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신성드래곤 (3)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이 키나를 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이 새끼는 몇 년 만에 얼굴을 보고 한다는 말이, 지가 스토킹을 했다고 자백하는 거여?
기가 찼지만 뭐,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교황가니까.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겠지.’
귀족파인 교황가가 가장 큰 적인 황실의 동향을 살피지 않을 리 없었다.
황실로 흘러가는 자본, 군사의 움직임, 하물며 황실로 가는 귀족들의 사소한 서신의 움직임까지. 전부 교황청이 긴밀하게 관찰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물며 황태자면 뭐, 말 다 했지.’
현재 교황청이 가장 경계하는 게 샤블리스였으니까 말이다.
[샤블리스가 황권을 잡으면 교황청이 쑥대밭이 되니까 그런 거죠?]
그래. 교황파인 키나가 눈을 부릅뜨고 아이작을 닦달하는 것도 이해했다. 5대 공작가인 에슈아가 황실과 손을 잡는 건 줄 알고 발작하는 거겠지.
그랬기에 아이작은 키나가 원할 답을 해주었다.
“뭔가 오해를 하나 본데. 에슈아하고는 전혀 연관 없는 서신이야. 그냥 사적인 서신이었어.”
하지만 그 말에 키나는 표정은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사적?? 황태자랑 사저어억???”
뭐여. 왜 더 화를 내는 건데?
그러나 키나는 분노하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차라리 에슈아의 공문이었으면 이해라도 하지!
‘내 서신은 그렇게 씹어놓고? 황태자한테는 개인 답장을 한다고??’
인격적으로 무시당한 기분이 이런 건가? 차라리 공문서라면 답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지. 이건 뭐……!
‘내가 황태자보다 못하다는 건가?’
그래도 아이작이랑은 어느 정도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식한테 자신은 답장할 가치도 없는 존재였던 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모멸감과 굴욕감, 서운함에 키나는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놈을 뭘로 꼬신 거냐!’
에슈아는 절대 어떤 세력과도 손잡지 않았다. 늘 고고하게 사명을 다할 뿐 교황파도, 황제파도 아니다.
에슈아는 설령 가세가 기울지언정 누군가에게 아부하거나 권력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명예와 고집, 자존심만큼은 이 나라… 아니, 대륙 제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에슈아의 인정은 귀족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런데 검은 머리 황태자 주제에, 왜 자신도 받아보지 못한 인정을 받는 거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가.’
키나는 못마땅한 듯이 아이작을 보았다.
“3황자 이야기는 들었다. 너 무슨 생각이야? 왜 황태자 편을 들어?”
그 말에 아이작은 기가 찼다. 보아하니 3황자가 자신한테 얻어터진 걸로 그새 쪼르르 교황을 찾아간 모양인데.
“너 진심으로 그 팔푼이가 황제감이라고 생각하냐?”
그 폭언에 흠칫 놀란 키나가 주변을 힐끗 보다가, 아이작을 인적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미쳤냐는 듯 아이작에게 말했다.
“너, 여기에 있는 귀족의 6할, 아니 7할이 3황자 편인 거 몰라?”
키나는 아이작이 공격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아이작은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뭐라는 거야? 황태자 책봉이 안 된 상황이면 몰라도, 황태자가 있는 상황에서 3황자 편을 드는 쪽이 반역인 거 모르냐? 걔가 황제가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샤블리스는 어차피 황제가 못 돼.”
뭐, 신성드래곤을 소환 못 하는 상황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럼 진짜 그 3황자 반푼이를 황제로 올릴 거라고? 제정신이야?”
아이작은 딱 한 번 3황자 루카스를 봤을 뿐이지만, 단번에 알았다.
어딜 봐도 황제감이 아니다. 속국과 동맹국, 다른 제국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쪽팔릴 정도다.
그러나 키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도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냐. 하지만 샤블리스보단 나아. 그냥 차악을 고르는 거지.”
“!”
“귀족들은 어차피 완벽한 지도자 따위 기대도 안 해. 황제는 어차피 얼굴일 뿐이고, 나라를 운영하는 건 그 수하들과 교황이니까. 오히려 무능할수록 좋지. 편하거든.”
