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해골왕의 육신 (2)
아이작의 조소에 흑천사는 참을 수 없는 수치를 느꼈다.
‘이 에슈아의 사제 놈이?’
소가주라고 해봐야 아직 16살 정도.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감히 자신을 놀려?
하지만 눈을 보면 싸구려 도발이 아니었다. 이놈은 진짜로 자신에게 <흡혈> 마법을 써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설마 내가 왕궁 내에서 <흡혈>을 못 쓸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그 순간 흑천사는 아차 싶었다.
그의 시선이 힐끗 레아에게 돌아갔다.
‘설마 성녀를 믿는 건가?’
실제로 레아의 청안이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손은 검 손잡이에 살짝 얹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흑천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직 어떤 발검 자세조차 취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자신이 아이작을 공격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저 검이 뽑혀 자신의 목을 날려버릴 것임을.
성녀의 검술 실력은, 성법을 빼고 검술만 놓고 봐도 검성급이라고 들었다.
‘그래, 성녀를 적으로 돌리면 골치 아프지.’
그 사실을 잘 아는 흑천사는 일단 참았다. 대신 아이작을 말로 협박했다.
“어린 사제여. 지금 내가 이곳의 사람들을 죽여도 무방하단 건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궁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이미 <흡혈>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눈으로 본 사람들이었다.
“파리스! 네가 하필 신성제국 사람을 데려오는 바람에!”
“형님!”
“무슨 꼴을 보려고 마법사들의 원수들을 데려와, 데려오기는!”
“그것도 하필 에슈아로!”
“그래, 왕실의 연줄로 데려올 거면 차라리 그 유명한 키나 베리트를 데려오든가! 교황의 가문이 든든하지!”
“말조심해 주십시오, 형님, 누님! 황실의 특사로 와주신 분들께 무슨 무례한 말씀이십니까! 왕국의 수치입니다!”
4왕자 파리스는 아이작 일행에게 굉장히 죄송스러워했지만, 정작 아이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안쓰럽다는 듯, 이해가 안간다는 듯 흑천사를 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허세를 부려놨으면 그깟 <흡혈>가지고, 애새끼들이 저리도 지랄이야?”
슈리는 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이자악!’
지랄이라니!
아니, 청이 무시당했으니 이럴 땐 아이작의 지랄 맞은 말투가 내심 속은 시원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상위 마법사라고!’
“애들을 찌질하게 겁에 질리게나 하고. 너는 좀 쳐맞아야겠다.”
‘아이자악! 너 정말 대책은 있는 거 맞지?!’
해골왕의 <흡혈> 마법이면 추기경들도 손쓰기 어려워하는 마법이라고! 아니, 일단 한번 발동하면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저 마법사가 빡쳐서 <흡혈>을 쓰기라도 하면…….
하지만 정작 흑천사는 아이작의 태도에 마법을 쓰지도 못했다.
‘뭐지?’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해골왕을 상대할 수 있는 에슈아라서? 그래서 해골왕의 상징인 흡혈도 안 두려운 거야?
겁에 질려 있던 왕궁 사람들도 침을 꼴깍 삼키며 아이작을 볼 수밖에 없었다.
<흡혈>의 공포와 절망을 이미 실감한 그들이었기에, 그만 말실수를 해버리긴 했지만…….
‘…에슈아, 최근 들리는 소문으로는 많이 바뀌었단 말이 있었지.’
‘비전이 되살아났단 소문은 들었다만… 그게 그 정도인가?’
그들은 희망을 품듯 아이작을 보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괜히 기대 말자.’
청을 존경하기는 하나, 그래도였다.
‘해골왕은 지나치게 강하다.’
일개 마족도 아니고, 해골왕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마족이었다. 괜히 수백 년 동안 인계(人界)를 지배한 절대적인 마왕이 아니다.
‘인간의 벽을 넘은 성녀들조차 당해내지 못한 상대가 아닌가.’
그나마 교황이 신의 힘으로 억제가 가능할 텐데.
그들은 폭주한 마법사가 아이작을 죽일까 새하얗게 질렸지만-
‘후, 그래 진정하자. 이건 이놈의 계략이다.’
흑천사는 오히려 경계하듯 아이작을 보았다.
