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신성드래곤 (2)
“아, 귀찮아 죽겠네. 왜 이딴 걸 입어야 하는 거야?”
아이작은 투덜거리며 손을 들고 있었다. 그는 예복으로 환복 중이었다. 시녀는 능숙하게 아이작에게 옷을 입혀주고 있었다. 평소에는 결코 볼 수 없는 화려하고 비싼 옷이었다.
성직자 가문인 터라 평소에는 옷을 검소하게 입는 편이지만, 그들은 공작가였다.
“황제 폐하의 생신이시다. 귀족들의 파티니까 얕보이는 건 안 되지.”
마찬가지로 예복으로 환복한 슈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그런데 너, 화려한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좋아하지. 겁나게 좋아하는데, 보석이 주렁주렁 안 달려서 싫은 거지!
“베리트는 옷에 보석이 주렁주렁하잖아앍! 망할 청! 왜 예복마저도 심플한 거야! 왜 보석 주렁주렁이 아닌 거야! 아이고오, 베리트가 부러워 죽겠네에에! 아이고오오!”
이 새끼는 교황가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그 보석 주렁주렁보다 비싼 옷이다, 새끼야…….”
거기에 들어간 옷감과 실과 장신구가 얼마짜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보다 이미 충분히 보석 주렁주렁인데, 얼마나 주렁주렁을 바라는 거야?
“견습 졸업 때 내가 두른 보석만큼!”
…이 미친놈아! 그건 졸부잖아!
비웃음당할 일 있냐!
“그보다 네가 어쩐 일로 연회에 참여하냐?”
아이작은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귀족들의 연회에 참여한 적이 없다. 전부 슈리에게 맡기고 본인은 노비들과 본인의 훈련에 전념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큭 웃었다.
왜긴 왜야.
황녀가 말한 것 때문이지.
-드리고 싶은 물건 중 하나는 폐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건 드래곤을 찾기 전에 먼저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자리를 마련해드릴 테니, 폐하의 생신에 참여해주세요.
아아아,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안 갔어.
황제가 생신날 선물을 주시겠다고 했으니 가 드려야지. 게다가 마침 황제에게는 신성드래곤 건으로 볼일이 있었고 말이다.
뭐, 목적이 황제인 만큼, 파티에는 진지하게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멜리사 성녀가 있어서죠?]
그뿐이 아냐. 아이작은 방 한구석에 가득 쌓인 서신에 한숨을 쉬었다. 아주 탑을 쌓다 못해, 천장을 뚫을 기세의 어마무시한 서신이었다.
저 광적인 서신의 발신인이 누구냐고?
-에슈아, 너와 훈련이 하고 싶다.
-에슈아, 잠깐 얼굴 좀 보자.
-에슈아, 잘 지내고 있나? 훈련 중에 네 생각이 나서 보냈다.
-에슈아, 너와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
-에슈아, 오늘은 내가 9계위 성법 해골왕 파괴술을 익혔다.
-에슈아, 좋은 보석이 들어왔다.
-에슈아, 답장 좀.
-답장 좀.
-답장 좀! 제발!
키나 베리트였다.
견습 끝나고 훈련을 한답시고 잠적 좀 했더니, 저 지랄을 해 놨다.
‘용건이 있으면 한꺼번에 보내라고. 한 줄짜리면서 금 종이가 아깝다.’
아무튼 견습이 끝나고 한 번도 얼굴 본 적이 없는데, 저거 저 새끼, 귀찮아서 어떻게 얼굴을 봐.
어디 그뿐인가? 키나의 광적인 서신 옆에는 역시나 또 초대장이 한가득 있었다. 저건 전부 차남 벤야민이 보낸 것이었다.
정확히는 귀족들이 보내온 것들이었지만.
-황제 폐하의 생신은 귀족들의 사교의 장이다! 네가 참석한다는 말에 귀족들이 난리가 났으니, 전부 읽어봐라! 사진도 첨부해놨으니 내용과 안면 모두 익혀놔라!
벤야민이 보낸 편지에 아이작은 하늘을 보았다. 이거, 파티장에 가면 사업계획서를 든 벤야민한테 공무로 끌려다니게 생겼다.
결국 아이작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부르르 저었다.
‘어으으. 황제만 만나고 바로 토껴야지.’
[소가주가 가능할까요?]
“흥, 대충 참여하는 척하다가, 중간에 도망치면 그만…….”
“아이작. 이번엔 도망 못 친다.”
뜻밖의 목소리에 아이작은 깜짝 놀랐다.
“할부지!”
청의 가주 일라이가 아이작을 찾아왔다. 일라이는 도망가려는 아이작에게 선전포고를 하듯 말했다.
“황태자의 성인식 때도 참석을 안 하지 않았느냐. 오늘은 내 옆에 있어라.”