아이고오, 이거 내가 손 안 써도 이 나라 망하겠네! 아이고오, 이거 어쩌… 아니지. 이거, 좋은 거 아닌가??
‘알아서 이 나라를 없애준다는데?’
그럼 그냥 자신도 탱자탱자 놀고먹으면 그만 아닌가?
아이작은 순간 갈등에 빠졌지만, 고개를 저었다.
‘3황자가 황위에 올라봤자 에슈아가 손해 볼 뿐이다.’
오히려 샤블리스가 황제가 돼야 교황청과 교황을 찍어 누르지.
곧 키나가 걱정하듯 말했다.
“아무튼 에슈아, 네가 왜 샤블리스를 지지하는 지는 알겠어. 3황자가 에슈아를 찍어 누르려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내가 해결해줄 테니…….”
“아니? 난 개인적으로 황태자를 선호하는 거라.”
해골왕 빠돌이라는 치트키가 흔한 줄 아냐? 정체를 밝히지 않은 지금도 그리 퍼 주는데, 정체라도 밝히면 아주 나라를 넘겨주겠네.
그러나 그 말에 키나는 입을 떠억 벌렸다.
시바, 이것도 아냐??
심지어 개인적이라니. 도대체 그 싸가지 없는 황태자의 뭘 보고……!
동시에 그는 뭔가 눈치챈 듯 화들짝 놀랐다.
‘설마 황녀인가? 설마 혼담을 염두하고?? 매형이 될 상대니까?’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황태자의 편을 들 리가 없지! 보통 황녀는 공작가나 다른 황가에 혼담을 넣으니까.
그리고 에슈아의 차기 공작이 상대라면, 황제한테도 완벽하지.
‘안 돼, 이 혼담은 막아야 한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키나는 필사적으로 아이작을 붙잡았다.
“아무튼 에슈아, 에슈아의 처우는 내가 봐줄 테니, 내 말 들어라! 너한테도 안 좋으니까 샤블리스한테는 손 떼. 오늘만 해도…….”
“오늘?”
바로 그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황제의 등장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아이작이 푸흐흐, 초승달 눈으로 웃었다.
‘드디어 오셨군!’
내 선물을 주실 사랑스러운 보물 보따리!
아이작은 키나를 귀찮다는 듯 뿌리쳤다.
“아오, 넌 좀 꺼져봐. 난 폐하한테 귀한 걸 받기로 했거든.”
귀한 거? 역시 혼담이야?! 그런 거야?
키나가 동공 지진을 일으킬 때, 황제와 교황이 마주했다.
교황의 뒤를 따르는 추기경들이 많았다.
“생신을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건강이 회복되셔서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전부 교황의 기도 덕분이지.”
황제와 교황이 웃으며 마주했지만, 그 공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무겁다.
공기에서 번개마저 튀기는 것 같은 살벌한 ㄱ분위기가 이어졌다. 곁에 있는 가신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각자 신성제국의 ‘태양’과 ‘달’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같은 하늘에 존재하지만, 결코 함께하는 걸 볼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말대로, 둘의 사이는 몹시 안 좋아보였다. 아니, 사실 한자리에 함께하는 것조차 역겨워하는 기색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언짢은 듯 교황에게 말했다.
“황태자의 황위 계승에 대해 거절했다 들었소.”
거의 조소에 가까웠다. 감히 황제의 칙명까지 무시할 것이냐는 미소.
그 미소에 어린 살의에, 귀족들은 곧 목이 잘려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떨었지만, 교황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미소를 지을 뿐.
“예. 샤블리스 전하는 당연히 자격이 안 되시니까요.”
“이미 정해진 황태자에게 자격을 논하나?”
“예. 그게 신의 뜻이며, 그 뜻을 전하는 게 제 일이기도 합니다.”
황제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 갔다.
황제와 계약한 신성드래곤이 죽은 이후, 그 역할은 어린 샤블리스에게 넘어갔다. 아무리 황실이 신성드래곤을 소환하지 못하는 것으로 교황청에게 책이 잡혀있다지만, 보자 보자 하니까 교황이 선을 넘어도 너무 넘는다.
