그렇죠, 그렇죠. 황제가 되실 분이니 신하들의 말은 들어주셔야죠.”
“…….”
황녀는 놀라운 듯 아이작을 보았다.
저 오라버니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하물며 해골왕이라니?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아이작은 얄밉게 웃었다.
“자, 그럼 의뢰 내용을 들어주시죠.”
황태자는 기가 찬 듯 눈썹을 치켜떴다.
“공자는 날 이용만 하는군. 중요할 땐 오지도 않더니.”
“의뢰 내용을 들으면 관심이 생기실 텐데요. 안 들으셔도 되겠습니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성인식 날 확실히 깨달았다.
-전하께서 정녕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 어미마저 죽인 저주받은 흑발 자식이.
-!
-훨씬 더 나은 대상에게 양보하는 게,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좋을 겁니다.
-더 나은 대상이라면, 설마 3황자를 말하는 건가?
-예. 누구와 다르게 신께 인정받고,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할 분이죠.
교황의 말을 떠올리는 황태자는 이를 갈았다.
그놈의 신의 인정. 애초에 어머니를 죽인 건 성직자들의 짓이면서.
황태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청한테 호의를 베푸는 건 오늘이 마지막인 걸로 하지. 이제 공자나 청한테는 관심을 끌 것이다. 뭔 거래를 가져와도 관심 없으니…….”
“해골왕 육신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말하던 황태자가 굳었다.
“뭐…? 뭐가 나타나?”
아이작은 히죽 웃었다.
“관심 없으시이다면서요?”
“…지금 생겼다.”
“청에 관심을 끄으신다면서요??”
“…다시 가지지.”
“제가 어차피 해골왕의 육신을 가져와야 하거든요? ‘미해결 임무’를 해결하면 승단 시험을 대체할 수 있다 해서요.”
1품 사제가 돼야 할아버지한테서 가주의 비전을 전수 받을 수 있고 말이다.
“미해결 임무? 아, 신성제국 선조들이 해결 못 한 역대 미제 임무 리스트말이군.”
확실히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해골왕의 육신을 찾는 임무가.
“율리우스 국에 해골왕 육신이 나타났다네요? 그걸 가져오면 저도 승단을 할 수 있는데, 교황이 빌어먹게도 출국 금지를 해버렸네요? 치사하죠? 그걸 제가 얻으면 전하께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에, 아이구. 나가질 못하네! 아이구! 다른 놈들이 가져가면 전하는 보지도 못할 텐데. 아이구!”
“황실의 특사로… 임명해주지.”
그 말에 시녀장은 깜짝 놀랐다.
그냥 사절도 아니고 황실의 특사면, 파견되는 동안 신성제국 황실과 버금가는 대리권을 가지게 된다!
황실 소유의 기관이나 물건, 군대까지도 특사가 다룰 수 있었다. 물론 허용된 범위가 있지만, 어지간한 왕국 하나는 꿀꺽하고 올 수도 있다. 심지어는 교황의 명령도 무시하는 게 가능하다.
“부황께서 내게 일정 부분 권한을 위임하셨으니, 내가 임명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황제 대리에 가깝다. 공자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을 테지.”
“!”
황제 대리라니!
…아니, 그러셔도 됩니까?!
“그러니 꼭 가져와라.”
전하!
시녀장과 시종들은 당황한 듯 황태자를 보았지만, 아이작은 푸흐흐 웃었다.
‘성인식 때의 일로 마음 고생이 심했던 모양인데. 걱정 마라. 이 형이 널 황제 자리에 앉혀주마.’
보아하니 교황은 다른 황자를 황위에 올려, 성자도 에슈아가 아닌 금의 핏줄로 올릴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그 계획부터 박살 내주지.
“참, 그리고-”
시종들은 움찔했다.
아니, 그만해!
뭔지는 몰라도 이제 그만!
“제가 천리마도 필요한데.”
“천리마?”
“네. 다른 애들은 교황한테 천리마도 받고 먼저 율리우스에 갈 텐데.”
“황실에 천리마 같은 건 없다.”
젠장. 역시 그것까지는 무리였나?
“더 좋은 게 있거든.”
그 답에 아이작은 푸헿헿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