‘이 나를 도발하다니. 설마 일부러 다쳐서 교황이라도 수면 위로 끌어낼 생각인가?!’
교황이 나서면 사제들과 마법사들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보아하니 교황청의 사신들이 올 때까지 몸져누워 있을 생각인가 본데. 그 수법엔 안 넘어간다!”
아이작은 뭔 바퀴벌레 기어가는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웬 교황청의 사신?’
어차피 걔들은 이제 율리우스에 못 오는데?
‘내 노비들이 벗겨 먹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아이작의 명을 받은 노비들이 신나서 햘짝햘짝 검을 핥으며 놈들을 벗겨내고 있을 터. 그런 만큼 아이작은 개소리 말라는 듯 귀를 후볐다.
“됐으니까, 흡혈 써 보라니까?”
하지만 흑천사는 크하하 웃었다.
“대단하군, 인정하마. 넌 지략가다. 꼬맹이. 참으로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군.”
아니. 그거 아니라니까?
“애초에 너희로는 무리다. 그분의 육신은 오직 나만 가져갈 수 있으니.”
이 새끼, 뭔데 자신만만해?
‘내 몸이 어디에 있길래?’
그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곧 파리스 왕자가 안내한 곳으로 간 아이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골왕의 육신이 저기에 있다고?”
“예…….”
아이작은 눈앞에 있는 ‘장소’를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레아와 슈리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파리스 왕자가 안내한 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9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공주였기 때문이다.
슈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서, 설마 해골왕의 육신이 공주님의 몸에 있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셀레네.”
파리스의 부름에, 낯을 많이 가리는 듯한 공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젖히며 등을 보여주었다.
시녀가 드레스를 살짝 내려주자, 모두가 큭 신음을 흘렸다. 끔찍한 광경과 함께 사악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등에는 검은 오라를 풍기는 돌덩어리 같은 것이 반쯤 박혀 있었다.
‘이게 해골왕의 육신?’
‘엄청난 마력이다!’
“오라버니와 인근 산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빛과 함께 마치 운석이 날아온 것처럼…….”
돌덩어리가 살과 뒤엉켜 있는 모습에 레아도 슈리도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거의 저주를 뿜어내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아닌가.
멀리 있는 시녀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무슨 흉측한 모습이야. 저런 게 박히고도 멀쩡하다니.”
“기분 나빠…….”
공주는 시녀들의 눈빛이 익숙한 듯 고개를 숙였다.
아이작은 가장 먼저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네?”
“아프지 않으시냐고요.”
“앗… 네? 네네!’
마치 그런 말은 아이작에게 처음 들어본 듯, 화들짝 놀라던 공주는 살짝 울먹였다.
“그… 아프진 않은데…….”
공주는 눈치를 보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보니 공주의 방이라고 하기엔 물건도, 화분도 없이 너무 텅 비었다.
“여기서 나오는 마력 때문에 주변이 다 썩어가서…….”
“흠, 내버려 두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겠군.”
“…아이작!”
어떻게 저리 흉측한 걸 보고도 그리 침착할 수 있냐는 놀란 반응이었지만, 정작 아이작은 흥미롭다는 듯 공주의 등을 살폈다.
위스퍼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주주주주주인님! 주인님의 뼛조각이 맞는 것 같은데요?!]
그래. 크기는 작지만 확실히 해골왕의 뼛조각이다.
물론 뼈가 그냥 그대로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마석 같은 돌 안에 든 상태였다. 마치 호박 안에 모기가 갇혀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다.
‘봉인되어 있는 물건이니, 인간이 죽지 않고 멀쩡했지.’
운이 좋다면 좋았다.
‘부위는… 마석 색이 진해서 육안으로는 아직 판단이 안 되는군.’
확실한 건 예전에 먹은 손가락 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마력의 농도가 짙다는 점이다.
‘마력핵과 가까운 부위인가?’
그 생각에 미친 아이작은 내심 푸흐크흑,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반신반의 했는데. 이거면 상상도 못 한 힘이 들어온다!’
동시에 다른 놈들이 지금까지 저걸 채가지 못한 이유도 알 거 같았다.
‘공주 등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군.’