할아버지의 명령에 아이작은 쟤 왜 저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아름다운 예복을 입은 레아가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할아버지 삐치셨어.”
“삐쳐?”
“몇 년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얼굴도 안 보고 바로 율리우스로 갔다고.”
아앙?
그 말이 맞긴 맞는 듯, 일라이가 눈을 번득였다.
“어디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이작은 안 됩니다.”
문을 벌컥 열고 숙부 벤야민이 나타났다.
그는 깐깐한 비서처럼 안경을 바짝 끌어 올리면서 눈을 번득였다.
“아이작은 오늘 저와 같이 귀족들을 만나며 사업 회의를 해야 합니다.”
일라이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는 네가 해결하면 되잖아?”
“아이작이 있어야 하는 안건입니다.”
“그럼 나와 함께 가면 된다.”
“아버지는 추기경이니, 교황 옆에 있어야죠.”
“그럼 걔들이 오라고 해.”
“교황 놈 옆에서 에슈아의 사업 회의를 하시겠다고요?”
“내 손자다.”
“우리 소가주입니다.”
둘의 싸움에, 아이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둘 다 싫어요. 뭘로 꼬셔도 안 가…….”
“다이아몬드 100캐럿!”
엉?
벤야민의 외침에 아이작의 눈이 돌아갔다. 뒤이어 아이작의 고개도 휙 돌아가자, 벤야민이 안경을 번쩍이며 말했다.
“따라오면 다이아몬드 100캐럿이랑, 황금 100돈을 주마.”
일라이는 빡친 듯 아들을 노려보았다.
“재정 담당이라고 특기를 쓰는 거냐?”
“불만이시면 아버지도 하시든가요.”
“청이란 놈이 천박하게… 쯧. 아이작, 청의 사람이 저런 것에 넘어가면 안 된다.”
아이작은 다시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칫, 역시 할부지. 쓸데없이 잔소리…….’
“품위 없게 100캐럿이 뭐냐? 200캐럿!”
엉?
가주의 외침에, 벤야민도 지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300캐럿! ”
일라이는 그리 나오는 거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아끼는 보물을 주마. 여태까지 여행하며 모은 보물이다.”
“그럼 나는 보물고 열쇠를 주마.”
저 자식이?
“금고 열쇠 추가!”
“청이 관리하는 업장 지급!”
점점 경매하듯 올라가는 조건들에 슈리는 이마를 짚었고, 아이작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시발. 이거 개좋은데?
하지만 그걸로는 좀 약한데.
아이작은 볼멘 목소리로 입을 삐죽였다.
“할부지. 쑥부님. 아이작은 이제 부동산… 땅 주인이 좋아요.”
반응은 바로 왔다. 먼저 외친 건 가주였다.
“수도에 네 땅을 사 주마.”
벤야민 또한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 저택의 소유권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마.”
“벤! 선 넘지 마라!”
“아버지야말로 재정 담당 무시하고 물건 막 지르지 마십쇼! 수도 땅값이 얼만 줄은 아십니까?”
“가주가 어디에 뭘 쓰든 뭔 상관이야! 추방되고 싶냐!”
“제가 없으면 청은 3년 안에 망할걸요!”
으르렁대는 둘의 실랑이에, 위스퍼가 물었다.
[그래서 주인님은 어느 걸 받으실 겁니까?]
‘둘 다.’
[예? 그게 가능합니까?]
대답 대신, 아이작은 씨익 웃었다.
* * *
“아이작….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연회장에 도착한 슈리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슈리의 앞에는, 그러니까 아이작이 셋 있었다.
“자, 이러면 할아버지랑 숙부님한테 보내서 다 챙겨올 수 있겠지?”
아이작의 뻔뻔한 얼굴에, 슈리는 핏대를 세웠다.
“너 지금 신성드래곤한테 폴리모프를 시킨 거냐!”
그랬다.
아이작은 잡아둔 신성드래곤의 반룡을 시켜서 변신을 시킨 것이었다. 교황청에 나타난 그 드래곤 말이다.
심지어 한 명은 신성드래곤이 만든 분신체였다. 아이작은 드래곤의 능력이 아주 쓸 만하다며 사악하게 웃었다.
“이렇게 하면 나는 놀면서 일 시킬 수 있지. 큭큭.”
아이작한테 멱살이 잡혀서 마법을 쓴 신성드래곤은 괴로워했다.
그 뒤로 아이작에게 붙잡혀있던 반룡 드래곤은 아이작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수장께서 주신 일족의 증표 목걸이를 뺏겨서 어쩔 수 없었다.
“아아…. 성스러운 능력을 이딴 일에…. 수장님한테 들키면 끝장이다.”
“야. 뭘 구시렁대? 시키는 대로 안 해? 목걸이 확 황실에 줘버린다?”
“아악! 제발 그것만큼은!”