황제는 굳이 말을 돌려서 할 생각도 없었다.
“그대는 지금 교황의 힘이 황제보다 더 우위라고 보는 것인가? ‘달’이 정녕 ‘태양’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닙니다만. 폐하.”
교황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래 ‘태양’은 낮을, ‘달’은 밤을 지배하는 법이죠.”
“……?”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 말을 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보낼 때, 곧 웃음을 띤 교황의 입꼬리가 조소를 머금었다.
“폐하. 낮보다 밤이 훨씬 긴 법이랍니다.”
“……!!”
듣던 추기경들도 드물게 흠칫 놀랐다.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눈치챈 황제의 눈이 번득였다.
이놈이?
정녕 이것들이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다섯 추기경들은 드물게 당황한 듯이 교황을 보았다. 그만큼 돌발적인 일이었다. 황제의 측근들도 분노하듯 교황을 노려보았다.
‘신성드래곤만 소환할 수 있었어도 이런 치욕은……!’
황제도 열 받은 기색이었지만, 모든 상황에서 신은 교황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 그랬는데…….
“허이고, 지랄. 신성드래곤만 있으면 꿀 먹은 벙어리 될 것들이 옘병하네.”
“?!”
2층 난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교황과 그 가신들조차도 흠칫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난간 어디에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들려오는 건 당황한 목소리뿐.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이리 안 와?!”
“아,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빨리 와!”
심지어 목소리들이 매우 귀에 익다. 가신들에게도 그랬지만, 특히 그곳에 있는 추기경들은 이 목소리를 절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사실은 목소리 따위, 몰라도 안다.
이 상황에서 저딴 말을 당당하게 지껄일 수 있는 건, 그 또라이인 아이작 에슈아밖에 있을 리가 없잖아……!!
청의 가주는 조용히 미간을 짚었다.
‘아이작… 슈리.’
그 또한 손자들의 목소리를 모를 리 없다. 그와 동시에 일라이가 교황에게 뭐라고 하려는 순간, 황제가 돌아섰다.
“폐하!”
황제는 참으로 신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이작이 말하는 것만으로 신의 인정을 받는 느낌이다.
‘백금발 때문인가.’
곧 열 받은 황제가 검을 뽑는 것 대신, 교황에게서 돌아섰다.
“내 긴히 모두의 앞에서 할 말이 있소.”
황제의 태도에, 교황은 내심 못마땅한 듯 아이작이 사라진 자리를 힐끗 보았다.
금의 추기경도 미간을 좁혔다. 그저 치기 어린 외침이라고 하기엔, 하필 상대가 아이작이라 신경이 쓰인다.
‘그래 봐야 신성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을 텐데.’
왜 이리 불안하지?
동시에 귀족들이 모인 곳에서 황제의 건배사가 시작되었다. 간략한 인사와 함께 축배를 든 후, 황제가 말했다.
“오늘은 그대들에게 중요하게 공표할 일이 있소.”
잔을 든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게, 황제가 중요하다고 말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부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어?”
황제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폐하!”
“아바마마!”
연회장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황실도, 아이작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꺄아아악! 독이다!”
“술! 술이야!”
“황태자 전하가 준비한 술을 드시고 쓰러지셨어!”
“뭐라고?!”
“태의를 불러와라!”
“백의 추기경 각하를!”
연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범인을 찾아라!”
“황태자가 독을 탄 거 아냐?”
그 말에 아이작이 눈을 번득였다.
‘이 새끼들이 어디서 수작질이야?’
범인에 대해 눈치챈 아이작이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시선은 교황을 향했다.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다니.’
아니, 오히려 드러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뭐, 다른 사람들이라면 범인을 평생 찾지 못하겠지만.
‘어디서 감히 해골왕을 속이려 해?’
그는 황제의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곧 아이작이 뒤따라가자, 그림자는 당황한 듯 도망쳤지만-
턱!
아이작의 손아귀에 붙잡혔다.