[빼내는 순간, 저 공주는 죽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등에 박혀 있지만, 이미 심장하고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저만한 게 자연적으로 박혔을 리도 없고. 어떤 새끼의 짓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칫, 평범한 뼈다귀 상태였으면 그냥 먹튀하면 그만인데.’
[주인님한테는 분리 작업쯤이야 식은 죽 먹기잖습니까.]
너, 그게 얼마나 세밀한 작업인 줄 아냐? 공주 안 다치게 하면서 빼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에휴, 쓸데없는 자선사업을 하게 됐군.’
그때, 말이 없는 아이작이 당황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흑천사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봐라, 사제들이 이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나?”
“……!”
“사제들은 마를 배척하고 소멸시키는 것밖에 못 하지. 저걸 빼내는 순간 공주는 죽는다. 내 말이 틀리나? 설령 교황이나, 5대 신앙의 수장이라 불리는 추기경들이 와도 공주는 살릴 수 없어.”
“…큭!”
정답이라서 슈리와 레아조차도 말문이 막혔다. 아니, 사실 사제들뿐이 아니라 마법사들조차 뾰족한 수를 쓸 수 없을 것이다.
‘해골왕의 육신을 봉인한 마석이 의지를 가지고 있어.’
‘마석이 공주한테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저걸 빼내든가 소멸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공주가 죽을 것이고.
흑천사는 파리스 왕자를 보며 큭큭 웃었다.
“4왕자님이 헛수고를 하셨군요. 도움도 안 되는 사제들이나 불러오고. 역시 성직자들은 물러나게 하고 제게 맡기시죠.”
흑천사는 몹시 경계하는 눈으로 아이작을 보았다.
‘저놈들이 공주의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잘못하면 자신의 계획이 들킬 수도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행동은 하나였다.
“사제 놈들은 막말로 업적 쌓기에 미친 놈들입니다! 명성에 미친 놈들이니까요! 해골왕 육신 정도면 엄청난 공이 될 테니, 공주님의 목숨은 신경도 안 쓰고 물건만 빼 가겠죠!”
“…뭐야?!”
“애초에 부탁하는 상대가 에슈아? 해골왕도 못 잡는 이들한테, 해골왕의 육신을 맡깁니까? 생기 다 빨려서 죽지나 않음 다행이지.”
슈리가 눈을 부릅떴다.
“닥쳐, 아이작은 해골왕의 육신을 처먹… 아니, 손을 대고도 멀쩡했거든?”
아이작은 슬쩍 슈리를 째려보았다.
이 새끼, 방금 처먹었다고 하려고 했지?
“아무튼, 공주님을 구할 수 있는 건 8계위 마법사인 이 몸뿐이니 내가…….”
“내 동생한테 손대지 마시오!”
“!”
파리스 왕자가 역겹다는 듯 흑천사를 밀어냈다.
“나는 아이작 님을 믿습니다. 적어도 <흡혈>로 위협하는 어느 누구보단 천만 배 믿을 수 있는 분이시고요.”
“왕자님……!”
“아이작 님은 젖먹이 시절, 성녀 보물고에 있을 때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함정으로부터 모두를 지켜주신 분입니다! 동생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녀 보물고 이야기에 슈리는 으으윽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아이작은 푸헤헤헿 웃었다.
왕자의 거부에 흑천사는 수치스러운 듯 이를 악물었다.
“예, 그럼 잘나신 대로 어디 해 보시죠! 공주님이 죽는 꼴을 봐야… 아니, 해골왕의 기운에 왕국이 망하는 꼴을 봐야 본인 선택이 틀렸음을 아시겠군요!”
“파리스……!”
“너, 어쩌자고!”
왕궁 사람들의 걱정 어린 탄식에 아이작은 푸흡 웃었다.
“뭐, 걱정 마시죠.”
아이작이 공주에게 다가갔다. 그 광경에 흑천사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마왕의 마력에 저 백금발 애송이가 뒈지든, 마석이 뽑혀 공주가 죽든, 둘 중 하나다.’
공주가 죽어도 국가적 문제로 번지겠지.
‘어느 쪽이든 내게는 이득…….’
그런데.
아이작이 공주의 등에 손을 얹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