아이작은 큭 웃었다.
‘뭐, 이놈은 반룡이라 황실의 계약 대상은 아니지만, 이용 가치가 있지.’
바로 신성드래곤 수장과 약속을 잡는 데 성공을 한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오늘이었다.
“야. 니들 수장 정말 오늘 약속 장소로 오기로 한 거 맞지?”
“그래. 단, 말했던 대로…….”
“아 그래그래. 수도가 아니라 교외에서 보자는 거? 오케이.”
거참 어지간히도 헬라에 들어오기 싫어하네.
하지만 아이작에겐 오히려 잘된 셈이었다.
‘내 몸을 신성제국 내부에서 빼앗아 봐라. 또라이 에슈아들이 또 그걸로 영혼을 추적하네, 어쩌네. 난리를 칠 거다.’
어떤 부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걸 또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번엔 제국 밖에서 몰래 흡수해야지.
그러나 반룡은 못마땅한 듯 아이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수장께서는 왜 이런 놈과 만나시려는 거지?’
신성드래곤 수장은 황실도 혐오했지만, 성직자들도 혐오했다. 아무리 목걸이를 뺏겼다지만, 인간과의 만남을 수락한 것 자체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 성미라면 인간 따위, 죽여버리고 빼앗아오라 하셨을 텐데.
‘아이작 에슈아한테 관심이 있으신가?’
그리고 그런 반룡의 시선에 아이작은 큭큭 웃었다.
‘어떻게든 황실을 피하려는 게 보이지만, 소용없다. 이놈들아.’
그는 오늘 황제와 만나서 선물을 받고, 연회장에 있는 샤블리스를 은밀히 약속 장소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계약자니까, 일단 만나게 하면 쉽게 제압하겠지?
‘그러니 오늘이 니들 제삿날이다. 흐흐흐.’
약속 시간 전까지 열심히 부려먹을 만큼 부려주마.
뭐, 그런 만큼 지금은 황제를 만나서 선물을 받는 게 먼저지만 말이다.
‘도대체 뭐지. 돈도 아닌데 내가 좋아할 만한 거라는 게.’
바로 그때였다.
“아이작 에슈아 님이 오셨습니다!”
아이작의 이름이 연회장에 울려 퍼진 순간, 귀족들의 눈이 바로 쏠렸다.
“세상에, 몇 년간 소식이 없더니… 저렇게 장성하셨네요.”
“누구야? 저주받아서 괴물이 되어 은둔했다는 소릴 한 게?”
“전에는 너무 어려서 교황 후보하고는 안 어울렸는데, 이제 키나하고 비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16살이지? 슬슬 혼처를 받지 않을까?”
그러나 귀족들의 감탄과 달리, 교황파인 귀족들은 아이작을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금가보다 더 금가 같은, 초대 교황의 재림을 보는 듯한 모습이 아닌가. 심지어 최근엔 3황자를 물먹인 일까지.
아이작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귀족파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호를 보냈다.
‘계획대로 해라.’
사실 오늘 이 자리는 아이작의 사교계 데뷔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단합해서 아이작의 존재를 대놓고 무시하려고 했다.
이왕 이리된 거, 연회장에서 유령 취급을 해서 존재를 아예 묻어버려야지.
‘그래, 철저하게 없는 사람 취급…….’
그렇게 귀족들이 아이작을 무시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에슈아아!”
“?!”
회장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귀족들은 화들짝 놀랐다. 특히 귀족파들이 당황한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크게 외친 건, 다름 아닌…….
‘키나 공자?!’
가뜩이나 눈에 띄는 교황의 손자가 씩씩거리며 아이작에게 다가갔다. 귀족파들은 멘붕이 올 수밖에 없다.
‘아니, 키나니이임! 지금 거기 가시면 안 돼요!’
‘키나 님이 가시면 저희가 무시를 할 수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키나는 아이작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그사이 키가 훌쩍 큰 키나는 이미 추기경의 자격을 얻은 듯, 추기경의 문양이 새겨진 영대를 한쪽에 걸치고 있었다.
“에슈아!”
한숨 쉬는 아이작은 똥 씹은 얼굴로 힐끗 보았다.
“아. 어. 너냐? 오랜만이다.”
귀족들은 멘붕에 빠졌다.
‘심지어 키나 님, 에슈아한테 개무시당하고 있어……!’
그러나 키나는 다른 의미로 화가 난 듯했다.
“오랜만이다아아?”
키나는 기가 찬 듯 뒷목을 잡다가 눈을 부릅떴다.
“너!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엉? 뭐가?”
“어떻게 내 서신에 하나도 답을 안 할 수 있어???”
“아. 깜빡함.”
“깜빠아아악? 그런 놈이 황태자하고는 꼬박꼬박 답신을 하고???”
…이 새끼, 나 스토킹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